<91화>
* * *
용병단과의 마지막 거래를 끝낸 요한은 조원들에게 이동을 지시했다. 거래 내용을 듣고 있던 세리와 조원들이 요한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요한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래전부터 안배된, 반드시 진행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이동하면서 상당한 수의 좀비들을 처리해놓았음에도 여전히 거리에는 죽은 자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수색 조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연합 캠프를 향했다.
오랜 싸움에 다들 지쳐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은 반드시 여기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요한 일행은 경계선 한쪽의 철조망을 치우고 내부로 침투했다. 이미 경계선 안쪽은 그들의 안마당. 시야에 걸리지 않고 침투하는 경로쯤은 훤히 꿰고 있었다.
그의 계획대로, 서생연 놈들은 수색조 캠프 안에 꼭꼭 틀어박혀 있었다.
“옥상에 둘, 2층 창가에 하나.”
요한이 무전기를 들어 옹 상병에게 지시했다. 옹 상병은 수색조 건물이 잘 보이는 건물에 자리를 잡고 세 명의 조원들을 사살했다. 옥상과 창가에서 경계하던 침입자들이 금세 모습을 감췄다.
이제 놈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리라.
요한은 수색조를 퍼트려 사방을 포위한 채 기다렸다. 중간중간 놈들의 저항이 이어졌으나, 그때마다 놈들의 총알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옹 상병의 신들린 듯한 저격이 이어졌다.
네 명째가 쓰러지고 나서부터는 누구도 옥상으로 올라오거나 창가에 머리를 내밀지 못했다.
한참이나 대치가 지속됐다. 침입자와 캠프의 주인이 뒤바뀐, 주객이 전도된 기묘한 대치.
당장에라도 한바탕 붙을 것처럼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으나, 양측 어디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
지루하고 피곤한 대치가 이어져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슬슬 지니가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개백정에서 무전이 도착했다. 몇 시간 전보다는 다소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분기탱천한 음성이었다.
-내가 많은 싸움을 해봤지만,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적은 처음이야. 이 개자식아. 내 손에 몇 명이나 인질이 잡혀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건방지게 우리를 공격한 거야? 응?
고루하고 진부한 협박. 요한은 천천히 송신 버튼을 누르고 또박또박 말을 곱씹듯이 내뱉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목숨은 살려주지.”
-으하하!
무전기 너머로 기차 화통을 집어삼킨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송수신기를 살짝 떨어트렸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농담이 지나쳐. 지나치다고. 네놈이 날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알면서도 머저리처럼 아가리를 들이댄 건 아주 단단히 잘못 판단한 거야. 그대로 되돌려주지.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팬티까지 다 벗은 채로 문 앞으로 모여라. 네놈은 아주 쓸만해 보이니까 내 밑으로 들어올 기회를 주지. 와서 나한테 무릎 꿇고 내 걸 빨아. 목숨은 살려주지.
이번엔 요한이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특유의 저질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하, 웃어? 좋아. 지금부터 5분에 한 명씩 사지를 절단 내 주지.
“해.”
-뭐?
“그냥 다 죽이라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도 너희는 한 놈도 못 빠져나갈 테니까. 매일 밤, 너희를 죽이러 찾아가지. 한 시도 잠들면 안 될 거야. 너희가 잠든 순간 난 네놈을 죽이러 갈 테니까.”
-하, 시건방진 새끼.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다. 말라비틀어져 죽을 때까지. 죽은 네 부하들처럼 말이야. 아,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네놈은 반드시 가장 괴롭고 잔인하게 죽여준다고 약속하지.”
요한은 양껏 제 할 말을 마치고선 일방적으로 무전을 뚝 끊어버렸다. 무전 건너편에서 개백정이 송수신기를 쾅, 내려놓고 씩씩거렸다.
“으아아!”
쾅! 개백정이 분을 못 이겨 송수신기로 무전기를 내려쳤다.
쾅, 쾅! 무전기의 송수신기가 박살 나 부서질 때까지 그의 발광이 계속됐다.
그러고도 성에 차질 않았는지 그대로 FM 무전기를 집어 던졌다. 무전기가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생연 전투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개 같은······.”
개백정이 거친 숨을 훅훅 내뱉으며 그대로 지하실로 달려 내려갔다.
쾅! 지하실 문을 걷어차며 개백정이 들어오자 생존자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지하실 앞쪽에는 머리가 박살 난 안 중위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 서준이 쓰러져 있었다. 한쪽에는 생존자들에게 압수한 장비들이 노란색 플라스틱 통에 쌓여 있었다.
누군가 오줌을 지렸는지 지하실 내에 꼬릿꼬릿한 지린내가 진동했다.
“훅, 후욱-”
개백정이 당장에라도 앞으로 튀어 나갈 듯한 눈깔로 생존자들을 노려봤다. 서슬 퍼런 눈길이 닿을 때마다 캠프 생존자들의 오금이 저려왔다. 그리고 그때, 순간적으로 서준의 몸이 꿈틀했지만, 개백정은 제 화를 삭이느라 그 모습을 놓쳤다.
“어지간히 미움받은 자식들인가 봐, 리더란 놈이 인질을 다 죽여달라고 성화인 걸 보면.”
그런···!
생존자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탄성이 터졌다.
개백정이 그의 부하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야.”
“예.”
“열 명. 열 명의 멱을 따서 테라스 밖으로 모가지를 던져. 놈들이 상대하고 있는 게 누군지 똑똑히 보여 줘라.”
“예.”
짤막하게 대답한 부하가 총기를 철컥, 장전했다. 한쪽 생존자들을 향해 겨냥하자 생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더 뒤쪽으로 가기 위해 좁은 지하실 안에서 발버둥 쳤다.
그가 조정간을 자동으로 두고 한바탕 긁어대려고 할 찰나, 지니가 그 총구를 내렸다.
“잠깐, 허니.”
“뭐야?”
“굳이 이럴 필요 없어.”
개백정의 기세는 그의 본처라도 때려죽일 듯이 흉흉했다. 지니가 식은땀을 훔치며 그에게 요한의 집무실에서 찾았던 문서를 건넸다. 좀비 웨이브에 대해 적혀 있던 문서였다.
문서를 확인한 개백정이 인상을 썼다. 이것들은 이미 진작에 다 확인한 것들이 아닌가?
“이게 뭐?”
“이 문서가 사실이라고 치면··· 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잖아. 좀비 웨이브가 일어날 거야. 그리고 놈들이 있는 곳은 이곳과 달리 문짝이 없지. 좀비 웨이브가 일어나면 버틸 수 없다는 이야기야. 우린 그냥 버티면 돼. 조급해할 것 없어.”
“좀비 웨이브가 일어나서 변종이 나타나면 우리라고 좋을 것 같아?! 게다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허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개백정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씩씩거리다가 이내 그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가면을 벗듯 분기탱천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살벌한 함박웃음이 깔렸다. 지니가 마주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놈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놈들은 좋든 싫든 먼저 기어들어 올 수밖에 없어. 괜히 많은 개들한테 흠집 낼 필요는 없어.”
지니가 깔깔 웃었다. 전투조가 많이 상했다. 그만큼 많은 전리품을 챙겨가지 않으면 수지가 안 맞는다.
어느새 평온해진 개백정이 그 특유의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모를 얼굴로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아낙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악!”
“그래도 주인을 못 알아보는 개새끼한테 본보기는 보여 줘야지.”
개백정이 그대로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질질 끌고 올라갔다. 2층 테라스 옆 벽면에서 여인의 목을 반쯤 그어버렸다.
여인의 목에서 시뻘건 핏물이 쏟아지듯 새어 나왔다. 그러고 나서, 놈은 여인을 발로 차듯 테라스 밖으로 밀어냈다.
“어······. 어, 어.”
여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피가 철철 흐르는 목을 붙잡은 채 테라스 난간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러고서는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구조자를 향해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살려주··· 그르륵.”
그러나 소리는 곧 가래 끓는 소리로 바뀌었다. 목과 입안이 피로 가득 찬 탓이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난간을 붙잡고 있던 여인이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다 테라스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 여인의 연약한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저 미친!”
몸을 엄폐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색 조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혁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자 스위퍼가 그를 만류했다.
“어이, 진정해. 요한의 지시가 올 거야. 그리고 입술 너무 세게 깨물지 마. 괜히 상처 나서 좀비 되고 싶지 않으면.”
“으, 으으······!”
분하다. 분하고 원통하다.
하지만 혁은 참아냈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무언가를 망칠 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 제자리서 대기하라는 요한의 무전이 들려왔다.
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놈들이 제 문서를 제대로 봤다면, 좀비 웨이브에 대해서도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본인들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도, 자신들이 들어갈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을 테지.
그래. 쓸데없는 움직임 보이지 말고 기다려라. 원하는 대로 곧 들어가 주마.
수색조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분명 잔인하고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일러둔 만큼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터다. 지금은 기다릴 때였다.
그때, 수색조 전용 채널로 무전이 들렸다.
-형, 혹시 듣고 있어요?
정환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챈 요한이 황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무사했구나.”
-네, 형. 어디에요?
“S존 주차장으로 와라.”
-네!
왠지 모르게 밝아 보이는 정환의 목소리에 한시름 놓았다. 가장 신경 쓰던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다른 수색 조원들도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는지, 정환이의 무사한 목소리가 들리자 방금까지 어두컴컴했던 수색조 사람들의 안색이 그나마 밝아졌다.
잠시 후 정환이 합류했다. 정환은 다소 들뜬 얼굴로 요한을 보자마자 달려왔고, 그의 등 뒤에는 낯익은 얼굴의 여학생이 숨어 있었다.
문제의 원흉이군.
요한은 그녀를 보자마자 이 사건의 원흉 중 하나인 걸 깨달았지만, 굳이 불편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쩌면 이 친구 때문에 정환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환은 상황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형, 그 수희라는 여자, 완전히 미친 여자예요.”
“목소리 낮추고, 천천히 이야기해.”
“아··· 네.”
요한의 타박에 정환은 잠시 숨을 고르고서는 아영이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요한에게 전해주었다. 그간의 수수께끼가 하나로 딱 맞아떨어지듯 풀려나가는, 그런 이야기였다.
수희. 그 여자는 파크타운 캠프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당시 요한에 의해 쫓겨났던 마이클, 지금의 리더 마르코, 그리고 대부분의 파크타운 출신의 남자들이 그녀의 잠자리 파트너였다. 그리고 그녀는 뒤에서 남자들을 조종하며 아주 교묘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캠프 리더들 및 수색 조원들 외의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거의 드문 요한으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교묘한 행적이었다.
무엇보다, 캠프 리더였던 마르코가 그녀의 수족이었던 이상, 요한이나 수색 조원으로서는 정황 파악이 어려울 수밖에.
보복을 피하려고 요한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다소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루기 쉬운 어리숙하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끌어들여 회유와 협박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갔다.
내성적이었던 아영이에게 남자들과의 잠자리를 요구하고 은근한 협박을 일삼은 탓에 언제부턴가 그들을 피해 숨어 있거나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 다녔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요한은 그의 등을 두어번 두드려 주었다.
“그래. 고생했고. 가서 자리 잡아라. 일단 싸움부터 끝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