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89화 (89/176)

<89화>

껄껄거리는 웃음이 섬뜩하게 날아와 박혔다. 이 미친 사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개백정은 그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생존자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 참, 환영식이 성의가 없구만. 이대로 끝내면 재미가 없잖아. 그렇지?”

개백정의 시선이 생존자들을 훑어보다 마르코의 앞에서 멈췄다. 마르코가 그의 눈빛을 받고 흠칫 몸을 떨었다.

캠프의 리더였던 안 중위와 서준이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혹시라도 다음 서열의 생존자를 찾는다면 십중팔구 자신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이렇게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거기 너.”

개백정이 마르코를 가리켰다. 마르코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계속해서 내뱉었다.

“아무 여자나 한 명 데리고 와. 내 취향에 딱 맞는 거로. 취향에 맞으면 여자를 따먹고, 취향에 안 맞으면 네놈의 머리통을 따 주지.”

“으, 으아아-”

“허어?”

마르코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떴다. 죽기 싫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이미 눈이 새하얗게 뒤집힌 그가 옆에 있던 지혜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악! 왜 이래요!”

지혜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마르코의 손에 끌려 나왔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울며 소리쳐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혜를 끌고 나온 마르코가 훅훅거리는 입김을 내뱉었다.

개백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눈물 콧물이 엉망진창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굴도 주먹만 하고, 이목구비도 오목조목한 게 제법 미인상이었다.

“호, 제법인데. 좋아 넌 들어가.”

마르코가 콧바람을 훅훅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에게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것 보라고, 내가 아주 자비로운 사람이야. 말만 잘 들으면 해치지 않는다니까? 뭐 해? 옷 벗어.”

엉엉 울고 있는 지혜를 툭 건드렸다. 지혜가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랐다.

미친놈! 생존자들이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저자가 이곳에서, 생존자들이 보는 곳에서 지혜를 겁탈하려 하고 있었다.

“난쟁이.”

“예.”

“이년 옷 다 벗기 전까지 30초마다 한 명씩 죽여. 아무나 상관없어.”

“벗을게요! 벗을게요! 흑······.”

지혜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할 때쯤, 박 노인이 천천히 일어서서 앞으로 나왔다.

“뭐야, 할아범. 일어서라고 한 적 없는데.”

“이제 됐지 않은가. 그만하게······.”

개백정의 주먹이 박 노인의 안면을 강타했다. 코가 내려앉고 피가 쏟아졌다.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가 힘겹게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같은 사람끼리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머리가 나빠? 너희는 개야. 개면 개답게 굴어야지.”

“···옥상에 텃밭이 있네. 한두 달만 있으면 신선한 농작물이 재배돼. 원한다면 원하는 장소에서 식량을 재배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돕겠네. 부디 그만해주게.”

오호라, 개백정이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총기를 목 뒤로 걸쳤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옷을 벗는 것을 멈추고 파르르 떨고 있는 지혜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 할아범은 용기가 마음에 드니 살려주지. 앞으로 내 밑에서 계속 농사를 지으라고. 나는 내 할 일을 마저 할 테니까. 야, 안 벗고 뭐-”

개백정이 지혜에게 한바탕 쏟아부으려는 찰나, 지니가 헐레벌떡 지하실로 들어왔다.

“허니! 이쪽으로 와 봐.”

“뭐야, 한참 재밌는데. 끝나고 얘기해.”

“급해. 중요한 일이야.”

개백정이 인상을 썼다. 자신을 방해한 것은 불쾌했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강아지들, 기다리고 있어.”

개백정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2층 요한의 집무실이었다. 단단히 잠겨 있었던 문고리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박살나 있었고, 방 안에는 한바탕 도적이 지나간 것처럼 각종 캐비넷이 열린 채 여러 종잇조각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었다.

지도, 내부 생존자 리스트 등등 중요한 무언가가 적힌 문서들로 보였지만, 개백정에게는 별로 중대사가 아니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려는 찰나 지니가 한 뭉텅이의 종이들을 건넸다.

“이걸 봐봐.”

그가 건넨 문서에는 좀비 아포칼립스 행동지침이라는 제목으로 좀비들의 법칙과 변종 좀비들의 이름, 형태, 성향 등등이 적혀 있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개백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서에 적힌 변종 좀비의 리스트는 스무 종이 넘었다. 단순한 경험담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내용이 치밀하고 상세했다.

자신들도 변종 좀비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하나 고작 한 번이었고 당시 피난민 캠프의 군인들이 상대할 때도 적잖은 피해를 냈었다.

이렇게 많은 변종 좀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그러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개백정의 눈이 문서의 아래쪽을 쭉 훑었다.

좀비 웨이브의 규칙, 변종, 그리고 공기감염. 공기감염에 대한 최근 문서가 문서의 마지막 장이었다. 개백정으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내용이라 저절로 눈이 갔다.

- 좀비의 법칙 7(추정)

공기감염의 확률에 대하여 : 공기감염의 원인이 변종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 일례로 좀비 웨이브가 일어난 시점에서는 작은 상처에도 빠르게 감염되었다. 반면 평시에는 제법 큰 상처에도 감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변종들이 어떠한 특정 바이러스를 공기에 내뿜고 다니고 그게 대기 중 감염을 유발한다면, 좀비 웨이브만 피하면 공기 중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은 확증이 부족하다.

“허······.”

“그게 끝이 아니야. 이걸 봐.”

두 번째 문서에는 서울 생존 연합의 리스트, 바로 자신들의 명단이 적힌 문서가 있었다.

이름 또는 별명과 특징, 예상 합류 시점까지 적힌. 괴이쩍은 것은 현재 시점보다 뒤의 일까지도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문서에는 2018년을 넘어 2019년도에 합류하게 된다는 일행의 이름까지도 적혀 있다.

그저 미치광이로만 치부할 수도 있는 문서였지만, 그 안에는 지금 내부 간자를 심어 캠프 깨기를 진행 중인 캠프의 에이스들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김설화조차 모르는, 그들의 적이 절대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소름이 등짝에 오소소 돋아났다.

“도대체 이 새끼는 뭐야!”

개백정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불현듯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빠끔히 쳐든다. 개백정이 무전기를 든 부하에게 소리쳤다.

“미친개는! 콜라곰은! 아직도 연락 없어?”

“···예, 예.”

“이런 쳐 죽일, 대체 뭐야, 이게?”

개백정이 부하 한 명이 들고 있던 무전기를 빼앗아 들고 호출 버튼을 연타했다.

“미친개! 콜라곰! 대답해라!”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는 응답이 없다. 정말 놈에게 모두 당한 걸까? 도대체 어떻게? 이곳의 싸움이 정상적인 시나리오였다.

아무리 숙련된 생존자들이더라도, 사람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서생연의 전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분명, 그래야 하는데.

그가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무전을 쳤다.

“요한, 네놈 거기에 있지······! 대답해라 요한! 여기는 네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던 캠프다. 백 명이 넘게 숨겨 뒀더군! 아, 내가 열 명을 넘게 죽였으니 이제는 백 명은 안 되겠군. 꼴이 좋아 아주! 네 충실한 부하가 너를 간절히 부르짖더군, 요한, 요한! 하면서 말이야! 내가 머리를 으깨 버렸지만!”

개백정의 목소리는 흡사 필사적이었다. 하나 여전히 무전기 건너편의 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느꼈다. 그저 직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남게 해준 상당히 정확한 직감.

“이 새끼야!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개백정은 미지의 적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좀비 사태가 터진 후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 * *

수색조는 서생연의 뒤를 잡기 위해 용병 캠프와 본진의 중간 지점인 굴포천역에서 산개한 채 대기했다.

꾹.

요한이 콜라곰을 사살하고 빼앗은 적의 FM 무전기를 화풀이하듯 세게 내려놨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을 보며 세리가 물었다. 요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다음 또박또박 전파했다.

“왜? 무슨 일이야?”

“본대가 붙잡혔어. 사망자도 있고. 전부 인질로 잡힌 것 같다.”

“뭐, 뭐? 정환이는!?”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환이에게 변고가 생겼다고 오해한 세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 말도 안 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망연자실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세리를 다독거리며 요한이 캠프용 무전기를 들었다.

“모두 상동으로 이동한다. 수색조 캠프를 포위할 거야.”

-뭐야, 무슨 일인데?

“놈들이 본진을 쳤어. 플랜 D로 간다.”

무전 너머로 스위퍼의 침통한 음성이 들렸다. 서생연이 연합 캠프를 공격하는 것은 브리핑할 때 가장 희생자가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언급해 두었던,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였다.

“혹시 몰라 얘기하는데 마음 독하게 먹어라. 특히 혁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제 자리를 지켜. 만약 누군가 지시를 어기거나 멋대로 행동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인다.”

수색조의 각오를 다잡는 요한의 음성은 흡사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이 사달이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내심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백정의 본대가 연합 캠프에 당도하는 것은 플랜 D, 네 번째 시나리오였다. 염두에는 두면서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개백정과의 싸움은 처음 혁을 구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만 해도 요한의 예상에 없던 계획이었기 때문.

그런 만큼 퍼즐 조각처럼 작전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상당한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시나리오의 핵심은 수색조 캠프 지하의 대피소.

요한은 자신이 없을 때 본진이 공격당할 상황에 대비해 수색조 캠프 지하에 대피소를 만들었다. 변고가 생겨서 캠프가 난도질당하더라도 수색조 인원들만큼은 살려야 했으니까.

아예 쉘터에서 물자들을 이동시킬 캠프를 선정할 때부터 지하를 대피소로 운용할 만한 곳을 1순위로 두고 장소를 골랐다.

과장을 보태서 핵폭탄이 떨어져도 버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대피소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스페셜리스트 셔터맨 정환이가 어떻게든 생존자들을 데리고 대피소로 들어가고, 잘 안배된 대피소 안에서 문을 잠근 후 수색조 인원들이 놈들의 위치를 파악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문제였다.

대피소 농성 외의 다른 대안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 개코와 그가 기르는 사냥개들의 추적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니의 두뇌와 개코의 추적이라면 캠프를 버리고 도망치더라도 결국 따라잡힐 수밖에 없고, 흩어져서 숨어 있더라도 각개격파 당할 뿐이다.

대피소가 들킬 것도 예상 범위 안이었다. 아니, 시간의 문제일 뿐 반드시 발견될 거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서생연을 한곳에 묶어둘 방안이었다. 놈들을 더 이상 돌아다니거나 날뛰지 못하게 막은 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덫. 그런 덫이 필요했다.

시나리오를 짜던 당시에, 한참을 고민했던 요한은 집무실 캐비넷에 남기고 온 아포칼립스 생존 지침과 그의 적 서생연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기록한 문서를 떠올렸다.

원래의 목적은 기억의 소실을 막고 자신이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실종되었을 때 이후 캠프 리더에게 전달하기 위한 용도였지만, 그것들의 존재를 떠올렸을 때 마침내 시나리오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끼워졌다.

그래서 정환을 보낼 때 문서들을 소각하거나 치우라고 하지 않고 놈들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곳에 보란 듯이 놔뒀다.

나는 너희가 누군지 안다. 너희는 내 손바닥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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