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정광에 손에 들린 일본도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스위퍼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일본도? 건방지다.
강하니 조심하라는 요한의 평가를 스위퍼는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도를 들고 있다는 자체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만을 사냥해왔다는 증거다.
좀비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다. 자신들이 잡아 온 수의 좀비와 싸워 왔다면 진작에 저 무기는 무뎌지고 부러졌으리라. 물론 일본도가 영화에나 나오는 비브라늄으로 만들었다면 모를까.
놈은 이 시대를 대하는 자세가 잘못됐다.
스위퍼가 놈을 향해 소총을 두두두 난사했다. 정광이 격발과 동시에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총알이 철갑에 스치는 소리가 쩡쩡거리며 울렸다.
온몸에 떡칠한 무장이 놈의 움직임을 붙잡았다. 정타를 피하기엔 충분했지만, 스위퍼의 기준에서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스치듯 맞은 총알이 놈의 몸에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을 터다.
정광의 몸은 어두운 시야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놈은 근접전을 원하고 있다. 온몸의 기세에서 느껴진다. 어둠의 힘을 빌려 순식간에 지척까지 달려들 기세다.
원한다면 받아주고말고.
스위퍼가 소총을 등 뒤로 조여 매고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두 좀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조원이었던 두 사람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고선 두 사람의 피를 도끼에 흠뻑 적셨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닌 행동이었다.
이제 스치면 감염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다. 동등한 조건에서의 싸움. 놈이 잔인하게 살해한 동료들의 피로 놈의 숨통을 끊어주리라.
스위퍼가 하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가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스위퍼는 혹시나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할게. 끼어들지 마.”
확실하게 의도를 전달한 스위퍼가 모든 오감을 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선다.
건물 내부는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지만, 제법 넓었고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공간이 많았다. 기둥이나 안내대 등 숨을 만한 엄폐물도 많았다.
스위퍼가 손도끼를 꽉 그러쥐고 놈이 움직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와라.
쐐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정광이 왼쪽 안내대 옆 어둠 속에서 번쩍하듯이 모습을 나타냈다.
스위퍼가 도의 궤도를 피해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일본도가 부웅,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움직이는 속도도, 휘두르는 속도도 빠르다. 저 무장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얼마나 많은 훈련과 단련이 있었는지 짐작됐다. 하지만 휘둘러지는 일본도는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그의 무기는 너무 길었고, 그만큼 궤도가 훤히 드러났다.
리치는 열세, 속도는 우세. 그렇다면 완력은?
스위퍼가 달려드는 일본도의 궤적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두 날붙이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큭······.”
스위퍼가 두어 발 물러섰다. 놈의 일본도와 자신의 손도끼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손이 얼얼한 충격이었다.
놀라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똑같은 날붙이라도 강도가 전혀 다르다. 일본도는 베고 찌르기 위한 무기라면, 손도끼는 찍고 부수기 위한 무기다.
같은 힘이라면 응당 저쪽이 부서져 나가야 맞다. 하지만 그의 일본도는 충격을 버텨냈다.
스위퍼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요한 이후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강한 사내는 처음 만나본다.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라고 느낄 터다.
그렇지만 정광은 얼굴색 하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한 표정이 기분 나쁘다. 말 그대로 기분 나쁜 사내다.
정신이 흐트러지는 걸 잡기 위해 스위퍼가 정광을 향해 손도끼를 붕붕 휘둘렀다.
수많은 적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찍혀나간 손도끼가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마치 복싱 선수가 스웨잉을 하듯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며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완력도 범상치 않은데, 속도마저 빠르다. 이대로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조급함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실수였다. 항상 콤팩트하게 휘두르는 걸 중요하게 여기다가 딱 한 번 힘을 과하게 주고 휘둘렀다.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오히려 도끼의 속도가 죽었다. 스위퍼의 손도끼가 정광에게 붙잡혀 허공에서 멈췄다.
“흡!”
스위퍼가 붙잡힌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주었으나, 손도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 놈의 힘이······.
어쩌면 하진보다도 더 완력이 세게 느껴졌다. 마치 도끼가 돌에 박힌 듯했다.
스위퍼가 낑낑거리는 사이 정광이 일본도를 든 손을 뒤로 길게 뺐다가 앞으로 쭉 찔러왔다.
스위퍼가 잽싸게 몸을 틀어 일본도를 흘려보낸 뒤, 놈의 팔목을 붙잡았다. 서로가 서로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모양새.
꽝!
놈이 헬멧 채 머리를 부딪쳤다. 기절할 듯한 충격에 눈앞이 아찔하고 샛노랗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딱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머리를 흔들며 눈에 힘을 줬다.
이대론 위험하다. 일단 주 무기를 포기하더라도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벌린다.
힘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으니 예비 무기로 속도전으로 가는 게 맞았다. 스위퍼가 고민을 끝내고 뒤쪽으로 튀어 나가려는 찰나, 놈의 눈이 부릅떠졌다.
뒤쪽에서부터 튀어나온 날카로운 날붙이가 놈의 목 아래쪽을 찌르고 입을 통해 튀어나와 있었다. 하진이었다. 정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기세에 비해 허망한 최후였다.
스위퍼가 허탈한 표정으로 도끼를 빼내며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처리할 수 있었는데.”
“어리광부리지 마라.”
바보 같은 소리다. 그 또한 무도인이고 정정당당한 대결의 중요성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결투도 승부도 시합도 아니었다.
놈은 동료를 죽인 살인마고, 어떻게든 죽여야 할 원수다. 만약 스위퍼가 놈을 압도했다면 끼어들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는 동료의 위험을 손가락 빨며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주둥이가 뚫린 정광이란 놈도 그랬다. 상대가 두 명인 걸 알면 자만하지 말았어야지.
끼어들지 말라는 스위퍼의 말을 믿은 건지, 자신의 존재를 새카맣게 잊은 건지,
스위퍼와의 전투가 예상보다 격렬해 대응하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어쨌건 놈은 죽을 이유가 충분했다.
“아니, 무도인이 이렇게 일대일의 싸움에 끼어들어도 돼?”
“내가 살던 스포츠의 세계는 정정당당한 과정보다 승리가 중요했지.”
하진이 나이프를 뽑아냈다. 정광의 몸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진은 놈의 머리에서 헬멧을 벗겨냈다. 피와 땀이 흥건히 떨어졌다. 다시 한번 머리에 나이프를 찔러넣었다.
“그건 지금 살고 있는 세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음··· 그래, 인정.”
하진의 말에 스위퍼가 고개를 끄덕이곤 주먹을 내밀었다. 하진이 그 주먹을 툭 쳤다.
“도와줘서 고마워, 형씨.”
스위퍼가 정광의 시신을 툭툭 건드려보다가 놈의 방탄 복장을 벗겼다. 혹시 쓸만한지 한 번 착용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윽.”
새로운 장비를 시험해보려는 생각은 금세 접어두었다. 방탄복 안쪽이 땀으로 흥건하다. 퀴퀴한 남자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진짜 이상한 놈이네. 이렇게 더우면서 왜 이렇게··· 이건 못 쓰겠네.”
“별로 실용적으로 보이지도 않아.”
“그건 그래. 우리도 대장 형씨한테 합류하자. 옹 상병, 지원, 정수 내려와. 시신 확인하자.”
스위퍼가 대기 중인 일행에게 무전을 쳤다.
승리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죽은 세 사람을 볼 면목이 없다. 그가 찰랑거리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 *
수색조 캠프.
격돌 20분 전.
수색조 캠프로 대피한 백여 명의 생존자들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가타부타 자세한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간략한 위기상황만을 전달받은 채 끌려오듯이 캠프로 끌려온 탓에 눈빛에는 불안감이 가득하고 몸놀림은 어수선했다.
몇몇 생존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불만 불평을 털어내기도, 몇몇 생존자들은 수색조 캠프의 쾌적한 거주환경을 보고선 볼멘소리를 냈다.
“어휴,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아니, 자기들만 이렇게 좋은 곳에서 지내도 되는 거야?”
특히나 병원, 교사 캠프에서 지내는 생존자들의 반발이 지나쳤다. 딱딱한 병원 침대나, 교실 바닥에서 생활해야 했던 그들이기에, 방마다 갖춰진 침대며, 게임기며, 각종 오락 도구들은 쌍심지를 켜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자, 꾸물대지들 말고 빨리 지하 대피소로 이동합시다!”
서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요한이 이렇게 대대적인 이동을 지시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분명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리라.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몇몇 생존자들은 탐탁잖다는 눈빛을 했지만, 일단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요한의 지시라니 어쩔 수 없지, 라는 듯한 투였다.
서준이 앞장선 생존자들이 지하 대피소에 도착했다. 검은색 전등 스위치가 올라가자 팟, 하고 지하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서준과 생존자들은 각기 다른 의미로 놀랐다. 서준은 그득하게 쌓여 있는 물자와 마치 이런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튼튼하게 설비된 지하실에 놀랐고, 생존자들은 백 명이 들어가 앉기엔 좁고 칙칙한 환경 때문에 놀랐다.
“과연 요한······.”
지하실의 철문은 서준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문을 잠그면 바깥쪽에서는 열 수 없도록 바깥쪽 문고리를 완전히 떼어냈다.
그리고 문 안쪽에 단단한 잠금장치를 이중으로 만들어 둔 데다가 안 그래도 두꺼운 철문에 합금을 몇 번이나 용접했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열고 들어오기 어려워 보였다.
‘공기가 좀 부족할 수는 있겠는데.’
다만 문제라면 협소한 공간이다. 창 하나 뚫린 게 없고 습기와 눅눅한 공기 때문에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들어온 순간 숨이 턱 막힐 듯한 장소이기는 했다.
그래도 뭐, 조금 불편한 게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아니, 그런데 화장실은 어떻게 해요?!”
한 생존자가 서준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그에게 질문한다고 한들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난들 알겠냐? 대충 음식 먹고 남은 통에 싸던지!”
“이렇게 좁은 데서 얼마나 있으라고······.”
“잠도 여기서 자나요?”
“아, 거 참 쫑알쫑알 말 많네! 다들 조용히 대기나 해. 정환이 말 잊었어?”
서준이 툴툴거리자 생존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캠프 리더 중 유일하게 누구에게나 불친절한 사람 중 하나였다.
불안한 눈빛으로 지하실 내부를 둘러보던 안 중위가 서준에게 다가왔다.
“서준 님,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여기서 대기하라는 게 요한의 지시인데.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며칠만 버티면 된다잖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여기도 군사훈련을 마친 무장 인원이 서른 명이 넘습니다. 적도 많아 봐야 서른 명 남짓이라지 않습니까? 게다가 시가지 전투에서 건물을 선점하고 안에서 농성하면 상당히 유리합니다. 웬만한 숫자가 쳐들어와도 끄떡없습니다. 게다가 위기 상황에서 여차하면 창문을 깨고 도망칠 수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숨어 있으면 그냥 독 안에 든 쥐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만약 놈들이 이 건물에 불이라도 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우리는 그냥 저항도 못 해보고 익은 고기가 되는 겁니다. 서준 님.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