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딱 15분만 찾고 돌아간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제 과실로 붙잡힌다고 한들 캠프에 치명적일 정도로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아마 수색조 캠프의 위치조차도 정확히 모를 거다. 요한의 지시와 연약한 학생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반반씩 섞여 그녀를 찾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는 있었으나, 이러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게 어떤 방향으로 보나 더 큰 문제였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다. 리더도 그걸 바라고 자신을 보낸 것일 터다.
정환은 헉헉거리며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고개를 저으며 포기하려고 할 때쯤, 구석진 정자 끄트머리에서 여학생의 쪼그린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본 순간, 정환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려버렸다.
“아영이니?”
다가간 정환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야옹.’ 소리를 내며 왕왕대며 먹이를 먹는 고양이 무리가 있고, 그들의 앞에는 보급품인 참치 통조림이 따져 있었다.
“어··· 아저씨는······?”
아영이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그녀가 기억났다. 흐릿했던 이미지가 또렷해졌다.
교복 안에 고무줄 트레이닝복을 입고, 양 갈래머리에, 주먹만 한 알 없는 뿔테 안경을 쓴 그 또래의 예쁘장한 소녀였다.
이 와중에 어디서 났는지 블러셔로 어설프게 칠한 발그레한 뺨과 틴트를 바른 듯 발간 입술이 눈에 띄었다.
항상 구석진 곳에 쪼그려 있던, 말 없고 숫기 없던 소녀.
여성 생존자를 챙기고 달래던 것은 주로 세리의 몫이었기에 이미지조차 흐렸던 소녀. 정환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입을 오물거렸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누구 맘대로 밖으로 나오래?’
‘사람 먹을 식량도 없는 마당에 고양이한테 캔을 낭비하다니. 미쳤어?’
한바탕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환은 마음을 갈무리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여자들을 대하는 건 그에게 적잖이 어려운 일이었다.
“가자, 아영아.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정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티 없는, 순수한 눈동자다. 순간 내부 배신자나 프락치를 의심했던 자신이 민망해질 만큼.
“···여기 있을래요. 파크타운은 가고 싶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이 작은 소녀의 등을 밖으로 떠민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정환이 일단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해 손을 붙잡자 그녀가 기겁하며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미안.”
경계심 어린 표정이 폐부를 찔러 왔다. 정환은 자신의 손을 머쓱하게 쓱쓱 쓰다듬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아영아, 지금 캠프에 무서운 사람들이 오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 파크타운으로 안 갈 거니까, 잠시 오빠 좀 따라올래?”
아영이는 잠시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정환의 손을 지나쳐 아래쪽 소매를 붙잡았다.
그때, 멀리서부터 바이크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 * *
- 크레모아 설치 완료.
휴대용 무전기에서 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시 오 분. 작전지시가 끝난 후 딱 한 시간 만에 크레모아 설치와 매복이 완료됐다.
요한과 수색 조원들은 시가지 초입의 두 고층 상가 건물에 매복했다. 매복 장소는 요한이 한 명 한 명 최적의 장소를 직접 골라 지정했다.
혁은 도롯가 양쪽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좀비 시체와 마른 들풀을 이용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은폐한 후 자신 또한 대형 버스 아래에 몸을 숨겼다.
요한은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1층에 자리를 잡고선 혹시라도 이상하거나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매복은 흠잡을 데 없었다.
점검을 끝낸 요한이 FM 무전기(:PRC-999K)의 송신기를 들어 2조에 연락했다.
“스위퍼.”
-예썰.
“그쪽 상황은 어때?”
-문제없음.
최대한 좀비들을 제거하고 시체를 보이지 않게 치우거나 크레모아를 숨기는 데 썼다.
인위적으로 남아 있는 좀비 시체들을 눈썰미 좋은 생존자가 본다면 최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도 있는 만큼 무엇보다 현장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크레모아 격발 역할은 혁에게 맡겼다.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역할. 혁은 기꺼이 그 역할에 자원했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아슴아슴 올라왔다. 한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시가지는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무더위를 자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동 중에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난 뒤라는 점이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순간적으로 아뿔싸, 하는 걱정도 들었었다. 여름철인 만큼 장마나 태풍 때문에 비를 몰고 오면 변수가 가져오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난 이후 하늘은 언제 빗물을 쏟아냈느냐는 듯 잠잠해졌다. 소나기가 내리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CA 지뢰가 다 물에 젖을 뻔했다. 인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천재적인 변수까지도 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용병단, 들리십니까?”
-어, 잘 들린다.
세 개의 군용 FM 무전기 주파수 코드도 새롭게 맞췄다. 용병 캠프에 하나, 1조에 하나, 2조에 하나. 시기적절하게 충당한 무전기 덕분에 한층 작전 수행하는데 안정감이 생겼다.
변수가 생기더라도 즉각 대처할 수 있으리라. 예비 배터리는 하나씩뿐이었지만, 하루 이틀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용병단 노인은 추가적인 전투가 있다는 사실에 불퉁하게 반응했으나, 자신들이 아니었어도 이곳이 표적이 되었을 거라는 요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사실상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카센터는 요한의 캠프보다, 그들의 캠프에 더 가까이 위치했었으니까 설득은 수월했다.
그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요한 일행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그들 자신이었으리라.
보나 마나 용병단은 궤멸하고 남은 사람들은 노예처럼 팔려갔으리라. 그걸 알기에 요한은 그들을 방패막이와 미끼로 삼으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요한은 천천히 기다렸다. 정환을 보냈으니 본대는 무사히 숨어들었을 것이다. 녀석에겐 유약한 면도 있었지만, 일단 한 번 떨어진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잔머리를 너무 굴려서 탈인 스위퍼나, 잔머리 굴리는 법도 모르고 그저 육체적인 능력으로 모든 걸 때려 부숴서 해결하려는 하진, 그리고 쓸데없는 의협심 때문에 종종 일을 그르치는 혁. 세 사람에 비해 신체적인 능력치는 좀 떨어지더라도 임무 수행의 안정감은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혹시 모를 변수가 있더라도 잘 처신할 터다.
시가지에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무전기 소리와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부터 바이크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서생연 생존자들이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진 좀비들의 행렬과 함께.
-12시 방향, 놈들 접근합니다.
때마침 가장 높은 곳에서 쌍안경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경욱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인원은 열댓 명. 마지막 오토바이에 짐수레가 달려있어요.
여기까지는 계산 범위 내다. 2조에서는 아직 교전에 대한 연락이 없었다. 보급품을 가장 먼저 보내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이들보다 먼저 도착한 게릴라 무리가 있을 수 있었다.
요한이 시계를 얼핏 보니 2시간이 채 안 된 시간이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
점조직처럼 보이던 놈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거침없이 달려오던 침략자들은 시가지에 진입하기 전, 크레모아 위치까지 오백여 미터를 남겨 놓고 정지했다. 순간적으로 손에 땀방울이 맺히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1조 전원 전용 채널로 변경한다. 2조는 경계 강화할 것.
요한이 짤막하게 전파하고 시선을 돌리자 선두의 한 사내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요한이 확대경으로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장신의 마른 체형, 등 뒤의 활. 요한도 익히 아는 자였다. ‘콜라곰’이라고 불리는 활잡이다.
답지 않게 귀여운 별명과 달리 서생연 간부 중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높은 서열로 활동하는 간부다.
난리 전에 어떤 직업이었는지는 몰라도, 등 뒤에 달린 거대한 컴파운드 보우에서 쏘아대는 화살은 제법 정확하고 위력적이었다.
주로 조직적인 전투보다는 대좀비전에 특화된 간부였다.
놈은 무리를 멈춰 세운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바닥을 살펴보며 핏자국을 직직 발로 비볐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잠시 저들끼리 숙덕거린 후 콜라곰이 두 사람을 시가지 내부로 보냈다. 정찰조였다.
아마도 시가지 입구에 좀비 수가 너무 적었다는 점과 비교적 최근에 생긴 핏자국이 수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터다. 요한이 목소리를 죽인 채 무전을 쳤다.
“두 사람이 시가지로 접근한다. 무전기 소리 끄고 신호 전까지 모습 드러내지 말 것.”
상황전파를 끝내자마자 요한도 무전기 소리를 줄이고 숨을 죽였다. 여기서 매복이 발각되면 곤란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숨죽인 적막한 매장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뒤 한 사람이 그가 있는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미친. 뭐가 있다는 거야.”
사내는 꺼림칙한 명령이 불만인 듯 혼잣말을 읊조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요한이 숨어 있는 환풍구의 바로 아래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요한의 위치는 환풍구 실외기 통로. 좁은 구역인 데다 환풍기의 회전 날 사이로 시야를 보고 있었기에, 절대로 들킬 일이 없었다.
다른 생존자들도 마찬가지다. 서생연이 신중하게 움직이겠답시고 정찰조를 보내더라도 매복을 들킬 일이 없도록 요한이 직접 확인해보고 고른 장소에 몸을 숨겼다.
절대로 들킬 일이 없다. 버스 밑에 숨은 혁이만 걸리지 않는다면.
쾅!
불현듯 들려온 충격음에 요한이 흠칫 놀랐다.
“아무것도 없구만.”
그저 분을 못 이긴 사내의 발길질 소리였다. 요한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꼼꼼히 수색하던 두 사람이 되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으며 아무도 없음을 피력하자 콜라곰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전진을 지시했다.
요한은 쌍안경으로 그들이 크레모아 근처까지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지정된 장소에 닿자마자 미리 손봐둔 환풍기 날을 밖으로 차듯 뜯어버리고 허공에 총알을 격발했다.
탕!
총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크레모아 격발 신호를 알리는 탄환이었다.
요한은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마자 무전기 소리를 올리고 환풍구를 나온 뒤 건물 밖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상황은 이미 지시된 절차대로였다. 지금쯤 다른 조원들도 무전기를 켜고 기습을 위한 위치로 복귀하고 있을 것.
그리고 이어지는 크레모아 격발.
-격발!
몇 초 뒤 혁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꽝! 꽝! 하는 거대한 폭발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은폐시켜놓았던 크레모아에서 뿜어져 나간 수많은 쇠구슬 같은 파편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어지럽게 비산했다.
피가 튀고 오토바이가 터져나갔다. 그들이 끌던 수레에도 폭발물이 있었는지 연쇄적으로 팡팡 터지는 폭발음이 들렸다.
허공에 폭발로 난자된 살점이 마치 폭죽이 터지는 불꽃처럼 터져나가다 이내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둥둥 떠다녔다.
서생연 무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요한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의 시선에 한 생존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FM 무전기를 향해 기어가는 모습이 잡혔다.
탕! 그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내는 송신기를 붙잡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요한이 휴대용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일제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