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미친 새끼. 스위퍼가 중얼거렸다.
-그럼, 즐거웠어. 친구. 다신 보지 말자고.
무전이 뚝 끊어졌다. 무전이 끊기자마자 요한이 다급하게 스위퍼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전원 모이라고 해.”
“뭐?”
“놈이 온다.”
“하지만 방금 놈이······.”
“안 올 것처럼 얘기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온다. 놈은 반드시 와. 지금 바로 병력을 모아서 출발할 거야.”
요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개백정이 진실을 눈치채는 것도 어느 정도는 계산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진행한 것은 개백정이 직접 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여전히 그의 뒤통수를 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백정은 무전을 끊자마자 사람을 챙겨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상대를 기만하는 기본적인 놈의 방식이었다.
놈은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자신은 놈의 생각을 읽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요한은 놈의 과거 행적과 행동 양식을, 습관을 알고 있었고 놈은 요한을 몰랐다.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개백정의 성향을 미루어봤을 때, 그의 적이 기습을 대비하고 있을 거란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선발대를 파훼한 적이니 어쩌면 김설화를 통해 진입로를 예상하고 미리 매복하고 있다는 점까지도 예측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입로를 변경하거나 다양한 길을 통해 진입하려고 하겠지. 기습을 목적으로 마중 나온 적의 주력부대에 미끼를 던지고 본대를 취하기 위해.
하지만 그마저도 계산 안이다. 놈들은 최소한의 피해로 캠프를 집어삼키는 걸 추구하는 만큼 장기전도 고려할 터다.
놈들의 보급 방식은 오토바이에 짐수레를 연결해서 이동하는 방식. 그러려면 하나의 루트만큼은 짐수레를 운반하기 위해 갓길이 큰 도로를 이용할 공산이 컸다.
최소 세 방향. 많으면 네다섯 방향까지도 흩어져서 진입할 거다. 자잘한 루트는 모두 버린다. 가장 크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곳에 화력을 집중하고, 남은 어그로는 고스란히 용병단에게 떠넘기면 된다.
요한의 시선은 곧바로 김설화를 향했다.
“본거지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좀비 안 마주치고 안 쉬고 오면 두세 시간 정도······.”
자가를 이용하면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이십 분 거리였으니, 바이크를 이용한다는 점에 무장까지 더하면 두 시간 정도. 요한의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시간이다.
“좋아. 스위퍼, 가자.”
요한이 스위퍼를 재촉했다. 준비할 것은 명확했고 시간은 제법 촉박했다. 김설화의 나머지 한쪽 손에 수갑을 채운 후 재갈을 물리려 하자 김설화가 발버둥 쳤다.
“자, 잠깐! 나 지켜 줘야 돼? 개백정 그 새끼한테 넘길 거면 차라리 지금, 지금 죽여!”
“내 손으로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로 놈에겐 안 넘겨.”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설화의 시야는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밖으로 나온 요한이 곧바로 무전을 쳤다.
“수색조 전원 지금 당장 회색 집으로 모여.”
한껏 풀어져서 휴식을 탐하던 조원들이 황급히 하나둘 모인 시각은 오후 한 시.
한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요한이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만지작거렸다.
“정환아. 언제쯤 도착해?”
-거의 다 왔어요.
요한은 정환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말을 아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다들 궁금한 눈치였으나 요한의 눈은 오롯하게 지도에만 고정되어 있었고, 머릿속에는 전투 시뮬레이션으로 가득했다.
마지막이 되어야 하는 싸움이다. 실수도 놓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요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숨 쉴 틈 없는 분위기에, 공간 안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캠프를 지키기 위해 빠져 있던 정환과 나머지 수색조 인원들이 거래 물자와 탄약이 든 대차를 끌고 도착했다.
“형씨, 다 모였어.”
스위퍼가 요한을 툭 치자,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요한이 좌중을 훑어보았다. 17명. 캠프의 정예병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요한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서울 생존 연합이라는 폭력집단의 전진기지를 공격했고 9명을 사살했다.”
요한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사람들은 서생연이 무엇이냐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서생연?’
‘그 있잖아. 방송하는 캠프.’
요한이 힐끗 그들을 쳐다본 후 말을 이어나가자 지방방송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서생연은 자신들을 공격한 캠프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공격하는 집단이야. 한번 이들과 엮인 이상 전투는 불가피하지.”
그는 이에 덧붙여 서생연의 전투방식, 포로로 삼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를 차례차례 설명했다.
특히나 연인을 붙잡았을 때, 여인을 겁간하며 울부짖는 여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내를 좀비 밭에 던져 천천히 물어뜯기는 광경을 지켜보며 웃고 떠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다들 믿기지 않는 잔혹함에 몸부림쳤다.
“놈들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 그래서 놈들이 올 만한 길을 막고 미리 트랩을 설치하고 매복을 한 뒤에 놈들을 일망타진할 거다.”
방금 전에 전투를 끝냈던 조원들도, 한동안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조원들도 전투 예고에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그저 요한의 말만 기다렸고 하진이 짧게 되물었다.
“숫자는?”
“추정컨대 많으면 예순 명, 적어도 서른 명.”
“최소 숫자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하지.”
“피할 방법은?”
“피하려면 지금 바로 벗어나야 해. 하지만 캠프 사람들과 물자를 모두 챙길 순 없겠지. 사람과 짐이 많으면 그만큼 눈에 띄고 움직임이 더뎌지니까. 우리끼리 지금 빠르게 벗어나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음, 하진이 침음을 내뱉었다. 요한도 그 방법을 생각했었다.
하나 수색조는 제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도 지켜야 할 이가 있다. 동석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재호에겐 연인이, 옹 상병에게는 전우들이, 세리에게는 언니를 잃은 후 오랜 기간 단짝처럼 지내 온 지혜가 있다.
그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한 번에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두세 시간 먼저 달아난다고 치더라도 결국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기동력을 뒤로하고 도망치는 건 위험했다.
과거 요한은, 처절하게 패했던 첫 전투 이후 가능한 서생연과의 전투를 피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한 추격과 추적을 피해갈 순 없었다.
서생연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엮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들과 대적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을 피해 서울 바깥에 자리를 잡았지만, 서생연과 요한은 마치 늘어진 고무줄처럼 서로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예감했다.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이상, 지금 당장 그들을 피한다고 해도 언젠가 더 강대해진 그들과 다시금 마주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
기회는 지금뿐이다. 그들에게는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지금 그들을 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자 답안이었다.
다행히 요한의 두루뭉술한 설명에도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말을 덧붙이는 사람도 없었다. 몇 번의 사선과 고비를 같이 넘은 이들인 만큼 요한에게 주는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일단 높은 확률로 예상되는 건 이 두 가지 루트야. 하지만 개백정의 성격을 봤을 때, 이 두 곳 모두 아닐지도 모르고 이 두 곳을 포함해서 다른 루트로도 진입할 수도 있지. 어쨌든 이 주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일방적인 싸움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 여기가 적격이야. 여기 지상엔 남은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폭파 이후 일제사격으로 마무리한다.”
매복이 성공하면 거의 일방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수색조가 매복한 뒤쪽으로는 전부 엄폐물이었고, 시가지로 들어오는 입구 뒤쪽으로는 전부 도로와 허허벌판이었으니까.
이곳 근처까지 온 순간 그들은 들어오지도, 나갈 수도 없는 개미지옥에 떨어진다.
요한의 설명이 이어졌다.
“몇몇은 게릴라 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최소한 전투식량 등 보급품은 이곳으로 올 게 분명해.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놈들 전부 혹은 일부가 다른 루트를 통해서 가족재단 캠프로 향한다면, 그들과 전투가 벌어진 뒤에 방심하고 있는 서생연의 뒤를 친다.”
일방적인 기습, 혹은 앞뒤의 동시타격. 어떤 방향이 되었든 승산이 높은 작전이다.
“우선 유력한 두 곳에 인원을 둘로 나눠서 매복한다. 2조 조장은 스위퍼.”
“라져.”
“조원은 하진, 동석, 옹 상병, 재희, 애리, 정은, 지원.”
호명된 일곱 명이 힘 있게 대답했다.
“1조는 나와 함께 간다. 혁, 세리, 재호, 경욱, 진수, 정수, 에디.”
인원 배분을 끝까지 들은 정환이 손을 들었다. 요한이 눈짓했다.
“형, 저는요?”
“정환은 캠프로 간다.”
“캠프로요?”
“지금 바로 캠프로 가서 사람들을 수색조 캠프로 모은 뒤에 쥐죽은 듯이 숨어 있어. 물자 챙길 시간 없어. 몸만 가서 숨어 있어. 수색조용 물자 남은 것도 있으니 최대한 버틸 수 있겠지. 혹시 들키더라도 안에서 나오지 말고 농성해.”
혹여라도 전투의 여파가 캠프까지 미칠 수도 있었다. 만약에 만약을 대비해서 캠프 인원들의 몸은 숨겨 둬야 했다.
마트, 병원, 학교 모두 눈에 띈다. 하지만 수색조 캠프는 일반 가정집이라 놈들이 쉽사리 찾을 수 없을 터다. 알아채더라도 건물 내에서 자리 잡고 사격하면 웬만한 수는 처리할 수 있다.
“사람들을 전부 모으면··· 좀비 웨이브는요?”
“하루쯤은 상관없어. 혹시라도 웨이브가 일어나더라도 안에서 버텨. 좀비들이 서생연을 공격해 줄 테니까 지하실에 들어가서 단단히 문 잠그고 물자 다 떨어질 때까지 나올 생각 하지 말고. 반드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아. 거부해도 강제로 끌고 가.”
요한의 말에 정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죽게 놔두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 같은 냉혈한인데 되레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챙기라는 말이 의외였다.
“만약, 지시를 거절해서 누군가를 빼놓고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여.”
“···네?!”
“괜히 얼쩡거리는 사람을 남겨놨다가 인질이 되거나 캠프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게 되면 더 위험해진다. 알겠지?”
아, 그런 이유였군.
정환이 그제야 납득했다.
“위험하고 중요한 역할이다. 믿는다.”
“···네, 형.”
“참, 그리고 정환아.”
“네?”
“내 사무실 캐비닛 열어 보면… 음, 아니, 아니야. 진행해.”
캠프에 많은 인원을 뺄 수는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한 명, 한 명이 아쉬워질 테니까.
최소한의 인원을 보낸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적절한 인사는 정환이었다.
요한에게 가장 신뢰받는 인물 중 하나이면서, 결단력과 상황 판단력이 있고, 캠프 사람들에게도 두루두루 신뢰받는 인물.
캠프의 인력들은 요한이 수개월을 고생한 과실의 결정체다. 의사, 간호사, 기술자, 농부 등 각종 전문인력이 골고루 모인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판.
비록 골칫덩이인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절대 버리는 카드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요한은 정환에게 지시를 끝내고 회의를 갈무리했다.
“적은 강해. 아마 우리가 겪은 전투 중 가장 어려운 싸움이 될 거다.”
몇몇 사람이 침을 꼴깍 삼켰다. 요한의 입에서 ‘강한 적’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변종 다윗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변종 다윗과의 전투는 그들이 기억하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우리는 도심을 벗어나 더 안전한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한 명도 죽지 말고 살아남을 수 있게.”
부디.
“압도적인 승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