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쏘아지는 그녀의 손에는 첨예한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마치 납치를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르고 정확한 반응이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흉기에 스위퍼의 동공이 잠시간 확장됐다.
그러나 느리다.
순간적인 기습은 좋았으나 상대가 나빴다. 스위퍼는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날붙이를 스치듯 피해낸 뒤 그녀의 손목과 상박을 붙잡고 확 꺾었다. 우드득, 하고 관절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읍-
관절이 꺾임과 동시에 김설화가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려는 그 찰나의 사이. 요한은 마치 스위퍼와 한 몸인 듯 들고 있던 천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김설화의 팔을 꺾음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새된 비명은 천 속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서생연 간부치고는 허망한 제압이었다.
요한은 발버둥 치는 그녀를 누르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그녀의 귀에 중얼거렸다.
“낯선 타지에서 얕은 잠을 자는 것, 그리고 무기를 항상 쥐고 있는 자세는 훌륭해. 하지만 이번엔 재수가 더럽게 없었어.”
평소라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그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꼭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 순간을 항상 고대해 왔거든.”
읍, 읍-
김설화의 목소리가 침잠하듯 사그라들었다.
요한이 그녀의 얼굴을 뒤집어씌운 천 위로 대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내리찍었다. 가녀린 육신이 한차례 경련하더니 축 늘어졌다. 죽을 정도로 세게 치진 않았다. 요한이 눈짓하자 스위퍼가 그녀의 얼굴과 상체를 자루로 씌우고 꽁꽁 싸맨 후 둘러맸다.
그사이 주변에 김설화의 짐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전부 보따리에 주워 담았다. 덩달아 주변에 쓸 만한 물건들도 조심스럽게 쓸어담았다. 몸만 달랑 사라지면 분명 의구심을 가질 터다.
요한은 그녀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제 발로 떠난 거로 연출했다. 그것도 물자들을 훔쳐서. 깨어난 사람들은 사라진 김설화에 대한 의심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부주의를 자책하리라.
두 사람은 임시대피소에서 무사히 계획을 끝내고 미리 봐둔 수색조 거처 인근의 빈 건물에 그녀를 던져넣었다. 촛불 하나가 간신히 빛을 발하고 있는 어두운 공실이었다.
“이 아가씨, 보기보다 제법 무거운데?”
스위퍼는 숨을 고르며 미리 준비해둔 의자에 그녀를 앉힌 후 씌워놓은 보자기를 벗겼다.
정전기 때문에 산발로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죽은 듯이 감겨 있는 눈꺼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녀리다. 허벅지가 팔뚝보다 얇았다. 얼핏 보면 마치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요한에겐 지긋지긋한 얼굴이었다. 저 외형에 정말 많은 남자들이 희생됐었다.
아니, 희생이라고 표현하기엔 모호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하고 자초한 일이었으니. 간악하고 교활한 치정의 여왕에게 놀아나기는 했으나.
“깨워.”
요한의 말에 스위퍼가 그녀의 머리를 툭툭 쳤다. 몇 차례 두드려 깨웠지만 김설화는 반응하지 않았다.
“안 일어나는데? 얼마나 세게 친 거야, 대장.”
“일어났는데 잠든 척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 상당히 과대평가하네.”
과대평가가 아니다. 경험에 따른 합리적인 의심이다.
요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수통의 물을 그녀의 얼굴에 촥 뿌렸다.
“물 아깝게.”
물벼락을 맞은 김설화가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두어 번 휘저은 김설화가 정신을 차렸는지 젖은 앞머리 사이로 표독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너네 뭐야? 돌았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작은 촛불만이 빛을 밝히고 있는 밀실 안에서, 요한은 주섬주섬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니퍼, 손톱깎이, 나이프. 흡사 고문관이 고문하기 전 도구를 정리하는 모습처럼 살벌했다.
“재갈은 안 물려도 될까?”
“당장 혀 깨물고 죽진 않을 거야. 삶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있는 여자라서.”
말없이 침을 꼴깍 삼킨 김설화의 표정이 사태를 파악했는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녀는 마치 연인을 대하듯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 왜 이러는 건데. 원하는 게 뭐야? 한번 하고 싶어서 그래? 말로 하자 우리. 얼마든지 하게 해줄 테니까. 응? 억지로 하는 컨셉이 좋으면 맞춰줄 수 있으니까, 이것 좀 풀어주라.”
김설화는 불안함 가운데서도 침착했다. 목표로 했던 캠프 잠입 사흘째, 무난했던 진행 중 벌어진 이 해프닝은 예상 밖이었으나, 남자 둘이서 자신을 납치했다면 목적은 빤했다.
겁탈이겠지.
그녀에겐 별일도 아니었다. 남자 두 명이라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두 명이어도 한창 정사가 벌어진 와중에 충분히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열 받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개자식들, 번거롭게 하다니.
김설화가 겉으로는 해사하게 웃으며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와 표정 바뀌는 거 봐. 봤어? 무슨 배우인 줄 알았네.”
“원래 저런 여자야.”
그저 팔짱을 끼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스위퍼와 묵묵하게 고문 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 요한. 요한은 마치 수리검처럼 생긴 날붙이 하나를 들어 올려 검지에 끼운 후 빙글빙글 돌렸다.
전혀 예상했던 종류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설화가 끝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말로 하자고, 젠장! 개자식들아!”
설마,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인가.
아니야, 남자들이 자신을 그냥 죽일 리 없지. 분명히 간살하려고 할 거다. 그게 정상적인 전개니까.
김설화의 머릿속이 회전하는 사이 요한이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 바로 앞에 시선을 맞췄다. 아무런 표정 없는 눈동자에 김설화는 소름이 돋는 기분을 받았다.
“만나서 반갑다. 서울 생존자 연합, 김설화.”
그녀는 마치 게임 캐릭터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수십 개는 뜬 듯한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그동안 몇 명이나 죽였나, 스무 명? 서른 명?”
“무, 무슨 소리를······”
요한은 차갑고 날카로운 날붙이를 그녀의 목에 갖다 대고선 천천히 움직였다. 힘을 주지 않아 피는 나지 않았다. 김설화의 등골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걱정하지 마. 고문은 하지 않아. 상처가 나서 감염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마.”
“······.”
“단, 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면 고통 없이 죽여는 주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미친 새끼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처음 보는 자였다. 분명하다. 저런 분위기의 남자를 만났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알고 있다.
김설화는 상황과 분위기에 압도됐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 순간임을 인식하고 본능적으로 시선을 다른 사내를 향했다.
“거기, 이 남자를 죽이면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어때? 여자든 돈이든, 원하는 사람도 죽여줄게, 이 남자를 죽이고 날 풀어줘!”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갈라놓으려고 시도한다. 소리치는 김설화를 보며 스위퍼가 혀를 찼다.
“와, 진짜 독한 아가씬데?”
“지금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야.”
요한은 단호하게 잘라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치가 떨리는 행적을 본다면 그 누구도 공포감을 느끼게 될 거다.
“풀어줘. 뭐든지 대답해 줄 테니까. 뭐가 궁금한데?”
“아직은 아니야.”
요한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재갈을 물리고 다시 얼굴을 가리는 보자기를 씌웠다.
멀쩡한 정신으로 정보를 듣는 건 위험했다. 그녀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어야 잔머리 굴릴 생각을 하지 못할 터다.
요한이 촛불을 껐다. 방을 밝히던 한 줄기 빛이 사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오롯한 적막의 공간. 인간의 정신을 괴롭히기 제격의 장소였다.
“무섭다고 울고불고하지 말라고. 아가씨.”
무심하게 밖으로 나가는 요한을 뒤따르며 스위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철문이 삐걱거리며 닫히는 소리, 자물쇠가 덜컥거리며 잠그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김설화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몸부림쳤다.
* * *
다음 날 아침, 요한은 수색조를 내보냈다. 챙겨 온 물자는 하루치가 다였고 주둔이 길어질 것 같기에 추가적인 물자가 필요했다.
“혁, 하진, 세리, 옹 상병은 주변 수색해서 며칠 동안 사용할 물자 좀 확보해 와. 글로리플라자는 빼고. 거긴 아무것도 없으니까. 주변 잘 감시하고 조심히 움직여라.”
“알았어.”
스위퍼는 용병단 노인의 감시를 붙여놓고 오전 내 주변 부동산을 들러 지역 지도를 확보했다.
격전지가 될 만한 포인트, 매복이나 습격을 할 만한 장소를 숙지하기 위해서였다. 지도를 천천히 훑으며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렸다.
정오가 지나서 정환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형, 정환이에요.
“그래. 캠프는 어때?”
-별일은 없는데, 그 수희라는 여자요. 캠프 사람들에게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그리고 형이 수색조라는 이유로 진수의 편을 든다고 호소하고 다니나 봐요. 동석 형이 골치 아파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할까요?
흠, 요한이 침음을 냈다. 자신이 없는 사이를 노렸나. 정황은 명백했다.
-그것 때문에 이번 주 배급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하고, 캠프 인원 순회도 시켜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어요.
“인원 순환은 예정대로 진행해. 배급도 지난주 기준으로 그대로 진행하고.”
-그래도 괜찮겠어요? 소문이······.
“괜찮아. 진행해.”
정환의 우려하는 바는 알고 있었지만, 요한은 그냥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로 수희가 당한 일이 전 캠프에 속속들이 퍼져 나갈 것이다. 괜찮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수희의 의도는 약간은 알 것 같았다.
-예, 형. 다녀올게요.
“수고하고, 이쪽으로 합류할 필요 없어. 사흘에 한 번씩 중간까지 와서 상황만 보고해.”
-예.
“그쪽으로 습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습격이요?
“그래. 무기고랑 물자창고 잘 지켜.”
요한의 말에 정환이 불안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무전을 끝낸 요한이 입으로 습- 바람 소리를 냈다. 송수신 거리가 짧은 무전기라 상당히 불편했다.
“출력 낮은 무전기를 쓰나 보구만. 불편하겠어.”
무전 내용을 옆에서 듣고 있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요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5W짜리 무전기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래도 아쉽기는 했다.
“우리한테 PRC-999K가 두 대 있는데.”
노인의 말에 요한이 솔깃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군용 무전기라면 확실히 무겁기는 해도 웬만해서는 거리 제약이 없으니 무전 거리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
“원하는 대가가 있으십니까.”
노인은 한쪽에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는 수갑을 들어 올렸다. 스위퍼가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수갑을 채워놨다.
특히 잘 때는 라디에이터에 채워 놓아 어젯밤 내내 그가 잠들 때까지 투덜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거 좀 풀어달라고. 내가 개야, 뭐야?”
“죄송합니다. 그건 좀.”
한바탕 노인의 욕설이 쏟아졌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 안 되는 찰진 욕에 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할 거지? 여유로워 보이는데.”
“정보 파악 중입니다. 일단 최대한 넓은 지역에 사람들을 퍼트려서 혹시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더 자세한 정보를 곧 가져다 드리지요.”
“알겠어. 새끼들한테 전해 줘.”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꼬박 40시간이 지난 후, 이번엔 혼자서 다시 김설화를 찾아갔다.
밀실에 들어가자마자 암모니아 썩는 냄새가 훅 풍겨와 코를 자극했다. 요한의 인상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녀는 요한이 들어오자마자 몸부림치며 발광했다. 요한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천과 입에 물린 재갈을 뺐다.
“짐승도 이렇게는 안 해! 이 개자식아!”
“짐승만도 못한 게 짐승 타령하지 마라. 짐승들이 기분 나빠한다.”
“네가 뭘 안다고-”
“개백정은 안녕한가.”
요한이 그녀의 말을 끊고 던진 한마디에 다시 한번 김설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