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73화 (73/176)

<73화>

“나야 늘 최고지. 근데 이 사람들, 대단하던데? 한 끗 차이였어.”

“수고했어. 전부 포박해.”

그의 말대로 잘 훈련된 집단이었다. 게다가 완전무장에 가까운 무장상태까지. 평범한 괴한들은 아니었다.

요한의 지시에 조원들이 부랴부랴 무장 괴한들의 몸을 묶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미간을 찌푸리며 꿈틀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동 없이 포박을 끝냈다. 사내들은 손이 꽁꽁 묶인 채로 바닥에 무릎 꿇려졌다.

요한이 사내들을 보며 물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야? 여성가족재단 생존자들과 무슨 관계지?”

요한의 질문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요한이 눈짓하자 스위퍼가 그제야 노인을 놓아주었다.

혁이 노인에게 다가가 손을 묶으려 하자 노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조원들이 총기를 들어 노인을 겨냥했다.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말라는 듯.

노인은 쯧쯧 혀를 차고서는 양반다리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애들 앞에서 쪽팔리게. 묶이고 무릎까지 꿇어야겠어? 응? 이 새끼야, 노인 공경도 모르나. 아이고 두야. 머리통이 아직도 얼얼하네.”

노인의 욕설에 조원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요한이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노인은 씩 웃더니 요한이 잡아 온 괴한을 보고선 물었다.

“철구야, 동수는 어딨냐.”

“죽었습니다.”

“애미 시불탱, 세 명이나 갔네. 진짜 똥 밟았잖아.”

“잡담은 거기까지 하지.”

요한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우리 애들 세 명이나 죽었는데, 그냥 여기까지 하자. 애초에 들이닥친 건 너희인데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

노인이 다시 한번 혀를 끌끌 찼다.

입을 열지 않는다면 강제로 벌릴 수밖에. 요한이 나이프에 힘을 주고 한발 다가선 찰나, 노인의 어깨에서 무전이 울렸다.

-할아버지, 요한 씨. 거기 있어요?

정미의 목소리에 요한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마 회관으로 들어간 생존자들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이름,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추측한 듯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노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였지.”

요한이 노인의 어깨춤에 있는 무전기를 탁 가로챘다. 그러고선 송신 버튼을 누른 뒤 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잠시의 침묵 뒤, 정미의 답변이 들려왔다.

-역시 그쪽에 계셨군요. 할아버진 무사하신가요?

“무사합니다. 아직은.”

요한이 노인을 힐긋 쳐다보고선 대답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혼자 올 수 있습니까.”

-···조금 오래 걸릴 거예요.

“혼자 오지 않으면 이들을 모두 죽이겠습니다.”

-알겠어요.

노인은 기가 질린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선 요한을 바라봤다.

잠시 후 정미가 건너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마냥 선한 사람처럼 보였던 얼굴에는 다소 독기 아닌 독기가 서려 있었고 왼쪽 이마에도 작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포칼립스를 견딘 흔적이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그럼에도 특유의 분위기만큼은 사라지지 않아 여전히 똑 부러지는 느낌을 풍겼다. 8개월 전, 자신을 잔망스럽게 심문하던 모습이 올올히 떠오른다.

요한이 그녀를 보고선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뵙는데, 반갑다는 말은 할 수 없겠군요. 상황이 상황이라.”

“저는 반가운걸요.”

“그렇습니까.”

정미가 다가오려 하자 하진의 손에서 불쑥 대검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괜찮아.”

“요한 씨는 여전해 보이시네요.”

정미는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로 요한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둘 훑어보며 말했다. 요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무엇이요?”

“요한 씨가 구해주신 이후 주신 그 조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삽니다.”

고루한 안부 인사가 이어지자 한쪽에서 스위퍼가 담배를 뻐끔뻐끔 태우기 시작했다. 스위퍼를 보던 노인이 그에게 ‘나도 불 좀 주라.’라고 요청했고, 스위퍼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라이터를 던졌다.

노인이 라이터를 탁, 붙잡은 뒤 둘이 사이좋게 담배를 태웠다.

“우선 저희를 왜 습격하신 건지 물어도 될까요?”

“습격하려던 건 아닙니다. 무장한 적들을 보면 우선 제압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저희는 이 주변에서 캠프를 운영하고 있고, 정미 씨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 방송이 악의를 가진 괴한들을 끌어들인다고 판단되어 막으러 온 겁니다. 그런 와중 이곳이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응전한 거고요.”

“함정이라니, 여기는 순수한 의도로 구조 활동을 하는 캠프예요.”

“하지만 무장한 인원들이 수상하게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죠.”

“그건······.”

그때, 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내가 설명하지. 우리는 용병이다.”

“용병?”

“그래. 우리와 미스 김은 거래를 하는 관계야. 우리는 전력을 빌려주지. 선량한 생존자들 말고 너희 같은 개자식들이 들이닥쳤을 때 막아주는 거야.”

“대가는?”

“거 참 혀 짧은 새끼일세. 대가는 쓸모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귀금속이든 식량이든, 무기든 말이지. 심지어 사람도. 참, 미스 김. 이번에 세 명이나 죽었으니 추가금 잊지 마.”

용병이라. 생소한 개념에 요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물자를 받고 전력을 빌려준다라. 얼핏 들으면 상당히 합리적인 거래라고 오해할 수 있었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법과 질서가 사라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거래다. 전력을 빌려준다는 건 상대적으로 전력이 높은 집단이 낮은 집단에 할 수 있는 제안이다.

그리고 대부분 더 높은 전력을 가진 집단은 이런 거래를 하지 않고 힘과 무력으로 상대가 가진 모든 물자를 약탈한다.

종말 세계에서 약육강식은 당연한 순리다. 무력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세계니까.

“다른 거래처도 있습니까?”

“있었지. 지금은 모두 망했지만. 좀비 웨이브를 맞았어. 사람들을 그만 늘려야 한다고 말해도 도통 들어먹질 않더군.”

요한은 그들의 말 중 궁금한 부분이 많았지만, 우선 끝까지 듣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으로 정미가 말을 이었다.

“난리 이후 정말 많은 일을 겪었어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요한 씨는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저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고 싶어서. 최근에는 생존자가 거의 없어서 방송을 시작한 거고요.”

“방송을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한 삼 주쯤······.”

요한이 방송을 들은 건 최근이었지만 방송을 시작한 건 그보다 더 전이었다.

“방송은 중단하세요. 멍청하고 위험한 짓입니다. 그리고 노인분께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다소 공손하게 변한 요한의 말투에 노인이 한결 기분 좋은 얼굴로 되물었다.

“대답하면 애들을 풀어줄 건가?”

“정미 씨의 캠프를 약탈하지 않고 굳이 거래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뭡니까? 두 캠프 간의 무력 차이가 극심할 텐데.”

“거 참. 지 할 말만 하는 새낄세.”

노인은 껄껄 웃었다.

“저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 또한, 거래 일부니까.”

“······.”

“미스 김에게 좀비 웨이브에 대한 정보를 받았지. 그 정보로 우린 살아남았고 대가는 미스 김의 캠프를 위협하지 않는 거였어. 이래 봬도 나는 신용을 목숨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신용을 잃으면 장사를 할 수 없다고.”

요한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고맙다고 한 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일단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단 모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모종의 뒷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요한의 생각 회로가 빠르게 회전했다.

요한의 생각을 끊은 건 노인의 말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고민 중입니다.”

“곱게 갈 길 가자고.”

“저희는 당신 동료를 죽였습니다. 곱게 상황이 종료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료의 복수를 하려고 하겠죠. 저희는 후환을 남기지 않는 주의입니다.”

이미 전부 사살하고 후환을 없애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철두철미하구먼. 어이, 애송이. 우리는 돈 받고 목숨을 파는 사람들이야. 돈 안 되는 복수 따위 하지 않아.”

“죄송하지만,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내가 미스 김한테 한 약속을 지키는 걸 보고도 신뢰가 안 간다고?”

첫 만남 내내 여유를 보이던 노인은 요한의 단호한 말을 듣고서야 조금씩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 티 나지 않는 초조함이었지만, 여유를 부릴 때와 비교하면 기실 차이가 확연했다.

아마 곧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서 포박했다는 부분에서 자신들을 죽일 리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황을 차치하고 보면 기백이나 기세가 보통이 아닌 인물이었다. 아까운 인재이기는 했다.

요한으로선 이 싸움은 일종의 사고였다. 안타깝지만 불가피했던 사고.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정미 일행이 있는 캠프였다. 그녀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노인의 용병들이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는 직접 그의 손으로 그녀의 숨통을 끊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봐. 이 난리 때문에 내 부하들이 몇 명이나 죽었을 것 같나. 자그마치 백 명이야. 백 명이 죽어 나갔다고. 이젠 아들 새끼가 죽어도 무덤덤할 지경인데 내가 지금 뒤지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거 같아? 어차피 이런 세상이야. 당장 뒤져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러니까 큰 의미 두지 말고 괜히 힘 낭비하지 말라고. 죽은 부하들에겐 미안하지만, 이건 임무 중에 일어난 사고야. 그저 상황이 안 좋았을 뿐이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상황이라면 전 제 동료를 죽이고 앞으로도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집단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오해로 인한 정당방위였고, 공격한 상대가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요한이 침묵했다. 노인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우린 싸움에 졌고 순순히 항복했어. 복수 따위 하지 않는다 약속할 테니 대신 내 부하들의 목숨값을 지불해. 사고인 셈 치자고. 합의금은 넉넉하게 챙겨주면 좋고.”

달콤한 제안이다.

그들을 품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자신들의 세력은 한층 단단해지고 커질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요한은 그럴 수 없었다.

안전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게 느끼는 단단한 불신의 옹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회귀 전의 자신이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물러진 걸까. 요한은 보일 듯 말 듯 숨을 내쉬며 노인에게 물었다.

“난리 전에는 무얼 하셨습니까?”

“경찰특공대 EOD 부대라고 들어 봤나? 내가 거기 출신이야. 여기 몇 명은 내 후배들이고. 뭐, 은퇴하고서는 TNT 물품 관련 방산 업체를 운영했지.”

자랑하듯 자신의 이력을 늘어놓는 노인을 보며 요한은 속으로만 안타까운 침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현재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인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사고가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사고다. 없던 일로 하자.

만약 자신의 캠프 세 사람이 죽었다면 노인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 똑같이 말했을 거다.

복수하지 않을 테니 그만두자고. 하지만 자신이라면 그 이후 어떻게든 위협요소를 제거할 거다. 한 번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댄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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