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억울하다면 변론하면 돼.”
“어떤 변론을······.”
“글쎄,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면 거짓말이란 걸 증명할 만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말해주면 되겠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도 요한은 그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눈빛, 호흡, 표정까지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한참 동안을 고민하던 진수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변론했다.
“하지만··· 저는 누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걸요······.”
그다지 설득력 있는 변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진심으로 보였다.
“그녀가 혹시 평소에 너한테 관심이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딱히 친하지도 않았고, 누나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요.”
“너한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별로 원한이라 할 만한 건······ 아! 수색조에 들어올 때 반대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누나도 그중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수색조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라······.
“왜 반대했지?”
“그게······.”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를, 왜?”
“그것까지는 저도 잘······.”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지 말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대화였다. 파크타운 캠프는 요한이 구출 당시, 궤멸 직전의 캠프였다.
캠프 내에는 세 명의 약탈자가 닥치는 대로 생존자들을 핍박하고 있었고, 물자 상황은 열약했다. 아사 직전의 사람들이 물자를 구해오라는 약탈자들의 등 떠밂에 사지로 밀려 나갔다.
다수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배가 부르면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볍씨에 낀 쭉정이고, 양 떼에 낀 염소다.
문제는 신뢰의 여부다. 둘 중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있고 자신은 진실을 가려내야······.
아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진실을 가려낼 필요는 없다. 자신은 재판관도 판사도 아니었다. 생존자 집단의 리더일 뿐. 자신은 그냥 선택만 하면 되는 거였다.
따듯한 캠프에 등을 대고 누워 먹이를 받아먹는 피해자와 전선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용의자 중에 선택하면 되는 문제.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 누나 이 사람, 저 사람 애인이 많은 것 같아요. 전에 쫓겨났던 형도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쉬운 문제였다.
8. 서울 생존 연합 - 1차전
* * *
낯선 곳에서도 여지없이 동이 터 왔다. 요한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옥상에서 경계를 서던 정환이 요한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형, 일찍 일어났네요. 편하게 주무셨어요?”
“응. 수고.”
“별로 못 잔 것 같은 얼굴인데요?”
“캠프 밖에서는 늘 선잠이지 뭐.”
새삼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요한은 말없이 그의 옆에 섰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언젠가부터 생긴 묘한 거리감.
불편한 건 요한이 아니었다. 정환이 그를 어려워하는 느낌.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최근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한 정환이었고, 요한은 그 자리를 마련했다.
“형.”
“응.”
“좀 더 태도를 확실히 밝혀 주면 안 돼요?”
예상했던 타이밍의 예상했던 질문. 정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요한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정환아.”
“네, 형.”
“네 감정에 날 끼워 넣지 마라. 네가 누구의 마음을 얻든 얻지 못하든, 그건 너와 당사자의 문제야.”
“······.”
“나 때문에 뭔가를 주저하거나, 혹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도 나를 원망하지 말란 이야기다.”
고민하는 표정의 정환에게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내 태도는 언제나 확실하고 같아. 수색조는 다 똑같은 내 새끼들이고 그중에서 사수들은 내가 특히 신뢰하는 사람들이지. 그뿐이야.”
로맨스는 없다. 사랑은 사치다. 세리가 싫어서도, 정환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서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전부터 쌓여 온 가치관이자 쉽게 변하지 않을 마음가짐이었다.
“정신 차렸으면 가서 애들 깨워라.”
“네!”
정환의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보며 요한이 쓰게 웃었다.
어린아이들의 치정 싸움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꼭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별개로, 정환의 연애사업은 사실상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것 역시 제 탓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가볍고, 충동적이며 욕망에 충실하다. 지금에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뚜렷해 보이더라도 금세 식고 뜨거워지고를 반복할 거다. 마치, 아서 아론의 흔들다리 효과처럼 말이다.
요한은 개의치 않았다.
모두의 기상이 끝나고, 요한은 짧게 공표했다.
“인원을 둘로 나눠 이동한다. 정환, 정수, 정은. 캠프 무전 닿는 데까지 이동해서 캠프에 상황 공유해주고 캠프 상황 확인해서 이곳에서 대기해. 나머지 인원은 나와 부평구청으로 간다. 질문은 받지 않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요한은 지시를 이어나갔다.
“당신들은 다른 캠프로 보내질 거다. 전부 일어서. 이 사람들 포박 풀어줘.”
이 근처에 수상쩍은 생존자 캠프가 하나 더 있었다. 전 직장 동료인 정미가 있는 캠프.
방송의 속셈이 어떤지는 몰라도 주변에서 위험을 부르는 방송을 해대는 이상,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막든 합류시키든 어쨌든 그 캠프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요한은 이들을 그 확인용 미끼로 쓸 생각이었다. 마침, 남은 생존자들은 전부 여성 생존자들이었다.
만약 정미의 방송이 함정이라면 손대지 않고 껄끄러운 처리를 떠넘길 수 있다. 그 후 그 핑계로 정미의 캠프를 기습하면 그만.
만약 정미의 방송이 진짜 구조가 목적이라면 껄끄러운 생존자들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정미와는 간단한 동맹 정도로 일을 마무리하면 된다. 누군가 앙심을 품어도 정미라는 안전장치가 한 번 필터 역할을 해줄 터다.
그게 요한이 내린 답안이었다.
“원래라면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거다. 새로운 캠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남도록.”
물론, 요한의 사악한 속셈을 알아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환아, 이상한 낌새 있으면 바로 보고하러 와라.”
“예, 형.”
정환 일행은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새로운 캠프 합류자를 데리고 요한과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다.
요한과 수색 조원들은 부평구청 방향으로 향했다. 굴포천에서는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회귀 전에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좀비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어서 가기엔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다수의 짐 덩이를 챙기면서 가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 요한은 가운데에 생존자들을 두고 조원들을 최대한 퍼트린 진형을 유지한 채 전진했다.
최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느낀 점이 있었다. 좀비 웨이브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이동하면 더 많이, 더 멀리서부터 좀비들을 끌어들인다.
최근에 잦은 수색과 경계선 공사를 겪으면서 추측하게 된 사실이다. 예상에 확신을 더해준 것은 옹 상병이었다. 항상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옹 상병은 이렇게 조언했다.
‘원래라면 사람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은 좀비들은 그저 멍하니 자리를 배회하는데 많은 사람이 뭉쳐서 경계선 근처를 돌아다니면 유독 멀리 있는 좀비들이 다가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박재범 의사는 ‘인간 특유의 체향’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내놨다.
변종을 포함한 좀비들은 후각으로 먹잇감을 찾는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이면 모일수록 사람 특유의 체향이 더욱 강하게 발현되는 것 같다고.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형씨.”
요한의 생각은 가까이 다가온 스위퍼의 부름에 깨졌다. 요한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그 여성가족부인가 어딘가로 가는 거지?”
“여성가족재단. 여성가족부라니.”
“아아, 대장 형씨는 역시 세계 최고의 악당이군.”
스위퍼가 요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듯 씩 웃었다. 요한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넌 눈치가 너무 빨라서 별로야.”
멀리서부터 여성가족재단이 보이기 시작하자 요한은 편대를 바꿨다. 우선 생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던 수색 조원들에게 모두 모습을 숨기도록 지시했다. 혹시 모를 함정이나 기습을 방지하기 위한 판단.
그리고 생존자 중 가장 똘똘해 보이는 여성에게 신호용 모형 권총(:신호탄)을 건넸다.
“엄호할 테니, 저쪽 회관 별관에서 대기해. 그러면 구조대가 나올 거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창문 밖으로 이걸 쏴.”
“네······.”
“출발해.”
요한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생존자들이 빠른 걸음으로 회관으로 걸어갔다.
그들 주변으로 좀비들이 모여들자 기겁한 생존자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 중 쇠뇌를 든 조원들이 그들 주변에 접근하는 좀비들을 쓰러트렸다. 무사히 회관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을 확인한 요한이 무전기를 잡았다.
“생존자들 투입 완료. 1조는 나랑 같이 저 옆 회색 건물 수색하고 대기. 2조는 뒤쪽 공원에서 잘 보이는 곳에서 대기. 3조는 부평구청 수색하고 대기.”
만약 그 라디오 방송이 함정이라면 여성회관 내부와 회관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건물에 매복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런 경우엔 바깥부터 정리해야 포위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최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항상 대부분의 일은 최악의 경우로 닥쳐왔다.
하지만 캠프가 설립되고 제법 오랫동안 백종수와의 전투, 변종 다윗과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큰 위기 없이 매끄럽게 잘 넘겨 왔다. 긴장감만을 남기고 걱정은 내보냈다.
회관의 바로 옆 건물의 유리문이 천천히 열렸다. 종합사무실 상가 건물로 보이는 건물 내부에는 좀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사용해 왔던 건물이라는 의미다.
요한은 세포 하나하나까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건물을 수색했다. 누군가가 불을 피운 흔적, 최근까지 사용한 듯한 침구와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요한이 검지와 소지를 들어 보였다. 전투를 예고하는 수신호다. 요한을 따라온 세 사람이 몰아치는 긴장감에 숨을 죽였다.
전투가 처음도 아닌데도 늘 두렵다. 이런 시대에도 누군가가 다치고 누군가가 죽는 것은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기는 싸움만 하고 싶지만, 누구도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늘 싸움은 찾아왔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있었다. 요한이 손등을 들자 세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 비상계단에서 넓은 매장으로 나가는 통로의 끝, 코너에서 요한은 소총을 그러쥐었다.
‘발소리는 하나.’
발소리의 주인이 코너를 돈 순간 요한의 몸이 벼락같이 쏘아졌다.
쐐액! 개머리판이 의문인의 얼굴을 가격했다.
빡! 코뼈가 내려앉을 정도로 큰 타격과 함께 사내의 비명이 들렸다.
“아아악!”
“뭐야! 뭐야?”
사내의 비명이 들리자 매장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두 개. 요한이 황급히 사내를 제압해 뒤쪽의 혁에게 던졌다.
혁은 재빨리 놈의 입에 천 조각을 물리고 손을 포박했다. 그사이 요한이 코너 밖으로 나가 소총을 격발했다.
탕! 탕! 총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요한의 눈에 기둥에 숨어 있던 사내가 자신을 향해 총기를 겨누는 모습이 보여 순식간에 다시 코너 안으로 되돌아왔다. 이어지는 격발음.
무장한 세력이다. 수상쩍은 방송이다 싶더니, 역시 함정이었다. 요한은 빠르게 상황을 전파했다.
“여기는 요한, 회색 건물에서 무장한 세력 발견. 수색 시 주의하고 응전이 어려울 시 보고하고 퇴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