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포칼립스 전에는 동아리, 또는 성직자들의 휴게실로 쓰였을 법한 방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혁이 천천히 철문에 다가가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때 덜컥, 문이 열렸다. 혁이 잽싸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메시아였다.
그는 두 번째 방에서 나와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고 손에 식은땀이 찼다.
혁은 천천히 복도 끝까지 이동해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창문 옆으로 좁은 난간이 보였다. 좁았지만 이동하기엔 충분한 공간.
혁이 난간을 밟고 천천히 이동했다. 까마득한 높이에 현기증이 아찔하게 났다. 발아래 골목에는 좀비 떼가 어느새 가득 모여 있었다.
천천히 첫 번째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첫 번째 창문에 고개를 빠끔히 내밀자 이것저것 잡동사니로 가득 찬 방이 보였다. 특히 눈에 들어온 건 쇠사슬을 두른 야구방망이 같은 각종 무기들, 절대로 교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흔히 연장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두 번째 방에는 방금 선택받은 장년 남성과 중년 여성이 눈이 검은 천으로 가려진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메시아가 들어와 있었는지 누군가 방을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천천히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세 번째 방. 창문 밖으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혁이 창문으로 살짝 시선을 던졌다. 창문 안의 광경을 본 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창문 안쪽에서 세 명의 사내가 한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겁탈하고 있었다.
고통에 찬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 사내는 저항할 수 없는 여인을 무참하게 짓이기고 유린했다. 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박차고 들어가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제 손에 총이 쥐여 있었다면 눈깔이 뒤집혀 난사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칼이라도 있었다면 놈들의 전신을 난도질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나서면 자신뿐만 아니라 조원들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참아야 했다.
참아야······.
그때, 혁이 보고 있던 방 반대 방향의 창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혁이 외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옆방에 잠들어 있던 중년 여성의 몸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건물 아래로 낙하했다.
쿵!
여인의 몸이 순식간에 곤죽이 되고 좀비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이미 피떡이 된 시체를 다시 한번 좀비들이 갈가리 찢어놓는다.
분노에 머리가 핑 돌았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토할 것처럼 욕지기가 올라왔다.
다시 한 사람의 상체가 창문 난간에 걸리고, 혁은 홀린 것처럼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혁이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장년 사내의 몸이 힘없이 추락했다.
열렸던 창문이 닫히고 석상처럼 굳어 있던 혁이 몸을 낮추며 방을 지나쳤다.
왼쪽 첫 번째 방. 그 방에는 조폭들이나 사용할 법한 흉기들이 즐비해 있다. 이미 머릿속은 하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이 미친 짓거리를 막아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첫 번째 방에 도착한 혁이 날카로운 쇠살이 감긴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쾅! 문이 열리고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사내를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사내들은 한 명이 배트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자 사태를 인식했는지 세워 둔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사내의 손이 그의 식칼에 닿기 전에 혁의 방망이가 사내의 손을 먼저 후려쳤다.
‘으아악! 뭐야 이 미친 새끼!’
혁은 곧바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힌 사내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남아있던 한 사내와 대치 상태가 됐다. 사내는 날카로운 과도를 들고 있었으나 혁의 무기에 비해 리치가 짧았다.
‘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소리를 누군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혁이 그를 향해 배트를 황급히 휘두르려는 순간,
퍽! 뒤에서부터 내리쳐진 무언가에 머리가 무거운 충격에 휩싸이고 이내 아찔한 고통으로 변했다.
눈앞이 순식간에 노랗게 돌았다. 다시 한번 머리에 통증이 느껴지고, 의식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칙-
스위퍼가 한쪽 발만 부서진 바위에 올려두고선 고가도로 아래를 바라보며 지포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숨과 함께 탁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정환아, 애들 데리고 옆에 주유소 가서 휘발유 좀 넉넉하게 가져와. 세차장에서 천도 한 장 가져오고.”
“네, 형.”
정환이 도로 아래쪽에서 대답하곤 두 명의 조원들과 함께 주유소를 뒤적거렸다.
스위퍼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왜, 불장난이라도 치게?”
“이런 규모의 좀비 떼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건 기분이 나쁘니까.”
정환이 낑낑거리며 휘발유를 들고 왔다. 요한이 휘발유를 받아서 도로 아래로 뿌리기 시작했다.
멀리까지 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좀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불씨가 되어 불을 키우기엔 충분할 것이다.
요한은 약간의 휘발유만 남기고 최대한 닿는 데까지 뿌렸다. 그런 다음 대검에 천을 꽂아 넣고 남은 휘발유를 적셨다.
“불.”
스위퍼가 지포 라이터를 건넸다. 기름 먹은 천이 금세 불길을 머금었다. 요한이 칼을 휘두르듯 대검을 휘두르자 불붙은 천이 펄럭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불씨는 바닥에 닿자마자 염화지옥을 일으켰다. 기름 먹은 좀비들이 불길에 휩싸이고 꺼억대는 비명을 질러댔다.
고통 따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이었지만, 끔찍한 몰골로 타고 있는 꼴을 보니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길은 금세 번졌다. 시뻘겋게 타오르던 화염은 좀비들을 건너며 도미노처럼 번져 나가 초열지옥을 만들어냈다.
좀처럼 꺼지지 않을 불길과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사그라들 즘이면 대부분 좀비가 잿빛이 되어 있으리라.
“가자.”
“좀비들이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네.”
스위퍼가 손가락을 튕겨 불길 속으로 담배꽁초를 던져넣었다.
정수와 지원의 안내에 따라 목표했던 교회에 도착한 요한 일행은 곧바로 교회 안으로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습격 전에 주변 건물들을 수색한 후 교회를 둘러싸듯이 자리를 잡았다.
혹시 누군가 밖으로 기어 나오면 포획하거나 사살해 다소 수월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놈들이 두 사람을 살려 보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언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그냥 멍청이들이거나.
요한의 기준에서는 둘 중의 하나였다. 요한의 판단은 전자에 가까웠고, 그래서 최대한 신중히 진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긴 기다림에도 해 질 녘이 될 때까지 교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밤을 맞을 수는 없었다. 요한은 무전기를 들어 작전 속행을 지시했다.
그들 손에 무전기가 들어가 있음을 고려한 수색조 전용 채널이 아닌, 새로운 채널.
“옹 상병은 밖에서 저격대기하고 정환, 스위퍼, 하진, 세리, 지원, 정수는 진입한다. 고글 착용한 인원이 앞장서고, 시야가 불투명할 때는 사격하지 마. 나머지 인원은 전원 밖에서 경계하다 지원 요청하면 들어와. 호명된 인원 헤쳐 모여.”
무전을 끄고 요한은 옆에 있는 정환에게 물었다.
“연막탄, 섬광탄 몇 개 챙겼지?”
“연막탄 4개, 섬광탄 1개요.”
“좋아.”
조원들은 마치 닌자처럼 은밀하게 몸을 움직여 요한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요한이 1층 창문 하나를 툭툭 건드렸다. 안에서 잠겨 있다.
요한이 힘껏 총기를 앞으로 당겼다가 개머리판으로 힘껏 창문을 당겨 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져나갔다. 곧바로 창문 안으로 연막탄 하나가 던져진다.
“뭐야?!”
소란을 듣고 한 사람이 달려오는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 요한의 소총이 불을 뿜고, 사내는 금세 쓰러졌다.
“진입해. 다시 말하지만, 시야 확보 안 되면 총 쏘지 마라.”
요한의 지시에 조원들이 줄지어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 * *
촤악!-
혁은 얼굴에 뿌려진 차갑고 축축한 감촉에 아득해졌던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가를 반복한 탓에 시간개념이 희박했다.
이번에 눈을 떴을 땐, 메시아가 눈앞에 서 있었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인상은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선득거렸다.
메시아가 얼굴을 가까이 댔다.
“네 캠프로 사람을 보냈는데, 캠프가 제법 크더군. 깜짝 놀랐다.”
읍, 읍-
혁이 발버둥 쳤다.
설마 캠프에까지 마수를 뻗친 걸까.
정말 그렇다면 죄책감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도저히 죄스러워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메시아가 혁의 입에 물린 재갈을 벗기며 물었다.
“캠프에는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총은 얼마나 있지?”
혁이 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거품 낀 흰색 침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시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침을 닦아 냈다. 그러고선 몇 발자국 떨어져 좀비들을 묶어 둔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구속이 느슨해진 좀비들이 바로 앞에서 이빨을 딱딱거렸다.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캠프에 대한 정보를 아는 대로 말해라. 제일 먼저 얘기한 사람 한 명만 풀어주겠다. 나머진 좀비 밥이 될 것이야.”
“닥쳐, 인간쓰레기 새끼야.”
혁의 말을 들은 메시아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놈은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도 눈빛은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배짱들이 대단한데. 그럼 더 재미난 방법을 써 볼까.”
메시아가 쇠사슬을 당겨 좀비를 뒤로 돌려보낸 후 의자에 묶여 있던 정은의 결박을 풀었다.
“읍, 읍!-”
발버둥 치는 정은의 목을 붙잡고선 놈의 손이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그만해!”
“대답하지 않으면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 자매님을 겁탈할 거다. 몇 번이고 몇 명이고 해주지.”
“이 개 같은 새끼······.”
허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 형제님이네. 메시아가 단검을 꺼내 정은의 옷을 일자로 쭉 잘라냈다. 잘려나간 옷가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 사람이 동시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죽여버릴 거야, 찢어서 좀비 밥으로 줄 테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봐!
메시아는 그저 귀를 후빌 뿐이었다. 놈은 정은을 벽에 박듯이 붙이고 바지 사이에 칼을 집어넣었다.
나이프가 그녀의 바지를 찢어발기려는 찰나,
탕! 탕탕!
의문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요란스러운 소음이 귓가를 때렸다. 놈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메시아가 정은을 다시 결박시키고 밖을 내다봤다. 계단 쪽에서 한 사제가 허겁지겁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뭐야.”
“무장한 침입자들입니다.”
“뭐, 설마······.”
“맞습니다. 저놈들의 일행인 것 같아요.”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