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스위퍼가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분명히 이건 익숙한 목소린데.
어디서 들었더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약 회귀한 이후에 여의도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기억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포칼립스 초기에 만났던 그녀는 제법 또렷하게 요한의 인상에 박혀 있었다.
경성실업 시설경호팀 대리 김정미.
그녀였다.
발발 초기에 만나 함께 부천까지 이동했던 여인.
“살아 있었네.”
“오, 누군지 기억났나 봐?”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야.”
“오······ 그래?”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의외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계산 밖의 일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더 정확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으니 확실히 살 가능성이 크겠다고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가능성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실하지도 않았고, 설령 살아남더라도 만나리라고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구하러 가려고?”
“구하다니?”
요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얼핏 보기에 이 방송을 하는 캠프는 자리를 잡았고,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구조 작업을 하는 안정된 캠프로 보일지 모른다. 실제로도 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저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캠프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이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그들이 장소를 공개하는 것과 서생연이 장소를 공개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서생연이 공개하는 장소는 그들의 본거지도 아닐뿐더러, 그 안에 많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직 저들이 순수하게 구조를 목적으로 하는 방송인지 어떤지는 확실할 수 없지만, 그가 겪은 정미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면 목적 자체는 솔직해 보였다.
생존자들이 있는 곳의 장소, 다른 생존자들을 받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캠프. 더군다나 여성 생존자들만 모여 있는 장소라는 것은 악의를 품은 약탈자들이 듣기에 아주 매력적인 먹잇감이라고 생각될 터였다.
이제까지 잘 버텨오던 저 캠프는 이 방송 하나가 트리거가 되어 위기가 찾아올 거다. 저들이 자초한 위기.
“멍청했어.”
“그래서, 대답은?”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 방송을 들은 사람이 없기를, 그리고 다시는 저런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딱 그 정도인 인연이다.
“신경 쓰지 않는다. 저들이 자초한 일이니.”
“역시 우리 대장 형씨는 매정하다니까.”
스위퍼는 요한의 대답이 흥미롭다는 듯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이걸 봐봐.”
요한이 한참 동안 무언가를 끄적끄적하더니 스위퍼에게 지도 하나를 내밀었다. 지도에는 부천시청에서부터 인천 영종도까지의 최단 거리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영종도? 여기는 왜?”
“자세한 건 묻지 말고. 목적지가 여기라면 이 정도 루트로 가는 게 합리적이겠지?”
스위퍼의 표정이 이채를 띠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그 2차 쉘터구나?”
“아무튼, 눈치는 빨라서.”
“그나저나 완전 외진 곳인 줄 알았더니 영종도라니. 쉘터가 무사할까?”
“그건 걱정하지 마. 웬만해선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이 길. 어떤 것 같아?”
흐음, 스위퍼가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제안한 루트는 부평대로, 경명대로를 따라 대로로 영종대교 근처까지 이동해서 인천공항고속도로를 타고 넘어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차피 차들 서 있는 고속도로는 고속이 아니니까. 무조건 최단 거리로 가는 게 중요해.”
“최단 거리라고는 해도 너무 먼데. 이 인원으로 이동하는 건 무리야. 걸어서 가면 열 시간도 넘게 걸릴걸. 짐 싸 들고 가면 이틀은 꼬박 걸어야 돼.”
“필요하면 도로를 뚫으면서 갈 거야. 당장 급한 게 아니니까 그 전에 미리 뚫어 놔도 되고. 그리고 이 인원 전부가 갈지, 아닐지도 아직 안 정했어. 뭐, 반수 이하가 될 수도 있겠지.”
“와, 진짜 냉정한 인간이네.”
스위퍼는 요한의 요지를 대번에 파악했다. 최근 안정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일으키는 생존자들이 늘어났다.
그는 문제아들은 버리고 갈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였다.
아무리 매정한 사람이라도 함께 지낸 정을 떼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요한의 성격이라면 사람이든 물자든 챙길 만한 건 싹 다 챙겨서 갈 게 분명하니, 낙오되면 그야말로 생존 지옥에 버려지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요한의 비호 아래에 얼마나 기름진 생활을 했는지 깨달으며 죽어가겠지.
‘무서운 인간이라니까.’
더 강하게 그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수색조 전체가 그의 창이자 방패였고, 캠프 내에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단호하되 군림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규칙을 정하고 규칙을 어긴 사람을 판단하고 처벌하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
그리고 때가 되면 요한의 기준에 미달하는 생존자들은 버려진다.
분명 1차 쉘터에 처음 도착했던 날 모든 인원이 다 2차 쉘터에 갈 수는 없을 거라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동기부여를 위한 채찍질이라 생각했다.
오산이다.
그는 정말로 캠프 내에서도 살릴 사람과 버릴 사람을 체에 넣고 거르고 있었다.
요한을 가까이서 지켜본 스위퍼는 그의 두 가지 선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요한의 인간관계에는 경계선이 있었다. 하나는 살릴 사람과 버릴 사람. 그리고 살릴 사람 중에서도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
그 경계선은 요한의 사람이 된 순간 확연하게 느껴진다. 단지 캠프에 있다고 해서 그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턱없는 자만. 그의 마음속 옹벽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높이 쌓여 있었으니까.
스위퍼의 생각에, 요한의 두 번째 선 안에 들려면 최소한 서로 목숨 빚 한 번쯤은 주고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시점은?”
“꼭 필요한 준비물이 덜 준비됐어.”
“꼭 필요한 준비물?”
“일단 의료인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엔지니어도. 그리고 화약취급기능사와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해. 엔지니어는 둘째 치더라도 추가적인 의료인과 화약은 꼭 있어야 해.”
요한의 말을 듣고 난 스위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지? 다이너마이트?”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스위퍼가 마른 입술을 살짝 혓바닥으로 축였다.
다이너마이트라니, 무슨 살벌한 준비물이란 말인가.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지금부터는 모든 수색을 이 루트를 기준으로 한다. 경계선 확장은 더 이상 할 필요 없으니까, 건설기계로 틈틈이 도로를 뚫어. 수색조도 뚫린 도로를 중심으로 수색 진행하고. 도로만 전부 뚫으면 차로 두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거리니까.”
“이 루트는 조원들에게 공개해도 돼?”
“아니, 조장들만 알고 있어. 너랑 혁이면 충분해.”
“라져.”
스위퍼는 지도를 빤히 바라보며 길을 외웠다. 지도를 들고 다니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보고, 외울 뿐이다.
“잠깐, 대장 형씨.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닌데. 이 루트 말이야.”
스위퍼가 흥미롭다는 듯 지도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까 라디오 방송한 장소 근처를 지나가네. 뭐, 알고는 있으라고.”
“상관없어. 우린 우리 갈 길을 간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얻은 최적화된 경로다. 경로 안에는 병원도, 통조림 제조 공장도, 물류센터도, 건설공사, 군부대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변수나 방해가 있어도 전부 뚫고 간다. 변종이든 좀비 웨이브든, 폭력조직이든 전부 박살 낼 준비가 됐다.
당장에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도시에서 뽑아먹을 게 남아있는 이상 최대한 도시에서 생활하며 물자를 모으고,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이동한다.
단, 그 전까지 준비는 차근차근히 해 나간다.
* * *
“수색 1조 오전 순회 시작해요.”
세리가 무전이 울리고 요한을 제외한 수색 1조 5명이 수색조 캠프에서 출발했다.
“잠깐만. 세리야.”
“뭐야, 따라오려고?”
“응.”
“어제 새벽 근무 섰잖아. 굳이 쉬지 않고 왜?”
“운동 겸.”
“별 부지런한 인간을 다 보겠네. 꼭 요한 오빠 같잖아.”
세리는 자신을 따라 나오는 정환을 보며 입꼬리를 내렸다. 뭐, 굳이 자기 시간 빼서 일을 돕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수색조의 업무는 다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하루 2회, 캠프를 순회하는 업무였다.
연합에서 수색조는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그들을 위해 싸우는 창이었으며, 통신망이자, 식량을 물어다 주는 어미 새였다.
오전과 오후 순회 루트와 시간은 늘 일관적이었다. 가장 먼저 보급창고인 마트 캠프를 들러 전날 저녁에 요청받은 대로 물자를 챙긴 후 서준에게 사인받고 다시 캠프를 돌면서 물자를 나눠준다.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체크리스트는 있었지만, 오전 순회의 핵심은 그날그날의 물자 분배였다.
세리는 마트 캠프에 들어서며 주차장 경계를 서고 있는 경계병들에게 살가운 미소와 함께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채훈아, 안녕? 좋은 아침.”
“여, 세리. 날이 갈수록 포동포동해지는데?”
“저게 뒤질라고 진짜-”
세리가 채훈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날리고, 사람들은 주변에서 배꼽을 잡는다. 익숙하고 목가적인 풍경이다.
수색조가 마트 1층으로 들어섰다. 아침 일찍 수색조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이 1층 홀에 모여 있었다.
“여러분, 세리가 왔어요!”
새롭게 들어온 생존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다들 살갑게 그녀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이건 오늘 자 신문. 그리고 지혜야, 편지 왔어.”
세리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최근 지혜가 수색조의 신입과 은밀한 열애 중이라는 건 캠프 내에서 재미난 이슈 거리였다.
재미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저들끼리는 비밀 연애랍시고 하는데, 전 캠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점과 둘 다 숙맥이라 한참이 지나도 뭔가 연애에 진전이 없다는 점.
세리는 기회를 봐서 확 자빠트리라는 세심한 조언과 함께 오늘 자 신문을 게시판 상단에 걸어두었다.
사실 신문이라고 해 봐야 수색조 재호가 개인 취미 삼아 발간하는 교회 주보만도 못한 조악한 종잇조각이었지만, 신문에는 수색조의 성과라던가 바깥세상의 단편적인 정보들이 쓰여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대화하길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여러 캠프의 사건 사고나 열애설 등등까지 쓰이는 유일한 소식통이었기에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
“아저씨. 확인 부탁드려요.”
세리가 내민 배급표를 바탕으로 대차에 물자들을 실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수고해라.”
“네, 아저씨도요-”
대차에 물건을 전부 실은 수색조는 경계선을 따라 이동했다. 골목골목별로 혹시 파손된 경계선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오전 순회 임무의 일부였다.
보통 좀비가 걸려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생존자가 들어와 철조망을 끊고 들어오는 일도 있다. 그렇게 되면 캠프 내에 비상이 걸린다.
경계선을 따라 쭉 훑으며 내려가다 철조망에 좀비 한 마리가 걸린 것이 보였다. 세리가 새총을 이용해 좀비의 머리를 까부쉈다.
다음으로 도착한 캠프는 새롭게 합류한 다섯 번째 캠프, 파크타운이었다. 특히나 새로운 사람들이 많고 캠프 분위기가 우울해 뭔가 쉽게 정붙이기가 쉽지 않은 캠프였다.
파크타운에 도착한 세리가 마트에서처럼 편지와 신문을 전달했다. 그때, 한 여성이 세리에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세리야.”
“아, 언니. 왜요?”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
“부탁이요?”
여인은 여전히 머뭇거리더니 세리에게 귓속말하며 생리대를 추가로 보급해달라고 부탁했다. 세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생활필수품은 기본 보급 사항은 아니지만, 필요시에 요청하면 대부분 제한 없이 지급한다. 분유라든가 생리대라든가, 휴지나 치약 같은 것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것은 막내의 몫이었다. 세리가 인상을 쓰며 막내를 불렀다.
“막내야!”
그때, 여인이 세리의 입을 가로막았다.
“왜요?”
“사실 그게······.”
여인은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세리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들어온 지 고작 일주일 된 수색조 막내가 캠프 생존자에게 자신과 교제를 하면 원하는 물품을 제한 없이 가져와 주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