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63화 (63/176)

<63화>

요한은 얕은 숨을 내쉬며 볼펜으로 첫 번째 안건을 지웠다.

“각 캠프에 공모를 하든가 하세요. 여러분끼리 토론하지 마시고 모든 후보를 다 가지고 오면 제가 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상으로는 이번에 수색조가 양조장에서 가져온 노봉방주라도 드리지요. 꽤 묵혀놓은 것 같더라고요.”

노봉방주라는 말에 아재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기호품은 기본 보급 대상이 아닌 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열심히 참여할 터다.

이런 시답잖은 안건이 삼 주 째 올라오는 건 정말이지 스트레스였다.

“다음은, 수색조 희망자군요. 총 세 명입니까. 수색조 희망 인원들은 언제나처럼 매일 오전 순회할 때 테스트하겠습니다. 스위퍼가 셋 중에 가장 괜찮은 사람으로 한 명 뽑아서 올려.”

“라져.”

“다음······.”

요한은 다음 안건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건은 ‘캠프별 자유 활동 공간을 넓혀주고 캠프 간 이동을 보다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다.

경계선이 생기면서 안쪽으로는 좀비들의 출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몇몇 캠프에서는 반경 5~10m까지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

언제까지고 캠프 안에서만 박혀 있는 건 정신 건강에도 해로웠으니까.

하지만 캠프 간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캠프를 만들고 인원을 찢어 통제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

“이 건은 기각하겠습니다. 재고의 여지가 없네요.”

“하지만 요한 군. 사실상 경계선 안쪽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보이오. 이제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생활해도 되지 않겠소?”

갑수가 요한의 말에 반박했다. 곧바로 요한의 핀잔 아닌 핀잔이 이어졌다.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뼈가 있었다.

“좀비 웨이브에 대한 경고는 잊어버리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이 몰려 있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오.”

“한 번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잃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경계선 안쪽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모르고, 몇 명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재난을 미리 방지할 수 있어요.”

요한이 다소 딱딱해진 표정을 하자, 갑수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을 결국 한마디 보탰다.

“뭔가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 것 같은데. 해 보세요.”

“···그 좀비 웨이브라는 것도 말이오. 몇 명이라는 기준이나 반경 몇 킬로 이내라는 정확한 기준도 모호하지 않소. 애초에 스무 명이라는 기준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고. 요한 군은 그런 사실을 어떤 근거로 알고 있소?”

요한은 애써 태연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아직 좀비 웨이브를 한 번도 겪지 못한 사람이다. 그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리라.

“기준은 정확한 게 아닙니다. 수학 공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제 경험상 스무 명 이하의 캠프에서는 웨이브를 맞이한 적이 없어서 경험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꼭 나타나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소.”

“그러다가 좀비 웨이브가 터지면, 아저씨가 막아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그들의 목숨보다 중요한가요.”

요한의 말에 갑수의 말이 뚝 다물어졌다.

“해당 안건은 여기서 종료합니다. 이후에 같은 안건을 추가로 올리시면 캠프 리더를 교체하겠습니다.”

캠프 리더 교체라는 말에 관리자들이 동시에 몸을 흠칫 떨었다. 특히나 파크타운 리더 마르코의 경우는 그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그가 교체된 캠프 리더의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원했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파크타운의 리더는 다른 생존자였고 이 주 전 캠프 밖으로 추방됐다.

사전 공유 없이 사적으로 캠프 생존자들을 경계선 밖으로 내보내 물자를 빼돌리려다 인근 약탈자들에게 인질로 잡혔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요한의 통제에 강력하게 반발하다 캠프 밖으로 추방됐다. 추방 이후에 요한이 그를 쫓아가 처리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가 제압당하는 과정을 지켜본 마르코로서는 요한을 겁낼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캠프 인원 순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누가 올린 안건입니까?”

“접니다.”

이번에는 안 중위였다.

기분이 점점 곤두박질친다.

캠프의 규칙들은 대부분 생존과 직결되어 있거나, 원활한 캠프 운영을 위해 만들어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캠프 인원의 순환도 그렇다.

한 공간에 매번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반드시 파벌이 생기고, 네것 내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연합이 한 공동체가 아니라 소속감이 없는 여러 개의 연합이 그저 수색조가 주워오는 먹이를 받아먹는 짐 덩어리 네 개가 될 뿐이다.

캠프 생존자들이 낸 안건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안 중위 개인의, 또는 관리자들이 합심한 의견일 터다. 사람이 자주 바뀌면 그만큼 내 사람이라는 개념을 만들기 어렵고 매번 오는 사람들을 다시 가르치기 번거로울 테니까.

배가 많이 부르셨군. 요한은 한 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기각합니다. 다음은, 드디어 안건다운 안건이 나왔군요. 용수 추가 증원 및 용량 증가 요청이군요. 병원 캠프랑 교사 캠프의 용수가 떨어졌습니까?”

“예. 식수는 그럭저럭 보급으로 버틸 수 있는데 생활용수가 바닥을 보입니다.”

“병원 캠프도 마찬가지오.”

“조금만 버티면 굴포천까지 도로를 뚫을 수 있습니다. 급수차로 대량 보급해 드릴 테니 한동안만 아껴 쓰세요.”

다음 안건은 기본 보급창고의 개별화 요청이었다. 요한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마트에 물자를 몰아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1/n으로 나누어 캠프마다 자율적으로 배급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요청 사유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캠프에 물자가 모여 있으면 보급이 공정하게 분배되는지 확인이 어렵고 마트 캠프가 습격당했을 때 문제가 커질 수 있음.’

단순하게 워드만 봤을 때는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그들은 캠프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철저하게 다지기를 바라는 거다.

연합 전체로 봤을 때, 보급 방식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

물자 보급은 철저하게 관리된다. 마트 캠프에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요한이 직접 확인하고 관리하니까.

수색조가 보급품을 추가하면 마트에서 물품을 확인하고 그 수에 맞게 배급표를 만든다.

만들어진 배급표에는 요한이 직접 직인을 찍어 각 캠프 생존자들에게 배급한다. 번거롭지만 매일매일 잔량과 보급량을 체크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방식이었다.

물자는 권력이자 캠프의 수명.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 없었다.

배급표가 주 단위로 분배되고, 매일 해가 지기 전, 캠프를 순회하는 수색조가 캠프마다 배급표를 걷어 오면 그 수에 맞춰 다음 날 아침 순회 때 물자를 공급해주는 방식이었다.

배급표 지급은 물자 관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요한이 직접 했다. 매주 캠프 생존자의 기여도를 확인하고 전투직인지, 비전투직인지. 사수급인지 부사수급인지에 따라 보급의 양을 결정한다. 당연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생길 테고 그 사람들은 캠프의 리더에게 불만을 토로하겠지.

기준은 주관적일지 몰라도 방침은 명료하다.

기술이 없다면 악착같이 훈련해서 수색조에 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쓸모가 없으면 굶어야 한다. 캠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이들이다. 캠프 내에서 알량한 정치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캠프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라고 앉혀 둔 사람들.

개개인을 신뢰하지 못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요한과 개별적으로 있을 때 그들은 요한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지지자였다.

하지만 캠프의 관리자들이 한데 모이면 어느새 제 캠프의 이권을 위한, 혹은 연합 내 묘한 서열 싸움을 해댔다.

빤히 보이는 정치질.

“여러분.”

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초장에 잡아 두어야 했다. 늘 얘기했듯이 여기는 민주사회도 대한민주공화국도 뭣도 아니었다.

“요새 참 살기 편하시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보급은 딱딱 들어오고, 전투도 없고 목숨의 위협도 없고.”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목소리가 튀어 나가자 관리자들의 등골이 써늘해지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한은 편한 삶에 찌들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그들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주지시켰다.

“좋은 말로 할 때 밥그릇 싸움은 그만두세요. 밥그릇 다 엎어버리기 전에.”

그들을 지켜주는 것도, 그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요한이라는 사실을.

* * *

“피곤해 보이네.”

“그러게. 피곤하군.”

요한의 방.

요한은 오늘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고, 스위퍼는 그의 옆에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는다. 요한이 인상을 썼다.

“형씨. 인상 펴. 주름 생겨.”

“속 편해 보여 부럽네.”

요한의 자조 섞인 말에 스위퍼가 만화책을 탁, 덮더니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부에 적을 생기지 않게 하려면 외부의 적을 만들라는 말이 있지.”

“무슨 말이야?”

“뭐, 형씨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야. 참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운영방식이니까. 노련한 정치인이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여기 물은 슬슬 고이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썩기 시작할걸. 안정이 오래되면 욕망이 생기는 법이거든. 옛말에 배부르고 등 따시면 떡을 치고 싶어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딴 옛말이 있다고?”

스위퍼가 요한의 책상 위에 올려진 견과류를 던져 입으로 받아먹은 후 입을 오물거렸다.

“한 번씩 경계선 밖으로 데리고 갔다 와. 애처럼 싸고도는 게 능사는 아니란 말씀이야. 나가서 줘 터지고 오면 말 잘 듣는 개가 될 거라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캠프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안정화가 점점 길어지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수색조들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캠프를 지키는 기술조나 경계조는 점점 더 나태해진다.

하지만 수색조의 역할을 캠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했다. 수색조의 존재 이유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고, 중요한 전문 인력들이 상해서도 안 된다.

요한의 고민이 길어지자 스위퍼가 심심했는지 라디오를 틀었다. 방송이라 해 봤자 사제 주파수를 이용해 몇몇 캠프에서 보내는 늘 똑같은 내용뿐이었지만 그래도 정보 확인 차원에서 꼬박꼬박 라디오를 챙겨 듣곤 했다.

-서울 생존 연합으로 오십시오. 좀비와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운 쉘터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매일 오후 3시에 용산역 고객센터로 오십시오.

역시나 서생연의 방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가장 고정적으로 들리는 건 서생연이 미끼를 모으는 방송이었고, 그다음 자주 들리는 건 일산 덕양구 쉘터에서 생존자를 찾는 방송이었다. 고정적인 방송은 두 곳이 전부였다.

가끔 생존자들이 구조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길어야 사흘이었고. 대부분 어느 순간부터 구조요청이 뚝 끊겼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좀비보다 무서운 게 사람인 시대다.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아예 전신에 새겨 두어도 모자라다.

몇몇 생존자들이 이곳도 방송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요한은 일언반구에 거절했다. 캠프의 위치를 동네방네 소문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게다가 지금 캠프 수용 가능한 인원도 간당간당한 시점이다.

초기에는 저런 방송이 많았다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오, 형씨. 새로운 방송이 추가됐네.”

“어. 그래.”

흥미 없다는 듯 무심한 대답.

“이 근처 캠프네?”

요한이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근처에 생존자 캠프가 있다는 건 체크해야 할 사항이다. 요한이 관심을 보이자 스위퍼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다시 한번 반복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 인천지역 ‘여성’ 생존자들을 찾습니다. 매일 정오 부평구청역 여성가족재단 별관으로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흰색 무언가를 들고 서 계세요. 다시 한번 알립니다. 인천지역 ‘여성’ 생존자들을 찾습니다. 매일 정오 부평구청역 여성가족재단 별관으로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흰색 무언가를 들고 서 계세요.

또박또박하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방송의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요한의 관심을 끈 것은 그녀의 목소리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