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요한의 말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투로 담담하게 얘기했으나 듣는 조원들은 당황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입에서 이 정도로 비관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그럼 넌 어떻게 살아남았지?”
하진의 질문이 폐부를 찔러왔다. 전생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모여든다. 일말의 인간성조차 상실한 채 그저 살아남기 급급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요한은 말을 아꼈다. 그 대신 자신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 선택지를 던졌다.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소수를 희생하고 다수가 도망치는 것. 다른 하나는 전부 다 죽는 위험이 있더라도 싸워보는 것.”
“꼭 누군가가 희생해야 해? 그냥 우리 들어왔던 철조망 그쪽에는 좀비가 없는데 다 같이 빠져나가는 건?”
“어차피 다윗한테 뒤를 잡히면 누군가 희생자가 나오게 되어 있어. 생존자가 우리밖에 없으니 놈들의 추격도 계속될 거고. 이대로 도망쳐서 캠프로 돌아가더라도 웨이브가 캠프를 덮칠 뿐이겠지.”
“음······.”
하진이 침음을 뱉었다.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면 누군가 남아 변종의 시선을 끌고 그사이에 최대한 탄약을 챙겨 돌아가는 게 가장 희생자를 줄이는 길이야. 최소한 삼 분의 일은 남아야겠지.”
그것은 요한의 길이었다. 요한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캠프가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면, 캠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희생양 삼아 미련 없이 떠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남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요한이 살아남은 것은 동료를 버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상당히 오랜 기간.
‘그렇게 맨날 도망만 다니다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게 되면 그다음엔 뭐 할 거냐?’
어째서 이 타이밍에 그때의 말이 떠오른 건지는 모른다. 요한의 머릿속에 한 인물의 음성이 떠올랐다.
여의도 캠프 신노아.
마지막 캠프의 생존자이자 꽤 오랫동안 함께했던 동료. 그리고 결국 전투 중에 좀비가 되어 자신을 덮쳤던 인물.
처절하게 혼자 살아남아 왔던 요한에게 동료 의식을 주고 제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던 친구였다.
만약 그가 아포칼립스 전에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았다면 그를 제일 먼저 찾아갔겠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래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와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라. 그와의 첫 만남 시기와 장소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그러나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다. 당장 살아남아야 기약할 수 있는 미래.
“남아서 미끼 역할로 희생할 사람이 있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누구라도 죽고 싶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 싸워보지.”
“공략법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하지만 다른 수가 없는걸.”
그때, 옹 상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총이 안 먹힌다면 공용화기를 이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부대 내에 뒤져 보면 대전차용 중화기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지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최전방도 아니고 후방 부대야. 얼마나 화력이 좋은 무기가 있을지 몰라도 크게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설령 있다고 해도 공용화기를 다뤄본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위험해질 뿐이야. 게다가 대부분의 공용화기에는 안전 잠금장치가 있어서 간부들이 가진 그 뭐라고 하지, 동그란 전구 끄트머리처럼 생긴 거. 그게 필요해.”
현역들도 몇 주씩 군사교육을 받아 훈련받는 게 공용화기 교육이다. 훈련소부터 예비군훈련까지 주야장천 훈련하는 소총과는 궤가 달랐다.
대전차용 포나 유탄발사기나, 하물며 전차가 있으면 무엇 하는가.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다윗은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어떻게······.”
“인원을 네 개 조로 나눈다. 스위퍼, 동석, 옹 상병, 재희.”
요한의 지명에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정문으로 가서 골리앗이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막아. 골리앗은 변종이지만 조금만 조심하면 상대하기 쉬울 거다. 덩치 크고 힘센 일반 좀비라고 생각해. 일반 좀비들처럼 머리 맞는다고 쓰러지지 않으니까 전신을 난도질해 버려. 그리고 절대로 붙지 마라. 근접전을 할 상황이 오면 그냥 후퇴하고.”
“라져.”
“혁, 지원, 재호, 단우는 여기서 몰려드는 좀비들을 잡아. 나나 스위퍼한테 좀비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쓸어버려. 위험하니까 탄약고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응. 알겠어.”
“세리, 은정, 정수, 넌 이름이···.”
“경욱이요.”
“그래. 너희 넷은 여기서 탄 클립에서 탄약 빼서 보급한다. 탄약 보급 절대로 끊기지 않게 해. 시작해. 바로.”
네 사람은 황급히 탄통 뚜껑을 열어 탄창에 탄약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요한은 유일하게 호명되지 않은 한 사람을 바라봤다.
“하진은 나랑 같이 다윗을 잡으러 간다.”
변종을 상대할 때 많은 수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지킬 것만 늘어나는 셈이니까. 등 뒤를 맡길 한 명의 호위면 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스위퍼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가 없으면 입구의 골리앗들을 상대할 사람이 없다. 자신과 스위퍼는 갈라져야 한다.
스위퍼를 제외하고 순수한 전력으로 가장 상위는 하진.
골리앗들은 스위퍼에게 맡긴다. 스위퍼의 저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녀석이 해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하진은 둘만으로 변종을 상대한다는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연 배우 등극이군.”
“겁나면 스위퍼와 바꿔주지.”
“아니, 바라던 바야. 그러잖아도 저놈의 상판대기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으니까.”
하진이 두 주먹과 목을 우드득 꺾으며 탄약을 챙겼다. 두 사람만 따로 움직인다고 하니 조원들의 표정에 걱정이 역력했다.
“무슨 방법은 생각해두고 가는 거야?”
“확신은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작전은 있어.”
변종 다윗. 전생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지만, 명백하게 얘기하면 그렇다고 진 적도 없는 상대였다.
요한은 다윗과의 첫 조우 때의 경악스러운 능력치를 경험한 뒤로는 늘 놈과의 전투를 피해 왔고, 노아를 만나고 나서 변종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은 이후부터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윗을 만난 적이 없었다.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봐야 했다.
“죽지 마라. 얘들아.”
요한의 그 말을 끝으로 조원들은 탄약고 문을 열 준비를 마쳤다. 인원을 두 줄로 나눠서 앞줄은 앉아쏴 자세를, 뒷줄은 서서쏴 자세를 취했다.
요한은 스위퍼 일행에게 탄통 뚜껑을 건넸다.
“이게 뭐야?”
“뭐긴. 탄통 뚜껑이잖아. 혹시 뭐가 날라오면 이거로라도 막아 봐.”
요한과 하진이 급습하는 사이, 정문으로 향하는 스위퍼 일행에게도 투사체가 날아올 수 있었다. 충격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직접적인 피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리라.
스위퍼가 빈약한 임시방패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와 이건 너무 허접한데.”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요한 일행과 스위퍼 일행이 모두 철통 뚜껑을 하나씩 챙기고 전투를 준비했다.
“연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이 문을 열었다. 동공을 찌르는 날카로운 빛과 함께 죽은 자들의 울음소리가 탄약고 안으로 쏟아졌다.
좁은 입구 사이로 화망이 형성되고, 총포음이 따다다다 울려 퍼졌다. 먹잇감을 해체할 생각에 신나 달려드는 좀비들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전선이 뒤로 점점 밀려났다.
“더 밀어, 더!”
점점 화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졌다. 출구가 확보되자 가장 먼저 요한과 하진이 총기를 내렸다.
요한과 하진은 탄약고를 빠져나와 시계 방향으로 빙글 돌았다. 우선 탄약고 뒤편의 수풀과 나무를 이용해 은폐 엄폐하고 최대한 뒤쪽으로 돌아 다윗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원거리 전투는 가망이 없었다. 지지부진하게 탄약만 낭비하다가 정문이든 어디든 뚫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근접전으로 간다.’
근접전 패턴을 몰라도 저 무거운 쇳덩이를 던져 대는 걸 봐서는 근접전이 약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체격이 왜소한 건 별개의 문제다. 화기도 안 먹히는 마당에 날붙이가 통할 리는 없고.
하나 결국, 놈도 한낱 좀비다. 사람을 먹는다는 건 소화기관이 있다는 거다. 설마 위장 소장 대장까지 철판이 깔려있지는 않을 테니까.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만든다면, 어쩌면 저 흉물스러운 낯짝도 일그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전의 문제는, 저놈을 어떻게 떨어트리느냐부터 있었다.
* * *
스위퍼 일행도 요한이 나간 후 지원 사격을 십여 분간 지속하다가 총기를 내리고 정문으로 향했다.
“형님, 따라붙는데 말입니다?”
한 뭉텅이의 좀비 무리가 스위퍼 일행 쪽으로 방향을 틀자 옹 상병이 앞서가던 스위퍼를 불렀다. 스위퍼가 뒤를 돌아보니, 그의 말대로 제법 많은 좀비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가왔다.
스위퍼는 고민했다. 챙겨온 탄창은 한 명당 열 개 남짓. 앞으로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탄약은 최대한 아끼는 게 맞았다.
뭐, 어쩌겠어. 때려잡아야지. 스위퍼가 손도끼를 빙그르르 돌리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자, 잡고 갑시다. 형씨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수류탄 하나가 떨어진 좀비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꽝! 하고 터졌다. 그 충격에 수십 마리의 좀비가 피떡이 되고, 절반 이상이 다시 방향을 틀었다.
“와, 나이스 샷.”
혁이라는 친구의 솜씨가 분명했다. 싸울 때도 느꼈지만, 이 캠프에 오고 나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발군의 재능을 보이는 생존자였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형씨들. 총알 아껴!”
스위퍼의 손도끼가 사정없이 좀비들의 두개골을 후벼 팠다. 잘 벼려진 도끼날은 정면이든, 측면이든 상관없이 휘두르는 족족 좀비들의 머리통이 쩍쩍 갈랐다.
동석도 그 특유의 힘으로 호두까기 인형마냥 좀비들의 머리를 까부쉈지만, 스위퍼의 속도와는 기실, 비교조차 안 됐다.
옹 상병과 재희가 각각 두 명의 좀비를 상대하는 사이, 떨어져 나온 한 무리의 좀비들은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와, 진짜 형님 대박이십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가 씩 웃으며 변종이 있던 탑 부분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한과 하진의 존재를 느낀 건지, 그놈의 시선에 이곳은 없었다.
우려했던 상황은 없을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저런 무지막지한 투사체를 매번 피해내기는 부담이었다.
일행은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정문 방향에서 계속해서 좀비들이 한두 마리씩 다가온다.
정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좀비들이 들어올 구멍이 없을 텐데. 만약 정문이 뚫렸다면 개떼처럼 몰려 들어와야 정상일 테고.
스위퍼가 접근하는 좀비의 머리를 지상과 수평으로 후려쳤다. 목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정문에 도착한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당히 혼자 보기 아까운 절경이었다.
“오우, 플라잉 좀비?”
좀비 몇 마리가 계속해서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날았다는 표현보다는 던져졌다는 게 맞았다.
철창으로 보이는 정면에는 뒤에서 밀려드는 좀비에, 끼어 터져나가는 좀비들과 그 좀비 사이에 껴서 옴짝달싹 못 하는 거대한 덩치 좀비가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좀비들의 행렬이다. 요한의 말대로 이곳이 뚫리면 살길이 요원해 보일 정도로. 그나마 높이가 낮은 레일형 자바라 대문이 아니라 미닫이형 철제문이라는 게 천만다행인가.
“저놈이 골리앗이네.”
스위퍼가 가리킨 것은 골리앗보다는 헐크라는 별명이 더 어울리는 이미지의 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