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김상준. 캠프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요한이 그의 뇌를 찔러 편히 눈을 감겨 주었다. 시선을 들어 입구 쪽을 보니, 입구가 단단히 막혀 있다. 그렇다는 건 한 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좀비의 침입은 허용하지 않은 것일 터다.
요한 일행은 좀비들을 정리하며 주차장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요한은 곧바로 생각을 정정했다. 1층은 좀비들에게 다시금 점령되어 있었다. 도로에서 일으킨 소란 때문에 많은 좀비가 빠져나간 뒤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좀비들과 뚫려있는 유리문은 몇 시간 전 이곳의 혼란을 예상케 했다.
“이게······.”
스위퍼와 하진은 요한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요한의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엄호하면서 좀비들 좀 처리해줘.”
요한이 나지막이 요청하고는 큼지막한 철제 파티션 하나를 들고 와 뚫린 유리문을 가로막았다. 사람은 막지 못하더라도 일반 좀비의 이목은 충분히 속여 넘길 수 있으리라.
1층의 좀비를 간단히 정리하고 지하 일 층 비상구로 향했다. 비상구 앞에도 좀비들이 가득했다. 요한은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좀비들을 발로 힘껏 밀어 굴린 뒤, 다가오는 놈들을 한 마리씩 처리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에 자꾸만 몸이 조급해진다.
요한이 천천히 철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잠겨있어 두드려보고 소리쳐 보지만 대답이 없다.
“스위퍼, 도끼 좀.”
“여기.”
스위퍼가 건넨 손도끼를 힘껏 내려쳤다. 소음을 내며 열린 문 건너에는 다수의 좀비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전부 어제까지만 해도 캠프 생존자였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병진을 뜯어먹고 있는 민서의 모습이었다. 요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금실 좋던 부부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간다.
“저기, 형씨······.”
스위퍼가 조심스레 요한을 부르자 하진이 그를 말렸다.
요한은 천천히 다가가 민서와 병진의 관자놀이를 찔렀다. 그다음은 매일 마트 플라스틱 장기판으로 장기를 두던 노인들의 머리를 차례로 찌른 뒤, 사이좋게 좀비가 된 아낙과 세 어린아이의 머리를 찔렀다.
자신에게 조막만 한 칼을 겨누던 소년의 모습과 기저귀를 던지던 아낙의 모습이 교차되어 지나간다.
요한이 시선을 돌렸다.
기문과 성배의 시신이 보였다. 바닥에 뉜 기문의 머리를 찌르려는데 이미 뚫려있다.
‘공돌이 아니고 기문입니다, 형!’
싹싹하고 밝은 녀석이었다. 게다가 자동차 정비공이라는 가치 높은 전문기술까지 가진 생존자였고.
요한의 시선이 옆에 있는 성배에게 향했다.
‘형 진짜, 상남자···. 저 남자한테 설레는 건 처음이에요.’
기문과 단짝 친구였던 녀석. 드리프트가 예술이었는데.
힘 빠진 숨이 새어 나온다. 그새, 그 짧은 새 벌써 정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다져 놓은 캠프가 무너진 아쉬움인지 구분이 어렵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단지 조금은 잊고 있었던 감각, 동료를 잃는 감각이 다시금 올올히 떠오를 뿐이다.
요한의 시선이 도착점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인원수가 상당히 모자란 탓이다. 시체는 열아홉 구였다.
정환, 세리가 없다. 박 노인도, 서준도, 지혜도 없다. 주차장에서 발견한 상준을 빼더라도 대략 열 명 정도가 빈다.
발걸음이 살짝 빨라진다. 요한이 제1 창고 문을 열었다.
“요한 군?”
“어르신.”
철문 너머로는 박 노인을 필두로 한 여덟 명의 생존자가 남아있었다.
요한을 발견한 생존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쩌면 어미 새가 먹잇감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새끼 새 같은 모습, 또는 흡사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사하셨군요.”
요한은 창고에 램프를 켜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창고에서 모여 떨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 전투 쪽이 아닌, 보조 요원들이었다.
“밖의 좀비들은 정리되었으니, 편하게 나오시면 됩니다.”
요한이 꺼진 램프들에 기름을 채워놓고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매장에 낭창낭창한 불빛들이 채워졌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요한의 물음에 박 노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갑자기 밖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고, 모여든 좀비 중 다수가 마트를 습격한 이야기.
인원들이 1층과 주차장을 버리고 지하로 도망쳤으나 성배와 민서가 감염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민서에게 얼굴을 뜯긴 병진이 그 상태로도 감염자들을 전부 제압해준 덕분에 생존자들이 창고로 대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세리와 정환은 어딨습니까?”
“정환이는 주차장에서 매장 안으로 못 들어왔네. 세리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옥상에 있을 거야.”
박 노인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여러분은 번거로우시겠지만, 다시 시체들을 치워 주셔야겠어요. 스위퍼는 날 따라오고, 하진은 이분들을 좀 보호해 드려.”
“그런데 이분들은······?”
박 노인이 스위퍼와 하진을 가리키며 묻자 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새로운 동료입니다.”
요한의 말에 스위퍼와 하진이 저마다의 스타일로 인사했다.
좀비들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 대신, 옥상 앞 철문에 모여 있었다. 철문에는 머리가 뚫린 좀비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그 뒤로도 아직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남아있었다. 요한의 쇠뇌가 화살을 쏘아 보내자 좀비들의 죽은 눈빛이 뒤를 향했다. 요한은 화살을 아낌없이 쏘아냈다.
“근데, 형씨.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캠프에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스위퍼의 물음을 요한이 선수 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 죽은 사람 중에 몇 명 있었지.”
“그것참 유감인걸.”
“사람은 또 보충되겠지. 이곳 사람들은 그래도 중요한 걸 갖고 있어. 특히나 이번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중요한 거라니?”
“운.”
요한이 말하고도 픽 웃었다. 그 말대로 대단히 좋은 운을 가진 캠프였으니까. 스위퍼가 인상을 찡그리는 사이, 요한의 쇠뇌가 마지막 좀비의 뇌를 관통했다.
문을 가로막고 있는 좀비들을 질질 끌어당기고 철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번에도 불안한걸.”
세리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스위퍼의 말에 요한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문을 세게 쾅쾅 두드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세리와 정환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리는 요한을 보자마자 냅다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스위퍼가 호오, 하고 입을 모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요한에게 보였고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세리는 다시 고개를 홱 돌리더니 정환에게 소리쳤다.
“그것 봐 이 자식아, 노크하는 좀비가 어딨어?”
“누가 좀비랬어? 적일지도 모른댔지. 형, 늦었어요.”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너네, 나한테 목숨 한 번씩 빚진 거다.”
요한의 덤덤한 말에 세리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나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테니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대신 항목은 그때 그거 말고 다른 거로 갚아라. 내가 좋아할 만한 거로.”
세리가 ‘잘났어, 정말.’이라고 구시렁거린 후 요한을 지나쳤다.
“계산? 항목? 무슨 말이야?”
“어린애는 몰라도 돼!”
27살 정환은 23살 세리에게 잔뜩 핀잔을 당한 뒤 왠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리는 성큼성큼 출구 쪽을 지나갔다. 하필 화살이 코 쪽에 박혀 숨통이 덜 끊어진 좀비가 누운 채 세리를 향해 이를 드러내자, 그녀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로 좀비의 머리를 서너 번 짓밟았다. 좀비의 머리가 터져 잠잠해질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스위퍼가 휘파람을 불었다.
“형씨 내 말은 정정하지. 여기 아주 잘 빠진 여전사가 있네. 섹시하고, 터프한.”
스위퍼의 말에 요한이 웃음을 참았다. 섹시한 건 모르겠고, 터프하긴 하지.
“정환이는 가기 전에 상황 보고하고 가.”
이어진 정환의 말에는 보고랄 것도 없었다. 주차장에서 낙오된 그는 입구로 들어가는 걸 포기하고 우선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란을 듣고 내려오던 세리와 합류해 캠프로 돌아가려던 그녀를 붙잡아 옥상으로 돌아온 것.
그 와중에도 숨는 장소에 식수를 염두에 둔 판단에 박수를 쳤다. 물탱크가 있으니 물만 마셔도 최소 사흘은 버틸 수 있었으리라.
“좀비물 덕후 다운 판단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한 덕질 인생이었다니까.”
“농담하지 마세요, 형.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그래. 고생했다. 내려가서 밥 먹자.”
정환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내려보냈다.
캠프가 정상화되고 청소가 끝나기까지는 한나절 가까이 걸렸다.
스위퍼와 하진을 인사시키고 그들을 전투조라고 소개하자 일행들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이번 사태로 젊은 사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된 탓이었다.
요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리 전에는 캠프의 인원수가 너무 많았다. 때문에 캠프의 분리는 불가피했지만, 이곳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쉽사리 캠프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을 터다. 이런 식으로라도 인원이 줄어든 건, 조금은 매정한 이야기지만 남은 사람들 처지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하진과 스위퍼는 마트 창고와 하역장에 쌓여 있는 물자들을 보고 요한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이 정도 기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이만한 양의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였다.
마트와 도로가 좀비로 가득 찬 터라 생존자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던 것도 한몫했고, 캠프의 전 리더였던 건의 철저한 관리도 한몫했을 터다.
머릿수도 더 줄어든 지금, 사실상 캠프의 유지는 더 손쉬워졌다.
요한은 남은 13명의 인원을 8명의 전투조와 5명의 기술조로 나눴다. 앞으로도 의학, 요리, 정비, 전기 등등 무언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인원들을 기술조로 빼고 그 외의 모든 인원을 전투조로 투입할 계획이었다. 예외 없이 전투 훈련을 받게끔.
“좀비 한 마리 잡을 수 없는 약한 동료가 근처에 있다는 건 곧 언제든지 좀비가 되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싸울 수 있거나, 싸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캠프에는 불필요하다. 그리고 이곳은 불필요한 사람들을 챙겨갈 만큼 인정 넘치는 세상이 아니었다.
요한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한을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이 죽어버린 탓도 있었지만 이미 벌써 두 번이나 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물자창고의 문을 열고 그들을 어둠에서 꺼내 준 이후부터 그들에게 요한의 말은 흡사 신의 메시지였다.
요한은 전투조와 기술조에서 정환, 박 노인, 서준을 관리자로 지명했다. 사망자를 제외하고 추가로 관리자를 추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위퍼와 하진을 자신과 묶어 수색조라고 이름을 붙였다.
“수색조는 계속해서 거리로 나가 생존자들과 물자를 찾을 겁니다. 우선 H백화점에서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조폭들이 갖고 있던 총기와 무전기, 물자를 확보할 생각이고요. 혹시라도 잔당들이 남아있다면 그것도 처리할 생각입니다.”
“나도 수색조에 넣어줘. 언니의 생사도 확인하고 싶고, 안에만 있는 건 이제 답답해.”
요한의 말 중에 세리가 끼어들었다. 요한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준비 안 된 사람을 밖으로 돌렸다가는 어떤 사달이 일어날지 모른다.
“왜? 끼워줘. 칙칙하게 남자 셋이서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지. 자기, 싸울 줄은 알지?”
스위퍼가 세리의 말을 거들자 세리가 반색했다. 요한의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고작해야 0.2인분 정도 간신히 한다.”
“에게, 너무 평가가 박한걸?”
“사실이니까.”
요한은 단호했으나 이번엔 하진이 거들었다.
여성 생존자를 발견했을 때,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구성보다는 여자가 한 명 껴있는 게 생존자들을 안심시키기 좋을 거라는 이유였다.
두 일행이 모두 그녀의 합류를 지지하자 요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며 그녀를 수색조로 넣었다. 박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하네만, 세리가 끼니까 확실히 분위기가 유해지는구먼.”
“그래, 오빠들 비주얼은 딱 약탈자라고.”
세 남자는 동시에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