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물린 사람이 좀비가 되는 시간은 각양각색. 운 나쁘면 삽시간에 좀비 밭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민서를 곁에 두고 좀비들을 처리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민서를 빈 사무실로 밀어 넣은 병진이 나이프를 손에 꽉 쥐고 감염자들을 응시했다. 해야 한다. 몇 개월을 같이 웃고 떠든 친구들일지라도 지금은 자신이 해야 했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더 지체하면 피해가 너무나 커진다.
“으아아!”
고함을 지르며 병진이 힘껏 성배의 눈을 찔렀다. 푹, 들어갔던 나이프는 곧이어 기문을 향했다. 뒤이어 물린 좀비들도 깨어나기 전에 병진이 숨통을 끊어 놓았다.
“사, 살려줘!”
문제는 아직 감염이 진행되지 않은 사람들. 최초 감염자였던 성배는 벌써 여덟 명이나 희생자를 냈다. 그들은 아직 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성배와 기문에게 물린 이상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다.
“제발!”
간절한 눈빛에 병진의 마음이 흔들렸다.
“일단 물리신 분들은 한곳에 모여 계세요.”
“무슨 소리야! 죽여야 해!”
서준이 병진의 선택을 질책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야 하는 일이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무리였다. 병진이 고개를 저었다.
“좀비가 되면··· 그때······.”
끼이익, 사무실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을 바라본 병진이 제 눈을 의심했다.
“미, 민서야?”
사무실에서 걸어 나온 것은 민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본능적으로 제 남편을 찾듯 가장 가까이 있던 병진을 향해 걸어왔다. 병진이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아··· 아니지? 설마 아니지?”
“병진 군!”
“조심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병진이 그녀에게 걸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두 볼을 감싸 쥔다. 초점이 없다. 그녀의 맑고 깨끗했던 눈동자는 이제 흰자와 붉은 실핏줄뿐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거짓말···.”
민서의 입이 쩍 벌어지고 병진의 시야가 가려졌다.
* * *
“으······.”
요한은 복부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아 시야가 어둡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들고 본능적으로 주변을 뒤적거려 총기를 찾았다. 총기 대신 나이프 손잡이가 잡혔다.
더듬거리며 나이프를 꼭 쥔 요한이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제 근처에 인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흡!”
눈앞에 있던 사내는 요한의 위협적인 손놀림에 고개를 뒤로 확 젖혀 나이프를 피해냈다.
좀비가 아니었군. 요한이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며 시야를 확인했다. 근육질의 실업운동선수. 하진이었다. 점차 시야와 함께 기억도 되돌아왔다.
탈출 직전에 건너편에서 자신을 저격한 상무.
그는 총상을 세 발이나 입고서도 자신을 향해 총을 쏴댔다. 이럴 것 같아서 꼭 깔끔하게 뒤처리하고 싶었는데.
참 희한하게도 적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분명 죽었을 거라고 확신할 만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미안합니다. 좀빈 줄 알고.”
“그 와중에 공격이 정확하기도 하군.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이 날 뻔했어.”
완전히 시야가 돌아온 요한이 하진을 보며 사과했다.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방탄조끼까지 입고 있었을 줄이야.”
요한이 대답 없이 몸을 움직여봤다. 가까이서 맞았으면 꼼짝없이 뼈가 나가거나 내장이 상했을 텐데, 그래도 사격 거리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오래지 않습니다. 한 30분?”
그건 다행이군.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몸을 움직였다. 올라오는 기침에 요한이 콜록거렸다. 침과 함께 피가 섞여 나온다.
“10분··· 정도만 더 쉬었다가 움직이죠. 몸이 말을 듣지 않네요.”
“더 쉬어도 됩니다.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것 같고.”
하진의 말에 요한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생명을 빚졌다. 만일을 위해 부어두었던 보험이 잭팟이 터진 셈이다. 테이블 위에는 총기도, 간이 식량도 그대로 있었다. 요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쯤 되면 선한 게 아니라 그냥 바보 같은 거였다.
인상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다간 큰코다치기 마련이라지만, 그의 행동은 딱 그의 인상과 똑같았다.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 대고 있는 무도인의 기질. 딱 그랬다. 생사를 눈앞에 두고서도 적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외칠 것만 같은 인물.
“두고 가지 않았군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혼자 떠나도 위험하긴 매한가질 거고.”
요한이 그렇습니까, 라고 대답하며 상의를 들어 보였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 중앙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이제 어쩔 셈이요.”
하진의 말에 요한의 고민이 깊어졌다. 밖의 좀비도 문제지만, 상무가 살아있는 한 이대로 다시 비상구 쪽으로 나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물론 그 소란으로 상무도 좀비에 노출됐을 수도 있지만, 한번 당한 이상 위험을 두 번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겠지요. 어느 쪽이든 뚫을 만한 곳이 있을 겁니다.”
“내가 길을 알아.”
요한이 하진을 바라봤다. 하진은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소리는 위에서 났다.
팍, 팍! 천장 환풍구 쇠 덮개가 들썩거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덮개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회전했다.
이어 두 발이 쑥 나타났다. 요한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급하게 총을 집었다.
“나도 같이 좀 하자. 그 탈출.”
낯익은 사내가 환풍구에서 몸을 드러냈다. 사내는 두 손을 천정 구멍을 붙잡은 채 몸을 쭉 폈다가 휙 바닥으로 착지했다.
자신과 함께 잡혀 있던 사내. 스위퍼였다. 스위퍼는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뽐내며 요한에게 악수를 건넸다.
“안녕, 형씨, 우리 구면이지?”
환한 미소는 덤이었다.
“살아있었군.”
요한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스위퍼를 보며 대답했다. 총기는 여전히 손에 꽉 쥔 채였다.
“누가 골드문 개자식들을 작살내 준 덕분에?”
스위퍼는 요한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씩 웃는 입술 사이 새하얀 치아가 반짝거렸다.
이곳에 볼일이 있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과 골드문 조폭들의 싸움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무언가 도움을 준 듯싶었다.
“볼일이 끝났으면 빨리 빠져나가지 그랬어. 여긴 무슨 볼일이지?”
“그러려고 했는데 나가려던 찰나에 좀비들이 떼거리로 모여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뚫을 만한 길을 알아. 안내할 테니 나도 끼워줘.”
“뚫을 만한 길이 어딘지부터 말해.”
“그거야, 끼워 준다고 약속을 해야··· 아니 그 전에, 나한테는 왜 자꾸 반말이야? 저 형씨한테는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반말은 네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요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자 스위퍼가 어, 하며 덧붙인다.
“그랬던가. 아무튼, 지상 출구 말고 지하 이 층으로 가면 지하철로 연결된 작은 통로가 있어. 그나마 뚫을 가능성이 크긴 한데, 그래도 혼자 뚫기엔 좀비가 너무 많아. 총이 필요해.”
스위퍼는 마치 동료가 필요한 게 아니라, 총이 필요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의 말에 요한이 되물었다.
“총기가 필요했으면 기절해 있을 때 가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저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위퍼가 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하는 듯 몸을 비비 꼬자 요한과 하진의 인상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아무리 출중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남자가 저 꼴을 하는 건 여간 보기 흉한 게 아니었다.
“난 형씨가 마음에 들었거든.”
요한이 다시 한번 인상을 팍 썼다.
“그 냉정함. 사격 실력. 크. 너무 멋있지. 응? 골드문 애들을 단신으로 작살 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응?”
그의 한없이 가벼운 모습에 두 사람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마치 못 볼 걸 본 듯한 표정이다. 요한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자 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쏴 버리지 그래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요한이 총기를 들어 그의 몸을 조준하자 스위퍼가 두 손을 들며 펄쩍 뛴다.
“농담이야, 농담! 난 보다시피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하지 않아.”
“‘보다시피’가 아니라 ‘이래 봬도’로 단어 선택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누가 봐도 넌 법이 있어도 안 지킬 것 같이 생겼거든.”
스위퍼가 ‘너무해!’라며 소리쳤지만, 요한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말로는 그렇게 했어도 머릿속으로 계산 회로를 돌린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해서 나쁠 게 없다.
직접 겪은 경험으로 골드문과 한패가 아니라는 사실도 증명됐고, 자신도 그도 궁지에 몰렸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배신하거나 뒤통수를 쳐서 좋을 게 없었다. 무력만 봐도 발목을 잡을 유형은 아니었다. 아니, 큰 도움이 될 거다.
“길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럼 지하까지 내려가는 루트는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니, 대충 위치는 알지. 지금 자리 기준으로 저쪽 끝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돼.”
스위퍼가 가리킨 곳은 ‘ㅁ’자 모양의 건물에서 요한 일행이 있는 위치의 정 반대편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다.
“상무가 살아있으니 정면은 위험해. 좀비들과 싸우는 중에 기습이라도 받으면 속수무책이니까. 그리고, 하진이라고 하셨죠. 편의상 말은 편하게 하겠습니다.”
“그러지. 나도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거든.”
“일단 2층으로 내려간다. 2층은 여기랑 다르게 전부 유리로 된 상가들이라 좀비나 골드문 잔당들 위치 확인도 용이할 테니까. 이 바로 밑으로 내려가서 적의 위치와 좀비들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자.”
요한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멀뚱멀뚱하게 떴다. 요한이 왜? 라는 듯한 표정을 짓자 스위퍼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2층을 내려가려면 어차피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상무는? 그리고 상가 건물에서 좀비들 위치를 눈으로 확인해본다는 건 무슨 말이야?”
“이 아래가 의류판매장인데 백화점 2층을 이렇게 반으로 나눈다고 치면······.”
요한이 손으로 사각형을 그린 뒤 가운데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이쪽은 전부 매장이 유리문이야. 좀비들을 우릴 보고 따라오게 해서 유인해 놓기 딱 좋은 구조이지.”
“내가 머리가 나쁜가, 왜 이렇게 이해가 안 되지? 2층으론 어떻게 내려갈 건데?”
여전히 두 사람은 작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으나 요한은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설마······.”
“다들 암벽등반은 좀 해봤나 모르겠네.”
요한의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이어진 작전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벽을 탈 예정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