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8화 (18/176)

<18화>

“굉장히 위험한 제도구먼.”

“그렇습니까?”

“증거나 증인도 확보하기 힘든 세상이 아닌가. 판단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면 억울한 희생자가 나올 수 있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설득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르신, 일인 지도자가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박 노인은 말이 없었다. 저보다 수 배는 더 살아온 어른에게 설교하는 느낌은 꺼림칙했지만, 최소한 멸망한 세계에서는 자신이 선배였다.

“강한 억제력을 지닌다는 점이지요. 제가 하는 결정은 세 개뿐입니다. 용서, 처형, 추방. 아, 물론 행위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의 자격은 피해자에게 있는 거니까요. 캠프의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용서입니다.”

이 세계에서 추방은 곧 사형선고다. 즉각적인 집행은 아닐지라도 일행으로부터 버려진 일반인이 살아남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요한은 더 물어볼 것이 있으면 하라는 듯 다섯 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자 서준이 손을 들었다.

“그보다 폭력 행위를 금지하는 게 동료에게만이라면, 동료가 아닌 자들에게 행하는 모든 폭력 행위는 허용하겠다는 거냐?”

“동료가 아닌 자에게 하는 위협행위는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위험에 대한 정당방위로 칩니다.”

“그건······.”

“위험요소와 후환을 남기지 않는 주의라서요.”

“그럼 동료가 아닌 사람이라면, 아이를 폭행하거나 노인을 살해하거나 여인을 강간하는 것도 허용하겠다는 거야? 지금 우리 사람들을 폭력조직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뭐야?”

서준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의 공격적인 말투에 다들 침을 삼키고 숨을 죽였다. 요한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의 안색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인조인간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람들이 질색했다.

“그것은 오히려 후환을 남기는 행위입니다만···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서요. 저는 동료가 아닌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죽이게 될 거고요. 저부터가 그런데, 무슨 권한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살인은 되고 폭력은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이중잣대인걸요.”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거나, 일행이 아닌 사람이 나쁜 사람들일 경우만 위협을 가해도 되지 않으냐?”

“제 친구 중 한 명은 어린아이 그룹을 도우려다가 아이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고작 11살짜리 꼬마들이었어요. 나쁜 사람들이라는 잣대는 너무나 모호하고 위험합니다.”

요한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다만 제 기준에서 불필요한 폭력 행위는 백해무익하다고는 봅니다.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폭력이나 강간 같은 거요. 저라면 차라리 조용히 죽일 테니까요. 그편이 후환이 적다고 생각하고요. 무엇이 더 나쁘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판단은 스스로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기본적인 인성도 안 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요한이 작게 덧붙였다. 처벌하지 않는 것과 행위를 유도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요한은 그저 자신에게도 깨끗하지 않은 잣대를 타인에게 가져다 댈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럼 세 사람과 세리 양은······.”

“세리는 정당방위입니다. 세 사람은 처벌 대상이고요.”

“처벌이라면?”

“어르신, 세 사람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죠?”

“우선 부상자는 응급치료, 응급치료라고 할 것도 없네만, 아무튼 격리가 필요할 것 같아 격리조치 해두었네.”

상처가 깊다면 벌써 좀비화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좁은 방 안에 격리된 채 동료가 좀비가 되었다면, 뻔히 예상되는 그림이 그려졌다.

“캠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하죠. 아직 살아있다면요.”

한 번도 좀비와 싸워본 적이 없는 겁쟁이들. 게다가 부상을 입은 한 사람. 추방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다소 잔인한 판결에 서준이 반발했으나 요한은 단호했다.

“여러 번 얘기하지만, 위험요소는 남겨두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 세 사람은 저희의 전투 중에 물자창고를 강제로 털려고 한 전적도 있고요.”

“그건 어떻게 알았나?”

“혁이에게 들었습니다.”

요한의 이야기에 상황을 몰랐던 정환이나 병진이는 인상을 썼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물자를 훔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 점입가경이었다.

“이야기 끝났으면 제 본론을 이야기하죠. 인원을 나누어야 합니다. 한 캠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니?”

“좀비 웨이브가 옵니다. 아마 들으신 분도 있겠지요.”

요한의 말에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좀비 웨이브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되묻던 사람들도 요한의 말이 이어질수록 경악과 걱정으로 얼굴이 망가졌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곳에 모여 있으면 좀비 웨이브가 온다.

좀비 웨이브의 시작은 좀비들의 집단 하울링. 수천 구의 좀비들이 동시에 토해내는 끔찍한 소리가 거리를 온통 메운다.

좀비 웨이브가 시작되면 좀비들은 한 지점으로 들이닥친다. 그때의 좀비는 평소의 좀비와는 다르다. 움직임도 다소 빨라지고-평소의 좀비가 느린 걸음이라면, 웨이브 때의 좀비는 속보 수준에 가깝다.-먹잇감에 대한 집념도 강화된다.

먹잇감에 대한 집념이 강화된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 의미인가 하면 단순히 길이 막혀 있으면 손만 허우적거리던 좀비들이 눈앞의 동료 좀비를 짓밟고, 잡고 올라서서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게 된다.

아무리 강한 벽과 높은 장애물이 있어도 결국엔 어떻게든 뚫고 들어온다.

좀비 웨이브를 끝내는 방법은 딱 두 가지.

웨이브가 발생한 인근의 모든 인류가 사라지거나, 좀비 웨이브를 발생시킨 변종 좀비를 사살하거나.

“벼, 변종 좀비?”

서준의 물음에 요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변종 좀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오금이 저릿저릿하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전투는 요한에게는 다소 쉬웠다. 최대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회귀 전 요한의 전투들을 생각하면 이것들은 어쩌면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요한이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원칙을 떠올렸다.

세 번째 원칙. 붉은 피부의 좀비는 발견 즉시 전속력으로 피하거나, 가능한 경우 가장 먼저 사살한다.

변종 좀비.

정말 드물게 발견되는 좀비 중 붉은 피부를 가진 녀석들이 있다.

요한이 변종 좀비, 혹은 진화 좀비라고 부르는 그것들. 놈들은 일반 좀비와는 상대법이 전혀 달랐다. 그 출현 빈도는 상당히 낮았지만, 놈들이 갖고 오는 결과는 충격적이다.

여섯 번째 캠프 시절, 삼 미터에 달하는 몸집으로 철문을 박살 내며 천 명에 가까운 장병이 생존한 군부대를 농락했던 그 좀비의 기억을 요한은 잊을 수 없다.

974 수륙양용전차부대.

병사들은 강했고, 지휘관은 현명했다.

남아있던 부대 중에서도 가장 아포칼립스에 잘 대처하고 있는 부대였을 터다.

그 부대가 함락되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변종 좀비는 약간의 이지, 지능이 존재하거나, 빠르거나, 강하다. 종류는 다양했다. 요한이 경험해보지 못한 종도 분명 있을 터다. 그리고 그것의 등장은 항상 끔찍한 공포와 결과를 낳는다.

물론 변종 좀비가 무슨 전설에 나오는 네크로멘서처럼 상상도 못 할 전략을 짜서 인류를 무너뜨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이지를 가질 뿐. 어떤 변종 좀비는 먹잇감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면 그곳을 향해 하울링을 하고, 주변의 좀비들이 그에 반응한다. 그게 좀비 웨이브가 발생하는 방식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죠. 저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박 노인이 탄식 어린 숨을 내뱉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학습한 과학이 전면으로 부정당하는 순간. 물론 이 사태가 시작되면서부터 더 이상의 과학은 반쯤은 무의미해졌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수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아직은 대비할 시간이 있을 거예요. 우선 말씀드린 대로 캠프를 분리하는 게 먼접니다.”

변종 좀비는 생존자 규모가 큰 곳부터 타격한다. 그래서 캠프 인원을 20명 이하로 유지하는 게 요한이 정한 생존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잠시 나갔다 올 생각입니다. 백화점 무리의 상황도 볼 겸, 근처 종합병원에 생존자를 찾으러 나갈 생각이고, 겸사겸사 두 번째 캠프로 지낼 만한 곳을 알아보려고요. 부재 기간 제 지도자 대행은.”

사람들이 긴장된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권력은 달콤한 법. 기대감이 떠오르는 걸 숨기지 못한다. 요한은 생각해두었던 인원의 이름을 호명했다.

“정환입니다.”

희비가 엇갈렸다.

요한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했다. 정환의 성장 속도는 빠르진 않았지만 꾸준했고,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았고, 대부분의 전투에 참여했다.

너무 무르지도, 그렇다고 완전한 냉혈안도 아니다. 자신을 친형처럼 믿고 따르는 모습에도 어느 정도 가산점이 있었다.

선 안에 들인 사람은 확실히 밀어준다.

그리고 정환은 특유의 묵묵함으로 어느새 요한의 선 안에 한 발 들어와 있었다.

요한은 누군가 토를 달 새도 없도록 빠르게 회의를 파하고 나서 정환을 데리고 격리되었다는 세 사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은 밖에서 쇠사슬로 잠겨있었다. 방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요한이 잠시간 뒤로 물러서 나이프를 그러쥐었다.

“정환아, 문 열어.”

정환이 자물쇠의 열쇠를 꽂아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세 구의 좀비가 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요한이 가장 먼저 다가온 좀비를 발로 밀쳐낸 후 두 번째 좀비의 관자놀이에 칼을 냅다 꽂았다.

이어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좀비의 팔을 고개를 숙여 피했다. 두 팔이 허공을 가른다.

그대로 좀비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좀비를 내던졌다. 푹, 첫 번째로 발에 치였던 좀비가 눈에 칼을 맞았다. 세 번째 좀비를 마무리한 것은 정환이었다.

어느새 나이프를 꺼낸 정환이 내던져진 좀비 한 구를 마무리했다.

요한은 안도했다. 만약 이들이 감염되지 않았다면, 요한은 자신이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추방은 겉치레일 뿐, 요한은 그들이 떠난 후 추격해서 사살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쫓겨난 사람들은 복수심을 남긴다.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몇 번이고 스스로 되뇌었던 방식이었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환은 묵묵히 시체 세 구를 치웠다.

오늘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이 모두 좀비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죽였다. 정환이 뭔가 가슴에서부터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진다.

“정환아.”

“네, 형.”

“군대 갔다 왔지?”

“저 방산이요.”

요한이 다시 물었다.

“기본군사훈련은 받았을 것 아냐.”

“그렇긴 한데. 왜요?”

하긴 뭐, 군대에서 권총 사격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요한이 쓸데없는 생각을 치우며 36구경 리볼버를 내밀었다. 6발의 총알이 가득 차 있는 총이었다.

“이걸 왜······.”

“묻지 말고 받아. 참고로 총기는 대좀비용이 아니다.”

“그럼요?”

“총기는 대인용이야.”

요한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정환이 총기를 받아들고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바지춤에 찔러넣었다.

“세리는?”

“독방에 격리했어요.”

“뭐야, 피해자를 왜 격리해?”

“어··· 세 명 다 잘라야 한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

요한은 한참의 침묵 후 정환에게 어깨동무했다.

“가자. 세리한테도 인사해야지.”

요한은 세리가 격리되어 있는 방을 두어 번 두드리고 그녀를 꺼내주었다. 의자에 다리를 모으고 있던 그녀가 자신을 보자마자 통통 튀듯 다가왔다.

“세리야.”

요한의 나지막한 부름에 눈치를 보던 세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난 할 일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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