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같은 시각, 세 사람의 그림자가 창고 앞에서 서성거렸다. 누군가 문을 몇 번 달그락거리다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으니 자기들끼리 웅성거린다.
이내 그들 중 한 명이 가져온 것은 휴대용 망치였다. 망치로 문손잡이를 부수려는 듯 보였다.
세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한 명이 망치로 내려치려는 찰나,
“그만둬요.”
그들을 멈춰 세운 목소리의 주인은 혁이였다. 세 사내는 혁을 바라보곤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뭐야, 너까지 상관질이야?”
“넌 가서 네 형이나 보살피지.”
“지금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넌 배알도 없냐?”
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최소한 저치들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혁의 생각 사이로 사내의 말이 끼어들었다.
“사실상 네 형이 저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그 요한인지 뭔지 하는 새끼 때문에, 네 형 저렇게 된 거잖아.”
“그래. 그 자식이 좀비들 우글거리는 데로 너네 끌고 가서 멀쩡히 살 수 있는 사람 저렇게 만들었는데, 넌 뭐가 좋다고 그 사람을 핥고 있어? 자존심도 없는 새끼.”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상실한 듯 그들의 눈에는 이성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문을 열고 식량을 가져간들, 이 마트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돌아온 요한 형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저 당장의 배고픔을 참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실상 혁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였다.
“가세요. 좋은 말로 할 때.”
숫자는 삼 대 일. 사실상 위협이 통할 상황은 아니었음에도 세 명은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쉽사리 물러날 생각은 없었는지 여전한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이어 혁이 허리춤에서 부엌칼을 꺼냈다.
“너······.”
“해볼 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기력 낭비는 하지 말죠. 우리.”
“이익.”
덤빌 용기가 있었으면 저렇게 무기력하게 있지도 않았겠지.
세 사내는 슬금슬금 내뺐다.
그들을 바라보는 혁의 표정이 어둡다. 사내들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린 탓이었다.
* * *
좀비들을 모두 처리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올라왔다. 지옥도처럼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몇몇 사람이 토악질하기 시작했다.
요한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토한 건 자기가 치웁시다.”
“오빤 이 상황에······.”
“왜. 토하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있으면 안 되지. 저 친구 등이나 두드려 줘라.”
세리가 눈을 흘기며 헛구역질하는 여대생의 등을 두들겼다.
“정환아, 기문이랑 애들 몇 명 데려가서 하역장에 엘카랑 롤테이너 가져와.”
“롤테이너요?”
“그 있잖아. 바퀴 달린 짐차. 네모나고 기다란 거. 라면 박스 담는 그거.”
“아아. 대차요? 알겠어요.”
“다른 분들은 카트에 좀비들 실으세요. 옥상에서 태울 거니까. 건드리기 전에 꼭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는 거 잊지 마시고.”
요한이 하나하나 지시하고 있을 때 혁이 세 명의 남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가 밀치듯이 세 남자를 밀어내자 그들이 불퉁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들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이 없을 때 지하에서 한바탕한 듯했다. 요한이 혁에게 다가갔다.
“건이는?”
“똑같아.”
“그래. 유감이네. 너는 좀 어때?”
“모르겠어.”
“멘탈 잘 수습해라. 너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혁은 말이 없었다.
요한은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 돌아섰다. 돌아서려는 찰나 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형.”
요한이 뒤돌아봤다.
“난 형 원망 안 해.”
요한과 혁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요한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원망해도 돼.”
“······.”
“건이가 살아나서 한쪽 팔을 잃은 채 살아가든, 죽어버리든, 그 죄책감은 내 몫이니까.”
“······.”
“엊그제 너랑 같이 나왔다가 죽은 사람들. 누구랬더라, 그래 성현이, 세화. 또 한 명은 이름을 모르겠네. 아무튼, 그들이 눈만 감으면 떠오르지. 악몽처럼. 계속해서 꿈에 나타날 거야. 맞지?”
“그걸 어떻게······.”
“계속해서 늘어날 거다. 그리고 넌 그 누구도 쉽사리 잊지 못할 거야. 그건 오로지 네 몫이야.”
요한이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을 때가 된 다음에 사람들을 이끌어야 된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누군가의 목숨을 걸게 할 권리는 아무도 없다. 설득을 당하든, 협박을 당하든, 자발적으로 따르든 따르기로 결정한 이상 잇따른 결과는 오롯하게 스스로의 탓이다.
다만 죽어 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이든,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든.
자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무덤덤한 수준에 이른 죄책감의 영역.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혁이 멀뚱히 서서 바라봤다.
요한은 개인행동을 자제시키고 마지막 사람의 카트까지 다 채워질 때가 되어서야 이동을 지시했다.
사람들이 줄지어 카트와 롤테이너, 엘카를 끌고 가는 모습은 마치 오픈을 준비하는 마트 직원들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그 운반 도구들에 시체가 쌓여 있고, 고철들을 따라 썩은 핏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어 모습은 다소 기괴했다.
요한의 뒤로 시체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하역장에서 멈췄다. 하역장에는 제법 많은 물자가 쌓여 있었다. 마치 갓 내린 새하얀 눈처럼,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채. 투명한 비닐로 랩핑되어 있는 물자들에선 마치 번쩍거리는 빛이 나는 듯했다.
“못 먹는 거 절반은 버린다고 쳐도 두세 달은 끄떡 없겠는걸.”
요한의 말에 사람들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생겨났다.
그들이 카트에 태운 시체들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좀비들을 물리치고 추가적인 식량과 물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했다.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오, 맥주도 있네. 오늘은 회식인가.”
“맥주 보니까 치킨이 먹고 싶네요. 형 근데 이거, 옮길 생각하니 걱정이······.”
정환의 말에 요한이 랩핑된 박스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 밑에 네모난 판 보이지?”
“네.”
“저게 파레트야. 그리고 저기 있는 주황색 지게차처럼 생긴 게 핸드자키. 저거 집게 부분을 파레트에 꽂은 다음에 들어서 통째로 옮기면 돼. 그보다 문제는 창고가 부족하겠는걸. 가자마자 더 넓은 창고 찾아봐.”
“네, 형.”
요한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로 물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자는 어디 도망 안 가니, 우선 갑시다.”
하역장에서 두 층을 더 올라가니 옥상정원이 나왔다. 중간에 두 마리의 남은 좀비가 다가왔으나, 별 위협은 되지 않았다.
“와아!”
옥상에 올라온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여름의 따뜻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정면으로 받는 햇볕이 눈 부시다.
6개월 만에 지하에서 나온 사람들이 마치 공기 좋은 산속에라도 온 듯 숨을 들이마셔 댔다.
딱히 청량하지는 않을 텐데. 요한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6개월 전에 비하면 나름대로 공기가 깨끗해지긴 했겠지.
사람들이 난간에 달라붙었다. 요한과 함께 치열하게 싸웠던 일행도 지금 순간만큼은 긴장을 풀고 난간에 매달렸다.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건 요한이 유일했다.
회색빛 도시는 황량했다.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불타오르고 있었고, 도로에는 오로지 죽은 자들만 배회하고 있었다.
도시에는 굶주린 죽음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완전히 죽어버린 도시를 방증이라도 하듯 도시는 고요했고 적막했다. 옥상에서 내뱉은 소리가 전 도로에 울려 퍼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람들은 절로 숨을 죽였다.
생존자들은 멸망한 세상의 풍경에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요한의 눈은 한 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S 대학병원.
역시 의사나 간호사가 필요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건이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의료인이 없더라도 전문 의약품만 있어도, 아니 최소한 수혈만이라도 할 수 있어도 도움이 될 터였다.
정환은 끝없이 보이는 죽은 자들의 향연에 혀를 내둘렀다.
“좀비가 이렇게 많다니······.”
“우리가 낮에 하도 난리를 쳐대서, 주변에 있는 좀비들이 다 몰려든 거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흩어질 거야.”
“세상이 완전히 끝나버렸네요.”
“세상은 끝났지. 인류가 끝난 건 아니지만.”
요한의 말에 세리가 반박했다.
“인류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것 같은데?”
“우리처럼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대도시야 뭐, 워낙에 좀비가 많아서 위험하지만 지방이나 외진 곳으로 가면 아직 좀비를 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을걸.”
그때 멀찍이서 연속적으로 총소리가 들렸다. 부평 쪽이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요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보다시피 군부대도 남아있고. 자, 우린 우리 일해야지? 시체들 쌓아.”
요한이 시쳇더미 주변을 정리하고 성배가 들고 온 기름을 시쳇더미에 부었다. 이어 탁, 하고 불을 붙이자 역한 냄새와 함께 불길이 솟아오른다. 세리가 코를 틀어막았다.
“꼭 이렇게 태워야 해?”
“여름 되면 시체 썩어서 전염병 돈다. 태우는 게 제일 깔끔해.”
“하지만 연기가 너무 눈에 띄는걸.”
“눈에 띄지.”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
“뭐, 이 많은 좀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면 캠프에 큰 도움이 되겠지.”
“악의를 가진 사람이면 어쩔 건데?”
요한이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죽여야지.”
세리는 입을 다물었다.
시체 태우는 건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훨씬 활력이 넘쳐 보였다. 무기력하게 버티던 6개월보다 고된 하루가 더 알차게 느껴진다. 사람들 눈에 희망이라는 색이 점점 더 진한 색채를 띠는 듯했다.
“두세 번은 더 움직여야 하니까, 운반조는 서두르고. 정환아 이거 불 봐라. 너무 불이 세면 불씨 옮겨붙으니까 조심히 천천히 태우고.”
“네. 형은 뭐하시게요?”
“잠시 저것 좀 확인하게.”
요한이 가리킨 건 물탱크였다. 더 이상 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은 혹시나 해서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옥상에는 몇 갤런인지 모를 물탱크 두 개가 있었다. 두 개를 차례로 확인해 본 요한이 사람들을 보더니 씩 웃는다.
“이 캠프는 진짜 재수가 좋다야.”
물탱크 하나에 물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