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단호한 말에 병진이 곤란한 듯 대답했다.
“요한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우리 물건들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권리로······.”
“형.”
요한이 주머니에 있던 열쇠 중 하나를 분리해 병진의 가슴팍 주머니에 넣은 후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저 물자들을 가질 권리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리고,”
요한은 그리고, 라는 말 뒤에 덧붙였다.
“난 한번 내 뒤통수를 친 사람들을 신사적으로 대할 생각도 없고.”
요한의 단호한 말에 고민하던 두 사람이 식품매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요한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아무렴 당근 후 채찍보다는, 채찍 후 당근이 효과적인 법이지.
* * *
정환과 병진이 물자들을 여직원 휴게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은 앞으로 ‘물자창고’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 그들을 쳐다봤다. 또 무슨 일을 꾸미냐는 듯한 표정. 두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꿋꿋이 제 할 일을 했다.
한창 낑낑거리며 물자를 옮기고 있을 무렵 요한이 쉬고 있던 세리와 민서를 데리고 왔다. 다섯 명이 옮기기 시작하니 원래 물자들이 쌓여 있던 공간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생필품이나 기호품 같은 건 옮길 필요 없어. 어차피 하역장에서 물품들 더 들어올 거니까. 일단 필수품만 옮겨. 물, 쌀, 라면, 캔에 든 모든 것, 부피 작고 밀도 높은 과자류 같은 거.”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요한의 말 뒤로 높은 테너 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행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캠프의 생존자들이 다수 몰려 있었다. 어린아이와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리에 모인 듯했다.
처음에는 식사를 하려나 보다 싶던 생존자들은 요한의 일행이 모든 물자를 가져갈 기세를 보이자 부랴부랴 사람들을 모아온 것이다.
“물자를 창고로 옮기고 있습니다만.”
“공용으로 쓰는 물자를 사람들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건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오해요? 무슨 오해를.”
“여러분이 물자를 독식한다는 오해요!”
“아.”
요한이 알았다는 듯 한쪽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오해가 아닌데요.”
“뭐!?”
“앞으로 모든 물자는 여기 저희가 관리합니다. 수급하는 물자의 양을 정확하게 확인해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만큼만 배정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 배급이 가능하니 괜히 늦어서 배곯지 않게 주의하세요. 아마 지금보다는 불편하고 배고프겠지만, 결국 모두를 위한 겁니다.”
요한의 말에 캠프 생존자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이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요한에게 삿대질했다.
“당신이 뭔데!”
이어 한 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외부에서 도망쳐 온 사람을 기껏 받아줬더니!”
흉흉한 기세가 점점 커졌다. 예상된 반발이었다. 요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요한의 지시로 짐을 나르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요한의 눈치를 보았다.
“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 안 드렸군요. 앞으로 제 지시에 따르지 않는 분들은 배급이 없을 겁니다. 알아서 구해서 드시던가 하세요.”
“이익······!”
“미친놈!”
“곧 지상층을 정리할 건데,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시체 청소를 거들어야 합니다. 같이 싸워달라곤 안 해요. 그러니 애들을 제외하곤 열외 없습니다.”
사람들의 반발이 점점 극에 달했다. 요한의 발밑으로 뭔가가 날아와 떨어졌다. 사용한 기저귀였다.
“네가 왜,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 그럴 거면 나가!”
일행의 근처로 사내 몇 명이 다가왔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쫓아낼 듯한 기세다.
요한은 실소가 터졌다.
좀비들을 사냥하러 갈 때는 그렇게 겁을 집어삼키더니 같은 인간에게는 이렇게 흉포해질 수 있다니.
몇 마리의 좀비는 그렇게 무서우면서 그 좀비를 때려잡고 다니는 자신은 무섭지 않은가.
요한이 반대쪽 주머니에서 총알이 가득 찬 두 번째 리볼버를 꺼내 다가오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흠칫 멈춘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온다.
“정환아, 병진아. 뭐라고 말을 좀 해 봐라. 이건 정말 아니지 않니?”
“그래 정환아. 나는 폐렴이 있다고.”
“민서야······.”
“나는 허리디스크가······.”
요한에게 협박도 사정도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사람들이 정환과 병진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 어떤 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복귀할 때 견고하게 잠겨있던 문. 그때의 충격적인 기억이 그들 머릿속에 그려진 탓이다.
요한이 그들의 움직임을 보려는 듯 총구를 내렸다. 한참의 대치상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점차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까 총소리 여섯 발 들렸잖아. 총알이 없을 거야.”
오, 그 와중에 총소리까지 세고 있는 사람이 있었네. 1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군.
요한이 생각했다.
“내쫓자. 이렇게 당할 순 없어.”
누군가 내뱉은 말이 트리거가 되어 군중심리가 작용한 듯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알이 없다고 판단하고 살금살금 다가오는 그들의 눈은 마치 핏발이 선 듯 붉게 느껴진다.
요한이 가장 많이 접근한 사내의 발밑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소음이 매장 안을 울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사내는 자신의 바로 발밑에 박힌 총알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당신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여기에 놀러 온 사람도 아니고,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도움을 달라고 도망쳐 온 피난민도 아니야.”
오히려 침략자에 가깝지. 뒷말은 부러 내뱉지 않았다. 대신 요한은 살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까운 총알 낭비하게 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닥치고 통제에 따르세요.”
요한의 마지막 말 이후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됐다.
물자 관리는 병진에게 일임했다. 병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식량과 생수의 수량을 확인했다.
물자배급은 전투 및 관리 인원에게는 정량을, 보조 인원에게는 오 할을 제공하고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인원에게는 배급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하루에 제공되는 물자의 정량은 한 끼를 먹기엔 충분하고 두 끼를 먹기엔 빠듯한 양이었다. 가령, 라면 한 봉지에 통조림 한 개, 비스킷 두 개. 이런 식으로.
물자 정리가 끝나고 첫 번째 배급을 시행했을 때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줄을 섰다.
캠프의 분위기는 살벌하고 사람들의 눈빛은 원수를 보는 듯했으나 요한은 그것도 한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고 사람들에게 채찍질만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통제하고 난 이후 어떻게든 생활이 나아지게 할 생각이다.
우선 사람들이 정면으로 빛을 보고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급했다. 6개월 동안이나 지하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좁은 생활반경과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이 문제였다. 반쯤 삶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안정이 필요했다.
마트 점거를 끝내고 식량을 추가로 확보하게 되면, 캠프가 안정화되면 안정화될수록 ‘학습된 충성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안전과 보급만 보장된다면 쓸개라도 내어 주는 게 지금 시대였으니.
물론, 그 전에 요한은 기폭제를 한 방 터트렸다.
“황서준 씨는 관리 인원입니다. 정량 배급 대상자요.”
“뭐, 뭡니까?”
요한은 함께 싸웠던 일행 외에도 황서준 씨를 추가로 관리 인원으로 선택했다. 일행이 빠져나갔을 때, 캠프의 안전을 위해 주도해서 문단속했다는 이유였다.
어떤 식으로든 캠프를 위해 행동한다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준다. 그게 설령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한 행동이더라도, 결과적으로 캠프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서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자를 받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불만을 터뜨리며 요한의 뒷담화를 하던 그룹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 정환과 병진에게 다가가 도울 일은 없는지 물어봤다.
요한이 티 나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군중을 다루는 것은 어려우나 개인의 마음을 돌리는 건 너무도 쉬웠다.
* * *
첫 배급이 끝나고 몇 명의 사람들이 좀비를 죽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왔다. 참여자가 적을 건 예상했다.
필수품을 전부 회수했지만, 아직 마트 내에는 대체할 만한 주전부리나 먹을거리들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니. 마트의 물자가 떨어질수록 억지로라도 참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리라.
요한은 빠르게 협조하기로 한 그들을 기꺼이 환영하며 그들에게 민서와 병진을 붙여 주었다.
직접 가르쳐도 됐지만, 부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한 의도였다. 두 사람은 용기와 결단력에 비해서 자신감이 부족했다.
두 번이나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에 다른 이들을 가르쳐주면서 생기는 자신감이 더해지면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요한은 총기 두 정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턱에 손을 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건에게 총기를 쥐여 주고 캠프의 실질적인 리더로 만들려고 했는데······.
건이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다가, 깨어난다고 해도 오른손을 잃어 전력이 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사실상 원거리 전투력은 제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난리 통에 전투력이 떨어진 리더는 무용지물.
“하아, 제기랄. 골치 아프게 됐네.”
차선책을 선택해야 했다. 요한은 후보들을 떠올렸다.
박 노인은 나이가 너무 많고, 민서와 병진은 용감하나 우유부단하다. 정환은 행동력은 있지만, 아직 총기를 건네고 등 뒤를 맡길 만큼 믿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혁은 건의 동생이란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믿음이 가지만, 너무 형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정말 인재가 지옥같이 없는 캠프.
맡길 사람이 없다.
세리?
요한은 문득 떠오른 한 사람의 인영에 더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정신을 놨군.”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예측 범위 바깥의 유형이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한참을 고민하던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지금 당장 급한 건도 아니고, 우선은 할 일이 있었다.
걸음을 옮겼다. 비상구 쪽으로 향하는 요한을 보고 정환과 세리가 다가왔다.
“형, 어디 가요?”
“사냥. 좀비 치워야지.”
“이 상황에요? 혼자?”
“놀면 뭐해.”
세리와 정환은 잠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저도 갈게요 형.”
“나도 갈래.”
처음에는 오줌싸니 어쩌니 하더니. 벌써 적응이 됐나.
“마음은 고마운데 마음이면 됐다. 둘 다 쉬어라. 너흰 휴식이 좀 필요해.”
“오빠는? 오빠가 무슨 철인도 아니고. 제일 피곤할 것 같은데.”
“좀비들을 때려잡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 멀리 안 나가고 근처에서 쇠뇌로만 잡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안 좋은 일은 무슨. 그냥, 뭐 나라고 덮어놓고 욕먹는 게 마냥 좋겠냐. 신경 쓰지 마. 갔다 올게.”
“좀 쉬라고! 말 더럽게 안 들어 진짜.”
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아니, 내가 괜찮다는데 왜 이 난리들이야?
“내 말 들으면 좋은 거 하게 해줄게.”
“······.”
씩 웃으며 내던지는 세리의 당돌한 말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건 정환이었다.
요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첫날 오냐오냐 넘어가 줬더니, 아주 성희롱을 일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