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왜인지 요한의 냉소적인 눈빛이 떠올랐다. 요한이 이렇게 얘기하자고 말했을 때는, 솔직히 사람들이 협조해주기를 바랐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 밖에서 6개월 동안 생존한 요한이 싸우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요한··· 응?”
건이 고개를 돌렸으나 요한이 물러서 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어디 갔······.”
그때, 쾅! 발로 차는 소리와 함께 비상구가 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
끄아아······.
끔찍한 외형의 좀비 한 마리가 바닥으로 던져졌다.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뭐야!”
“좀비다!”
그 뒤로 요한이 나타났다. 요한은 좀비의 뒷목을 붙잡아 세웠다.
“바로 시작하려고 준비물을 가져왔는데. 누구부터 시작할 겁니까?”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요한을 벌레 쳐다보듯 쳐다볼 뿐.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눈빛이다.
“뭐야, 한 명도 없나.”
“겁쟁이들.”
그때 세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할게요. 어떻게 하면 돼?”
“네가 고추 달린 것들보다 낫다. 일단 준비를 더 할 테니까 저거 입어.”
요한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옷가지가 한 더미 쌓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하나만 해라. 위에서부터 가죽 장갑, 손목 아대, 전완 보호대, 팔꿈치 아대, 상완 보호대.”
요한이 멍키스패너를 들어 좀비의 턱을 팍, 후려쳤다. 턱이 박살 나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보호대는 토시에 박스를 찢어서 붙이고 박스테이프로 칭칭 감은 거지. 어지간해선 이빨론 못 뚫어. 손끝부터 팔꿈치까지가 전완이야. 팔꿈치부터 어깨까지가 상완. 오른손잡이지?”
“응.”
“왼쪽에 껴라. 전투 중에는 반드시 끼고 있어야 돼. 이번에는 이빨이 없으니 물어뜯을 수 없을 거니 걱정하지 말고.”
보호대를 착용한 세리가 불편하다며 투덜거렸다.
“무슨 깁스 한 것 같네.”
“할 수 있었으면 그것도 좋지. 급하면 그대로 머리를 후려칠 수도 있고.”
“난 별로. 깁스하면 손에서 발 냄새난단 말이야.”
“자세는 항상 이렇게 대각선으로 살짝 비틀고, 왼쪽 팔을 정면을 보게 하는 거야.”
“이렇게?”
세리가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교정해줄까 하나가 그냥 픽 웃고 넘어갔다.
“좋아. 자세는 꼭 정확하지 않아도 돼. 나이프는 손잡이가 위를 향하게 잡아. 요점은 간단해. 보호대를 착용한 팔로 좀비의 접근을 막고······.”
요한이 좀비에게 다가가 상완 보호대로 좀비의 턱 밑을 받치듯이 들어 올렸다. 좀비가 바둥거린다.
“힘에서 밀리지 않게 뒷발은 살짝 뒤로 빼준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면 뒤지는 거니까.”
반듯하게 서 있으면 좀비가 조금만 달라붙어도 무게중심이 넘어갈 수 있다. 좀비와 싸울 땐 항상 상체를 살짝 숙여서 무게중심을 중심보다 앞에 두는 것이 안전하다.
“약점은 머리, 심장. 심장이 칼이 좀 더 잘 들어가지만, 갈비뼈 사이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면 역습당하기 쉽고 완전히 멈출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항상 머리를 노린다. 눈을 찌르던가, 뒷목 경추를 찌르든가 관자놀이를 찌르든가. 정면에서 싸울 때 제일 좋은 건.”
요한이 나이프로 좀비의 눈을 푹 찔렀다. 그리고 발로 차 좀비를 넘어뜨린다.
“역시 눈깔을 파 버리는 게 좋지. 뒤에서 덮칠 땐 머리를 잡아당겨서 좀비 대가리를 위로 향하게 해서 목 아래부터 수직으로 쑤셔 박으면 돼.”
쓰러진 좀비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여기저기서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요한이 세리에게 나이프를 던졌다. 세리가 두 손으로 허둥지둥하며 나이프를 받았다.
“용기 있게 나섰으니 모범을 보이라고. 한 마리 더 잡아 올게.”
비상구를 유유자적하게 올라가는 요한을 보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상구를 통해 1층으로 올라온 요한은 눈으로 매장을 훑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좀비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한눈에 보이는 시체만 수백 구가 넘었다.
좀비들이 모여들고 있다.
웨이브의 전조다.
‘시간이 없어.’
이왕이면 많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끄아아아······.
좀비 한 마리가 다가왔다. 요한은 놈의 손짓을 가볍게 피해낸 뒤 등을 홱 떠밀어 비상구 안으로 처넣었다. 그리고 따라 들어가려던 찰나, 요한의 눈에 경찰복을 입은 좀비가 들어왔다.
‘땡 잡았군.’
요한이 비상구 문을 닫았다.
퍽, 눈앞의 좀비를 쓰러트린 후 세 구의 좀비를 더 쓰러트렸다. 좀비들이 먹잇감을 보고 짖는 하울링에 근처 좀비들이 모여든다.
요한이 나이프를 집어넣고 쇠뇌를 꺼내 들었다.
무릎앉아 자세로 한 손과 턱으로 쇠뇌를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로 경찰복을 뒤졌다.
‘찾았다.’
요한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었다. 요한은 권총을 뒷주머니에 넣고 재킷과 어깨 주머니를 뒤져 여분의 총알이 있는지 확인했다.
쐐액!
화살 한 발이 다가오던 좀비를 격침했다.
요한은 백스탭으로 물러서며 비상구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좀비를 향해 발을 들어 명치를 밀었다.
좀비가 데구르르 굴러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아, 죽으면 안 되는데.’
다행히 좀비는 살아있었다. 요한이 누워 있는 좀비를 발로 밟은 채 권총의 실린더를 확인했다.
38구경 리볼버 M-10.
총알은 6발 중 4발이 남아있다.
요한이 써 버린 탄피를 꺼내고 새 탄알을 끼워 넣었다. 작은 몸체에 비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허벅지 건빵주머니에 권총을 쑤셔 넣었다.
양쪽 허벅지의 무게감이 맞는 느낌이 들었다.
* * *
“좋아. 잘했어.”
요한이 손을 부들부들 떠는 민서를 칭찬했다.
자원하겠다며 나선 것만도 대단한 용기다.
자세도 뒤처리도 형편없었지만, 좀비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만도 충분히 칭찬해줄 만했다.
지원자는 건과 혁을 포함해 총 7명이었다.
최소한의 인원을 10명으로 생각했었지만, 요한은 7명이라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그나마도 못 채울 뻔했으니까.
요한은 그들을 위해 부지런히 좀비들을 잡아다 날랐다.
처음에는 옆에서 지켜봐 줘야 좀비들에게 다가가던 사람들도 어느새 좀비만 던져 주면 먹잇감을 본 사냥꾼처럼 자신감 있게 달려들었다.
좀비들의 턱주가리를 날려 놓은 것도 한몫했고, 요한이 직접 좀비 아가리에 팔을 들이밀어, 보호대만 잘 끼고 있으면 안전하다는 게 몇 번이나 증명된 덕분이었다.
여전히 뒷방에서 관람객처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별난 사람 보듯 바라봤지만, 분명한 호재였다.
요한은 서둘렀다. 건은 사람들이 좀 더 훈련하기를 바랐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좀비 웨이브의 전조가 보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고립은 심각해진다.
“그만. 모여 봐.”
요한이 벽에 걸려있던 시설 안내도를 떼어내 바닥에 펼쳤다. 그 주변으로 7명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전투 중에는 웬만하면 하대를 합니다. 이해해주세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 네 명씩, 두 조로 나누겠습니다. 저랑 세리, 정환, 박 노인께서 일 조.”
박 노인은 지원자가 한참 동안 6명일 때, 노인들을 대표해서 자원한 인물이었다.
죽는 것은 혼자로 족하다며 혹시 자신이 죽더라도 남은 노인들에게는 물자를 배분해 달라고 부탁했다.
요한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 혁, 민서와 병진이 이 조.”
민서와 병진은 하역장 탈환 시도 때도 함께했던 신혼부부였다. 공포심에 잠식되어 있던 그들을 힘겹게 설득한 것은, 건이었다.
그들에게는 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백화점 캠프 생존자들이 잡아간 여인 중, 민서의 여동생이자 병진의 처제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건과 요한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마도 건이 동생을 구하는 데 힘쓰겠다고 약을 판 모양이었다.
사정을 들은 요한은 유감을 표시했다.
“네 명이 각각 사주경계를 한다고 생각해요. 동서남북 한 방향씩 주시합니다. 1조가 먼저, 2조가 그다음. 1조의 선두는 제가 맡습니다. 1조의 후위는 정환이가 맡아. 2조의 선두는 혁이, 후위는 건이가 맡아.”
“내가 제일 후방이네.”
“최전방과 최후방이 원래 가장 위험하지. 아마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제일 먼저 죽는 건 네가 되지 않을까.”
“잔인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아냐?”
건의 말에 요한은 그저 씩 웃었다.
요한의 손가락이 비상구부터 직선으로 움직이다 매장 끄트머리에서 멈췄다.
“더페샾까지는 두 그룹이 같이 움직입니다. 2조는 최대한 벌어지지 않게 따라오고 각자 맡은 방향을 잘 보세요. 좀비가 나타난다고 해서 절대 시선을 돌려선 안 돼요. 한눈팔면 죽는다 생각하고. 무조건 자기가 맡은 방향을 보세요.”
요한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강조했다.
“더페샾에 도착하면 두 갈래로 나뉘어서 각각 문으로 향합니다. 문 봉쇄에 성공하면 다시 포지션을 정비해서 더페샾으로 모여요. 여기서 문 한쪽만 열어놓고 들어오는 좀비 사냥할 거니까. 여기가 전투 장솝니다.”
요한의 두 손가락이 매장 위치에서부터 정문을 향해 갈라졌다.
“정문에 도착하면 후위에 있던 사람이 문을 닫고, 선두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호위. 측면의 두 사람이 네 방향을 다 봐줘야 해요. 이때가 가장 위험할 겁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문 닫는 사람이고. 혁아. 네 형 엄호 확실하게 해라. 형 죽으면 그냥 다 죽는 거니까.”
“응. 알겠어.”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혁을 보며 요한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정환이는 문 닫기 스페셜리스트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아, 형!”
정환이 빽 소리를 질렀다. 웃음소리와 함께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다소 유연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러분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 한 명도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이 정도 작전에서 사망자가 나오게 할 순 없지.
사실상 위험을 감수한다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작전이다. 그럼에도 무리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선 좀비들로부터 마트를 탈환했다는 승리감을 주어 이 사람들을 고양하는 것이 첫 번째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최소화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전사들의 경험치를 쌓게 하는 것. 가장 중요한 의도였다.
“지금 좀비 몇 마리씩 죽여봤지?”
“글쎄, 얼추 세 마리씩은 죽여본 것 같은데.”
“좋아. 바로 출발하자.”
요한의 말에 자원자들의 얼굴이 다시금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오빠, 나 하다가 오줌 쌀 것 같은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이 자식아. 지금 빨리 가서 싸고 와.”
부리나케 화장실을 향하는 세리를 보며 요한은 가죽 장갑의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재킷을 내리는 등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몸에 빈틈이 있는지 점검하고 이어 60cm 나이프 손잡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빙빙 돌렸다.
요한을 멀뚱히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를 따라 했다.
세리가 돌아오자 요한은 들고 온 배낭을 걸쳤다.
“가자. 누워 있는 좀비라고 방심하지 말고 꼭 지나가기 전에 건드려 봐. 방심하다 죽는다.”
요한의 하대는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층 비상구 문 앞에 도착한 그가 배낭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뭐야?”
“수류탄.”
그의 손에 들인 건 강아지 인형이었다.
“아니······.”
“준비됐지? 간다. 셋, 둘, 하나. 파이어 인 더 홀.”
요한은 비상구 문을 열어젖히고 문 앞의 좀비를 발로 차낸 후, 전방에 투척 자세를 요란하게 취한 뒤 인형 두 개를 양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양쪽 끝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