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인영의 움직임에 마치 수상 보트가 물살을 가르듯 좀비들이 무너져내렸다.
사내는 한 차례 전진하는 듯하다가 다시 백스텝으로 뒤로 빠져 좀비들을 앞으로 유인했다.
“뭐 해, 다 죽고 싶어? 내려와 싸워!”
사내는 말하면서도 눈앞의 좀비 하나를 박살 냈다.
또다시 백스탭. 절대로 좀비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형태를 유지하며 빠르게 좀비들을 눕혀나갔다.
순식간에 좀비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건이 정신을 차렸다.
“내려가. 혁이를 구해야 해!”
머뭇거리는 동료들. 건은 겁먹은 동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아직도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좀비들의 머리통을 쑤셨다. 건의 뒤로 짧은 단발의 여인이 따라 내려왔다. 두 남녀에게 짜증을 내던 그 여인이다.
저 위에 있는 것보다 건의 뒤를 쫓는 게 차라리 살 확률이 높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건의 뒤로 바짝 붙었다.
건과 혁이 두세 마리의 좀비를 처리했을 즈음, 의문의 사내가 마지막 좀비를 처리하고 화살을 회수했다.
사내의 행색은 깔끔했다.
조금 전의 전투로 피가 튀긴 했지만, 옷부터 신발까지 마치 소풍 나온 사람처럼 깨끗했다. 분명 떠돌이는 아니었다. 허리춤에는 두 자루의 나이프가 채워져 있었고, 등에는 쇠뇌가 매달려 있었다.
사내가 화살을 모두 회수하고 잽싸게 자신들이 있던 진열장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부터 접근하는 좀비들에게 화살을 쐈다. 화살 한 방에 한 마리씩 픽픽 쓰러졌다. 보통 솜씨가 아닌 듯 침착하고 정확했다.
가까이 있는 좀비들은 모두 처리했지만, 아직도 배회하는 놈들의 수가 많았다. 사내는 곧장 앞장섰다.
“이쪽으로.”
그가 안내한 곳은 1층 수유실이었다.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건이라고 합니다.”
건이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표했다.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던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건은 그 과정에서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사내의 얼굴에 반가움이 드러나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이었는데도.
“요한입니다. 거기 그쪽 분, 옷 벗으세요.”
요한이 혁을 가리켰다.
* * *
요한이 6개월간의 은거 이후 첫 행선지를 마트로 정한 것은 강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트 중동점은 요한이 회귀 전 세 번째로 정착했던 캠프였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캠프의 리더는 강건. 강하고 의협심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좀비 사태가 터지고 나서 마트에 터전을 잡고 첫 번째 좀비 웨이브의 습격을 받기 전까지 캠프를 유지했던 A급 생존자였다.
사실 그는 능력적으로는 A급 생존자였지만, 요한의 기준으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약한 자를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하고 동료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거는 강직한 인물.
과거에도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마지막에도.
요한의 머릿속으로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좀비 웨이브, 비명, 그리고 확산되는 좀비.
[요한!]
물어뜯기는 강건.
[살아, 살아야 해. 너만큼은 살아야 한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좀비들이 강건의 전신에 매달린다.
[후회하지 말고, 살아. 살아 남아주라.]
강건이 지체 없이 요한을 떠민다.
그가 마지막에 덧붙인 ‘친구야’라는 단어는 익숙한 단어임에도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요한은 그를 좋아했다.
제 일신의 안위가 언제나 1순위였던 그와는 달리 늘 주변 인물을 챙기던 그를 좋아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찾아왔다. 첫 번째로는 목숨 빚이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였기 때문. 아무리 떠올려 봐도 가장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 중 첫 번째는 그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 강혁.
요한은 강혁의 몸을 샅샅이 확인했다. 상처가 없다. 천운이었다. 그 많은 좀비 무리에 몇 분간 던져지고도 상처가 없다는 건.
원래대로라면 그는 오늘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아포칼립스 발발 날짜와 더불어 또다시 요한이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요한이 건을 만났을 때, 그는 동생을 잃은 채 살아남고 있었다.
자신이 캠프에 합류하기 4개월 전, 물자가 부족해진 마트 생존자들은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지상 3층 하역장으로 가는 기로를 뚫는 시도를 계획했다.
그 첫 번째 시도에서 혁은 장신 좀비에게 끌려 들어간 후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좀비들을 유인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건은 동료들을 데리고 비상구까지 달리지만, 결국 비상구에 가득한 좀비들에게 남은 동료들을 잃고 혼자 캠프로 복귀한다.
이게 요한이 건을 만났을 때 들었던 오늘의 이야기였다.
다만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하나는 구성원. 요한이 들었던 첫 번째 시도에서 여자 생존자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시기.
애초에 요한은 이렇게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맞춰 등장할 생각이 없었다. 더 넉넉하게 일찍 도착할 계획이었으나, 그들이 하역장으로 나서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원래대로라면 아포칼립스가 터진 뒤 7~8개월 이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또다시 과거가 되풀이되었을 거였다.
“괜찮아?”
건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혁의 여기저기를 매만졌다. 동생이 무사하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안도의 화색이 돈다.
훗날 자신과 함께 1층 좀비들을 정리할 때, 좀비가 된 혁을 죽이면서 피눈물을 흘렸던 건의 모습이 생생했다.
‘내 목숨 빚은 네 동생 목숨으로 갚은 셈 치자.’
마음 한쪽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부채감이 사라진 느낌이다. 홀가분하게.
요한이 감염 여부 확인을 끝내고 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만나서 반갑다. 혁아.”
저도 모르게 반가움이 인사에 묻어났다. 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이어 활짝 웃었다. 역시 듣던 대로 밝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다.
“다른 분들도 혹시 상처가 있다면 지금 말씀하세요.”
요한의 말에 서로를 마주 보던 세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빤한 시선으로 생존자들을 훑던 요한이 의심을 거뒀다. 회수한 화살과 나이프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이곳에서 지냅니까?”
“네. 지하 1층이랑 2층에서 지내요.”
요한의 물음에 건이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줬다고 생각한 덕분인지 요한을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 선명했다. 요한은 픽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아무튼, 강건 이 자식은 이게 문제였다. 물렁물렁한 녀석. 전생에도 이런 문제로 종종 부딪히곤 했다. 정의감 넘치는 건 좋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부분이라 분명히 잡아주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물자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번 질문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물자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요한 씨는, 아 그래요. 또래로 보이니 말은 편하게 할게요. 일행은 있어?”
“아니. 혼자 움직여.”
요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그에게는 미심쩍은 듯했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서 지냈지?”
“집. 쌓아놓은 식량이 많았거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의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물렁한 녀석의 특성상 조금만 함께 지내도 신뢰를 보내올 터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묻지. 물자가 남았는데 왜 나왔지?”
“그걸 어떻게······?”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자가 없었으면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겠지.”
“허.”
“대답은?”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야. 3층 주차장에 하역장이 있어. 근처에 좀비들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만큼 식량이 많을 거라고 생각돼서 길을 뚫는 중이었어.”
그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의 추측은 정확했다.
“확실히. 하역장엔 물이나 라면 박스도 상당하더군.”
“······!”
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기 전에 건물 전체를 둘러봤어. 그런데 좀비가 너무 많아. 2, 3층 주차장, 비상구, 모두 좀비가 꽉 차 있어. 소수 인원이 가서 물자를 옮기는 건 불가능해.”
“그런······.”
“소탕을 돕지.”
“뭣?”
“마트 내의 좀비를 싹 쓸어버리자고. 캠프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면 청소를 돕겠어.”
건과 동료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해.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좀비들은 계속해서 들어올 거야.”
“마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는 총 세 곳. 소탕하기 전에 우선 입구를 막으면 간단하지. 2번 출구 쪽 출입문은 이미 들어오면서 닫아 놨어. 정문이랑 주차장만 막으면 돼.”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캠프 상황을 확인하고 마저 하지.”
요한은 괴물을 바라보는 듯한 익숙한 시선을 견뎌 냈다.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정착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좀비는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작 여기까지 오는 데만 8명이 5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전부 개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좀비들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등 뒤에 걸린 쇠뇌와 두 개의 나이프가 건의 눈에 들어왔다. 건이 침을 꼴깍 삼켰다.
요한은 다섯 명의 남녀 면면을 훑어보다 위화감 어린 시선을 느꼈다. 윤세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 딱 달라붙은 가죽 바지와 재킷, 단발머리에 멀뚱히 뜬 눈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원래는 이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을 인물. 미래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큰 줄기는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지만, 세세한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졌다.
다른 네 사람과 사뭇 다른 시선에 요한이 인상을 썼다.
그녀는 제 시선도 피하지 않은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발적인 시선이다.
요한은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맞받아주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눈을 맞추다가 더 이상 이어지는 질문이 없자 요한이 건을 보며 물었다.
“뭐 해? 안 가?”
* * *
캠프의 인원은 33명이었다. 남녀의 비율은 거의 비슷했다. 그중 전투가 힘겨워 보이는 노인의 수는 10명. 어린아이가 2명.
‘너무 많아.’
건물 자체가 크고 견고해서 좀비 웨이브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끊임없이 몰아닥치는 좀비들 때문에 결국 말라 죽고 말 거다.
의아한 점은 생각보다 식량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라면이나 건조식품, 통조림 등 눈대중만으로도 최소 한두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었다.
식량 관리가 굉장히 훌륭했다. 냉장 음식부터, 냉동 음식, 보존식의 순서로 음식을 소모했다. 라면, 통조림 등 보존 기간이 긴 음식들은 생각보다 여유가 있었다.
급하게 적은 인원으로 물자를 구하러 갈 만큼 급박한 상황은 아닌 거로 보이는데.
요한이 시선을 에스컬레이터 측면 벽에 걸린 내부 시설 안내판으로 옮겼다.
마트는 지하 2층 식품관, 지하 1층 생활용품관, 1층 일렉트로닉 마트와 화장품 등 기타 매장, 2층부터 6층까지 주차장으로 돼 있었다. 그중 하역장은 3층 주차장.
내부 구조가 굉장히 독특했다. 지하 2층과 1층은 연결되어 있었으나, 주차장으로 가려면 우선 비상구나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1층으로 올라간 후, 1층의 정 반대편까지 가서 비상구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결국엔 좀비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1층을 통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가거나 상층으로 올라갈 수 없다.
고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언가로부터 거점을 지키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심지어 거점으로 들어오는 두 통로 중 한 곳은 수많은 가구로 막혀 있다.
요한은 건에게 에스컬레이터를 막아놓은 연유를 물었다.
“처음 마트가 좀비에 습격당했을 때, 지금의 생존자들은 지하 1층 생활용품관에 고립되어 있었어.”
좀비의 확산은 1층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