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5
“사장님, 우유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
“우유? 왜?”
“조금 전에 단체 팀 들어와서 우유 들어간 음료들만 죄다 시켰거든요. 나가서 사 올까요?”
“됐어. 오늘 몇 명 오지도 않을 텐데, 그냥 있는 걸로 버텨 봐. 아니면 손님께 양해 구하고 다른 음료 권해.”
미경은 직원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손을 휘저어 얼른 나가라는 뜻을 전했다. 요즘 그녀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우울했다. 제 모든 사랑을 한 커플에게 다 쏟아서 그런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금껏 덕질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내 최애가 휴식기이면 항상 모아 둔 자료들 다시 보면서 혹여 제가 놓친 것은 없는지 찾는 것이 그녀의 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이 남긴 가장 마지막 사진은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진 에반의 얼굴이라든가 축 늘어진 채 그의 품에 안겨 사고 차에서 다른 차로 옮겨 타는 시우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사고 자체를 믿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따라붙은 파파라치 컷은 그들이 탄 차가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끝났다.
온갖 매체가 달라붙어 한동안 요란하게 그들의 사고 소식을 떠들어 댔지만, 루이스가에서 본격적으로 소송에 나선 이후엔 그들에 관한 어떤 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제발 모두 무사하다는 것만이라도 알려 주길 바랐지만. 그들이 남긴 마지막 공식적인 자료는 곧 태어날 아기 물건을 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전부였다.
휴식기에도 팬들이 궁금해할 것이라며 소소하게 사진을 찍어 올리던 시우였기에, 팬들은 기다리면 그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튼튼하기로 유명한, 그들이 탄 차가 반파될 만큼 큰 사고였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믿고 지낸 것이 몇 달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낙관론자였던 그녀는 비관론자로 돌아서고 있었다.
흔들의자에 앉은 채,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담겼다. 사고 소식 이후 폭주하듯 타오르던 에코결들도 이제는 침묵하고 있었다. 점차 올라오는 글의 수가 줄고, 방문자 수가 줄고. 이대로 에코도 잊힐 것 같았다. 아이돌의 삶이 그랬다. 미친 듯이 불타오르지만, 그 어떤 불보다도 빨리 식을 수 있는 불이었다.
강 위로 두 쌍의 새가 사이좋게 날아가는 것을 보던 미경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차 키를 들고 일어섰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제 속을 들들 볶느니 나가서 우유라도 사 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사장님?”
“우유 사 올게.”
갑작스럽게 나가는 제게 말을 거는 직원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한 미경은 근처 대형 마트로 향했다. 카페 옆에 있는 편의점에도 우유가 있었지만, 그녀에겐 밖으로 나갈 핑계가 필요했다.
가평에 위치한 그녀의 카페에서 대형 마트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운전을 하던 미경은 급히 갓길에 차를 세웠다.
라디오에서 에코를 기다리는 팬이 보낸 사연에 이어 그들이 부른 듀엣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거라고. 무사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말에 가슴에 맺힌 것들이 울컥 솟아올랐다.
지긋지긋한 파파라치, 가십거리만 찾는 언론.
에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만 듣는다면 이런 미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노래가 끝난 후. 겨우 차를 몰아 마트에 도착한 미경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냥 편의점에서 살 것을.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마을의 평일 낮 시간 마트는 제 카페보다도 더 한산했다.
우유 하나 사러 온 주제에 미경은 커다란 카트를 밀고 있었다.
오션이 광고했던 맥주 하나 담고, 시우가 좋아하는 과자도 넣고, 에코가 방송에서 서로 먹겠다고 투덕거리던 사탕도 집어넣었다.
“미련을…… 버려야…….”
유제품 매대로 향하며 자조적으로 읊조리던 미경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커다란 남자의 뒷모습에 숨이 막힌 것이다. 검은색 캡 모자 아래로 금발 머리카락이 보였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체격 좋은 남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에반과 연결 짓던 옛 버릇이 도졌다.
왜 하필 내 앞의 이 남자의 머리카락도 금발이래. 검은색 머리카락이었다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을 텐데. 머리를 흔들고 지나쳐 가려던 미경의 눈에 어색한 것이 들어왔다. 아기 띠를 하고 홀로 장 보러 온 남자가 흔하진 않은데, 어딘가 아기 엄마가 있겠지?
에반이 성격에 아기 띠라니……. 시우 한정 다정남이긴 하다만 그래도 에반이랑 아기 띠는…….
“자두야, 아까 코코가 뭐 먹고 싶다고 했는지 기억나? 네 엄마 말이야.”
옆을 지나치려던 미경의 귀에 이상한 말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거기에 들어 있는 자두, 코코라는 단어가 다시금 그녀를 붙들었다.
“아부바바…….”
남자의 질문에 돌아온 건 옹알이였다.
“요즘 스트레스받는지 엄마가 초콜릿 엄청 먹잖아. 할머니가 좋은 초콜릿 보내 주면 뭐 해. 꼭 이런 거 먹고 싶다고 하는데.”
남자가 몸을 굽혀 영어 알파벳이 있는 초콜릿을 집어 드는 걸 보면서도 미경은 제가 보고 듣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우…… 그 초콜릿 좋아하는데. 팬들이 비싸고 좋다는 수제 초콜릿을 선물해도 자기는 그런 것도 좋지만, 그 초콜릿이 제일 좋다고 했다.
에반이 더 생각나 남자의 곁을 지나가려 하던 미경이 어설프게 멈춰 서는 것과 남자가 초콜릿을 카트에 집어넣는 순간이 딱 들어맞는 바람에 미경은 그들과 나란히 섰다.
설마설마하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미경은 한 손으로 제 입가를 턱, 하니 막았다. 아기 띠에 얌전히 안겨 있는, 인형같이 생긴 너무나도 귀여운 아기의 초록 눈동자와 마주친 탓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눈코입이 어찌나 자기주장이 강한지. 무엇보다 쌍꺼풀 짙은 커다란 눈은 딱 시우 같은데,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는 에반 같았다.
“마마…… 바아…….”
눈이 마주친 아기가 생긋 웃고 제게로 작은 손을 뻗는 것을 지켜보던 미경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향했다.
“어? 홈마님?”
……마트에서 카트 밀며 쇼핑하다가 급사하는 경우의 수가 뭐가 있을까? 내가 죽지 않고서야 가평의 한쪽 구석에 있는, 동네치고는 큰 편이지만 그래도 그리 크지 않은 마트에서 아기 띠를 매고 있는 에반과 그의 품에 꼭 안겨 있는 인형 같은 자두를 볼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지? 죽고 나서야 보고 싶은 장면을 보게 된 것인가?
멈춰 선 채로 제게 말을 거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를 마주한 미경의 눈에서 결국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 코코 어딨어요?”
그랬다. 에반도 자두도 봤는데, 코코가 없었다.
미경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는 자두와 에반을 바라보았다. 언제 한국에 온 거야. 그나저나 자두는 팬들이 합성이나 상상으로 만들어 낸 그 많은 자료를 모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만큼 상상 이상이었다.
“마마…… 아…….”
여전히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작고 귀여운 입술로 옹알거리는 걸 보니 집중할 때면 튀어나오는 시우의 입술을 닮은 것 같은데, 그것보다 우리 시우는 어디 가고 왜 둘이 여기 있는 거예요?
“아…… 코코 집에서 쉬고 있죠.”
최악의 상황. 그러니까 코코가 이 세상에 없는 것까지 떠올리던 미경은 환하게 웃으면서 편하게 대답하는 에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참고 있던 숨을 훅 내뱉었다.
“아니, 아. 한국에……. 그러니까. 아기가…….”
이렇게 말을 더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두뇌가 멈추니 역시 말까지 꼬인 미경은 자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에코의 좋은 점만 골고루 다 닮았다. 자두는 귀여운 토끼 귀가 달린 모자를 쓰고, 핑크색 옷을 입고 꼭 말아 쥔 손을 흔들었다.
거기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혼자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아기 띠 밖으로 쏙 나와 있는 두 다리까지 열심히 흔들어 댔다.
“저도 코코도 자두도 다 괜찮아요. 지금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고, 우리도 조금 적응하고 그런 상황이라 정신없긴 하지만. 아시죠? 우리 코코. 아마 제가 아니라 코코가 또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소식 알려 줄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만 모른 척해 주세요.”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싶어 매일 밤 이불을 쥐어뜯겠지만, 에코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게 행복한 모습에 미경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둘만…….”
겨우 정신을 차린 미경은 주위를 둘러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지만,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코코랑 자두가 같이 낮잠을 자기에 이것저것 하고 봤더니, 자두만 일어났더라고요. 코코 푹 자라고 자두랑 둘이 나왔죠.”
미경은 에반이 카드를 밀며 걷기 시작하자 얼떨결에 같이 카드를 밀며 걸어갔다. 그렇게 둘은 나란히 걸으면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아…… 그게 더 맛있어요?”
“맛있다기보다 그런 건 취향이긴 한데, 시우는 좀 맵고 그런 걸 좋아하니까, 이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럼 그걸로 하죠. 팬분이 추천해 주시는 건데.”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직접 장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난감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 그런데 자두가…….”
성덕의 끝은 어디인가? 최애와 그의 아기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장 보는 것도 믿기 힘든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2세가 제 옷을 잡고 당기면…….
“자두가 분홍색을 좋아해서, 거기다 코코가 분홍색을 자주 입으니 분홍색 옷을 입는 사람에게 친화적이더라고요.”
모자를 쓴 아기 머리에 큰 손을 올리며 쓰다듬고 그 통통한 볼을 긴 손끝으로 톡 튕긴 후, 아기 띠 옆에 있는 주머니에서 쪽쪽이를 꺼내 물리는 에반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는 미경은 두 손을 꾹 쥐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도 알 수 없는 와중에 그대로 증발해 버린 에코 커플 중 에반이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아기 띠 안에서 바동거리는 자두에게 직접 쪽쪽이를 물렸다고 말한다면 모든 이들이 제게 정신과적 치료를 권할 것이 분명했다.
충동적으로 우유를 사러 온 미경은 에반과 나란히 마트를 돌면서 장을 보고 카페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장바구니엔 우유가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