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4
“아. 아아아…… 자두야, 우리 새벽 3시에 일어났었잖아. 우주~ 아니, 레오야. 우리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시우는 우렁찬 레오의 울음소리에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육아였다. 태어나자마자 정밀 검사를 받아야만 했던 레오의 곁엔 항상 에반이 있었다. 검사 결과 건강상 큰 문제는 없었기에 레오는 시우와 같은 병실에서 지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인큐베이터에서 있었고 항상 의사가 대기하고 있어야 했지만, 레오는 잘 버텨 주었다.
사고 충격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레오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던 에반도 며칠 후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레오의 페로몬을 정확히 알아챘다.
바로 앞에서 의사가 베타 판정을 내릴 때도 레오는 자신의 페로몬을 숨기지 않고 흘렸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손가락을 빨며 자고 있었지만, 의사의 말에 뭐가 그리 불만인지 편안하게 잠든 모습과 다르게 페로몬은 불편함을 담고 있었다.
베타 판정에도 에반과 시우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형질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지금은 레오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레오를 혼자 병원에 남겨 둘 수 없어 시우 역시 꽤 긴 시간 병원 생활을 했다. 에반은 자신이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겠다며 집에서 편히 몸조리하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사고 이후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지 않는 에반과 시우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가 떠돌았다.
그 와중에도 루이스가는 파파라치들과의 소송을 시작했고, 많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건강해진 레오가 장거리 비행을 해도 된다는 의사의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미련 없이 한국으로 왔다. 돈의 힘인지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그런지 언론엔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물론 극비리에 입국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육아 전쟁에 돌입한 지 일주일.
시우는 피골이 상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병원에서 같이 지내긴 했지만, 항상 의사나 간호사가 상주하고 있었기에 시우가 나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늘 에반이 함께 한다고 하지만 제가 육아를 도맡고 나서 제대로 자 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더 자. 자두 내가 데리고 갈게.”
본명은 레오 루이스. 태명은 자두. 한국 이름은 우주였지만, 시우와 에반은 여전히 자두로 부르고 있었다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에반의 큰 손이 시우의 등을 몇 번 토닥였고,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레오를 어르며 안아 드는 소리에 시우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내일부터는 자두랑 나랑 잘게.”
한 팔로 안정적으로 레오를 안고, 다른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 위에 손을 겹친 시우는 그 손을 제 볼로 끌어당겼다.
“자두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나 너 없이 혼자 자는 거 싫어.”
“……자두가 울고 있는 아침에 할 말로 부적절한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받아들이는 거야?”
따스한 에반의 손에 볼을 비비던 시우는 그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침대 앞에 서 있는 에반의 앞섶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지금 자두가 우는데, 그런 생각이 드냐!”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보모를 들이자는 거지. 어떻게든 네가 자두를 봐야 한다면 밤에라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자고. 낮 동안은 네가 보면 되잖아.”
레오를 고쳐 안느라 자연스럽게 시우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낸 에반은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커다란 눈에 잔뜩 몰려 있던 잠이 사라지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에반은 몸을 슬쩍 틀었다.
“우리 자두 배 많이 고프지? 어서 가서 아빠랑 맘마도 먹고, 기저귀도 갈고 우리 재미있게 놀자.”
레오가 있어서 말을 안 할 뿐이지 시우는 제가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담은 눈빛으로 쏘아붙이고 있었다. 오메가가 되고, 자신이 오메가인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시우는 페로몬 조절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가지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 덕분에 에반은 눈치껏 행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로몬이 잠시 사라지는 이번 사고 이후 시우는 페로몬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페로몬에 섞인 감정에 많은 도움을 받던 에반은 조금 더 기민하게 행동해야 했고, 지금이 그런 타이밍이었다.
잔뜩 화가 난 제 감정이 혹시나 레오에게 전해져 문제가 생길까 잠시 페로몬을 감춘 것이다.
“야! 이…….”
레오가 놀라지 않게 어르며 밖으로 나가는 에반의 넓은 등에 베개가 연달아 꽂혔지만, 레오를 안고 있는 그의 팔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침실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시우의 말이 끊겼기에 에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봤지? 네 엄마 진짜 무섭다? 그러니까 우리가 눈치껏 잘 살아야 해. 아들,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에반은 언제 울었냐는 듯 품에 안긴 순간부터 방싯방싯 웃고 있는 레오와 시선을 맞추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허공에서 바동거렸다. 아기를 잘 다룬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작은 레오를 만났을 땐 그가 다칠까 함부로 안지도 못했다. 에반은 여전히 작은 레오의 주먹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살짝 흔들었다.
“꺄아…….”
작은 소리와 함께 레오가 웃음을 터트리자 같이 웃던 에반은 슬쩍 침실을 바라보았다.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 사고가 난 날 바로 준비를 시작했기에 한국으로 오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아름다운 강이 내려다보이는 가평의 전원주택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처음부터 셋이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시우 덕분에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시우가 누군가의 도움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영국에서 집을 관리해 주던 사람들 중 한국에서도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을 차출해 두었기에 그들을 바로 불러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이 많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예민한 시우가 며칠 새 살이 빠진 것을 보니 마냥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자두 이제 밥을 먹어 볼까요?”
부엌으로 들어간 에반은 부엌 한쪽에 있는 바운서에 레오를 내려놓고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바운서에 누운 채 두 손으로 제 발을 잡고 장난을 치는 레오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따뜻한 물에 분유를 넣고 흔들기 시작하자 레오의 소리도 더 커졌다.
방금까지 작은 발을 잡고 있던 손이 자신을 향했다.
“지금 내가 아니라 우유병 보고 있는 거지? 나보고 안으라는 게 아니라 우유병 내놓으라는 거고 말이야.”
바운서 앞에 철퍼덕 주저앉은 에반은 슬쩍 레오에게 우유병을 내밀었다가 잡을라치면 얼른 우유병을 움직였다. 레오의 고사리 같은 손이 우유병을 따라다니자 에반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바아~~~~~~”
“응? 밥?”
“꺄…… 바우……. 아부…….”
레오의 앙증맞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의성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 좋아?”
환하게 웃던 레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고 처음엔 웃음기 가득하던 옹알이에 짜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지금 레오의 페로몬에 섞인 감정은 짜증을 넘어 분노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애 가지고 장난 좀 치지 말라고. 어떻게 낮에는 우유병을 바로 주는 법이 없어. 그러니까 자두가 너 싫어하지.”
철썩-.
결국 시우에게 등짝을 맞은 에반은 시우가 바운서에 있는 레오를 안아 들고는제 손에 있던 우유병을 낚아채 거실 흔들의자에 앉는 걸 바라보았다.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금세 기분이 좋아진 레오가 시우의 품에 꼭 안겨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우유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반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레오도 레오지만 자신도 좀 봐 달라고.
“에바나.”
흔들의자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기에 혹여나 레오가 눈이 부실까 봐 손을 들어 레오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시우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리자 에반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나 스파게티 먹고 싶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며 작게 말하는 시우를 보자 헛웃음이 났다. 저렇게 예쁜 얼굴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반칙이지.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을 안고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시우에게 뭔들 못 해 주랴.
“늘 말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이겨. 또 뭐 먹고 싶어? 나간 김에 다 사 와야지. 여긴 다 좋은데 마트가 너무 멀어.”
“그렇긴 하지? 그럼 양갈비랑 브라타 치즈 넣은 샐러드?”
“아점은 간단하게 먹고 저녁에 밖에 숯불 피워서 양갈비?”
“그게 좋겠네. 날도 좋으니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오가 우유를 다 먹자 에반은 시우의 품에 안긴 레오를 안아 들었다. 가슴에 기대게 해서는 등을 천천히 토닥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잔디밭 너머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였다.
“코코.”
“응.”
“여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거기 숙소 같지 않아? 사람들이 낯설어서 다들 인사 나누는 동안 너 창밖만 보고 있었잖아.”
“그런 걸 아직 기억해?”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는 모두 웃으면서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생각난 김에 물어보자. 너 그때 내 말 못 들었어?”
“뭘 못 들어? 너도 커피 마실 거지?”
여전히 창가를 서성이는 에반을 두고 부엌으로 들어간 시우는 원두부터 찾았다. 레오를 가진 동안 먹지 못한 커피를 요즘 원 없이 마시고 있었다. 역시 아침은 커피지.
“내가 분명히 손등이라고 말했잖아. 들어 놓고 왜 손바닥 냈어?”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던 시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싱크대에 기대섰다. 그걸 아직 기억한다고? 그 이야기를 지금 우리 아기 트림 시키면서 하는 거야? 웃으면서 에반의 표정을 살핀 시우는 이번엔 웃느라 배가 당겨 배를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추억 더듬으면서 슬쩍 던진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에반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진짜 왜 그랬어?”라고 확인까지 하니 누가 저 사람을 수도 없이 회귀하면서 산 사람이라고 여길까.
“너 좋아할까 봐.”
부엌에 쪼그리고 앉은 채 시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진짜 못 산다.”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는 에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우는 천천히 일어나 에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까치발을 들어 에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에바니, 나랑 많이 놀고 싶구나. 그럼 우리, 레오 울 엄마한테 좀 봐 달라고 할까?”
하긴 병원 생활에 이어 한국으로 오고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긴 했다. 그동안 우리 너무 내외했다. 그치? 싱긋 웃는 시우의 손은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로는 조금도 숨겨지지 않는 에반의 물건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