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3
헛소리를 해도 정도껏 해야지.
우리 자두가 어떻게 베타야. 지금도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하지만 에반의 진지한 표정에 시우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신의 장난 같은 형질도, 사람 미치게 만드는 회귀도 자신과 에반에게 한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두까지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여기서 지금 자두의 페로몬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자두를 바라보는 시우의 눈에서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을 거예요. 자두 좀 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울음을 먹어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었지만, 작게 중얼거리며 시우는 자두가 있는 인큐베이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작은 움직임에도 개복했던 아랫배가 아픈 것은 중요치 않았다. 괜히 여기서 자두의 페로몬이 어쩌고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코코.”
“제발. 그냥 자두 좀 안게 해 줘.”
시우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볼을 감싸고 그의 엄지가 계속해서 흐르는 제 눈물을 닦는 것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동자를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에게 시선을 한번 맞추고는 다시금 자두를 바라보았다.
에반의 작은 끄덕임 하나에 병실은 분주해졌다. 많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두를 안아 보는 것이다. 제가 제 아이를 안는 그 단순한 행동을 하기 위해선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멸균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끼고서야 자두를 안을 수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다칠 것 같은 작은 아이를 안은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면 안 되는데. 자두를 만나서 기쁜 것과 동시에 무거운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안녕.”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자두의 손을 잡은 시우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의료진의 손에 의해 인큐베이터를 나와 자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도 자두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방금까지만 해도 불안하고 초조해하던 자두의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고서야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 페로몬을 느끼자마자 이렇게 안도하는데, 분명 자신의 페로몬을 느끼고 반응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두가 베타라는 건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두 너 닮은 거 같아. 오밀조밀하게 생긴 게.”
겨우 인사말을 건네고 자두만 바라보고 있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작게 웃었다. 자두가 날 닮았다고? 그럴 리가. 이 조막만 한 얼굴에 높은 콧대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에반만큼이나 자기주장이 강한 이목구비였다.
거기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던 자두가 눈을 뜨는 순간 시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에반과 똑같은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날 닮았어. 완전 에반 2세고만.”
저를 완전히 홀린 초록색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며 시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조금 더 클 때까지 인큐베이터 생활을 해야 하긴 하지만, 큰 사고에 비해 다친 곳이 없어서 안도하다가도, 너무 작은 자두를 보자니 또 깊은 곳에서 화가 울컥하고 솟구쳤다.
자두를 더 안고 그 예쁜 얼굴을 더 보고 싶었지만, 자두도 시우도 쉬어야 한다는 의료진의 건의와 에반 때문에 결국 자두를 품에서 내놓은 시우는 자두가 다시금 인큐베이터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 이렇게 자두와 함께 있을 수 없으니 하루에 몇 번이라도 같이 있게 해 주겠다는 의료진의 말에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병실이 조용해지고 어둠이 짙어진 깊은 밤. 시우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제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링거에 안정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나른하게 잠이 몰려왔다. 자신보다 더 놀라고 더 정신없었을 에반이었다. 하필 그때 잠들어서. 자신의 응급 수술서에 서명을 할 때 에반의 기분이 어땠을까? 자신과 자두 모두 위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미련한 놈은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우는 조용히 에반의 눈을 응시했다.
자책. 굳이 에반의 페로몬에 숨어 있는 감정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페로몬을 꼭꼭 숨기고 있어 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어두워진 눈동자에선 자책과 미안함, 자괴감.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네 탓 아니야.”
“…….”
“내가 갑자기 너 만나고 쇼핑하고 그래서 그런 건데. 어쨌거나 파파라치 새끼들은…….”
부드럽게 서로의 감정을 위로하려 했지만, 다시금 파파라치가 떠오르자 시우는 주먹을 꽉 주고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다. 임신 중엔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 기복이 심할 수 있다고 했고, 충분히 그랬었다. 지금은 임신 중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지. 주먹을 꽉 쥔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려 했지만, 아랫배에서 퍼지는 알싸한 고통에 제대로 한숨도 쉴 수 없었다.
“한국…….”
“가야지. 사생들이 붙고 기자들이 붙긴 하겠지만, 저렇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파파라치는 없잖아. 우리도 우리지만 자두를 위해서도.”
잠시 폭주하는 감정을 누르던 시우는 에반이 한국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그의 말을 자르고 말았다. 영국이 싫은 건 아니다. 에반과 함께면 전 세계 어디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길게 보았을 때는 오히려 한국이 편안할 것 같았다.
“내가 항상 늦어서 미안해.”
“이리 와.”
그렇게 당당하고 오히려 자만감이 너무 넘쳐 문제인 것 같은 에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잘못한 것은 조금도 없기에 시우는 덮고 있던 시트를 살짝 들었다.
“…….”
“너도 환자잖아. 너도 다쳤어. 쉬어야지.”
“…….”
“빨리 나 좀 안아 줘.”
여전히 머뭇거리는 모습에 혀를 찬 시우는 계속 망설이는 에반을 재촉해 그를 제 침대로 끌어들였다.
“어느 쪽이야?”
“…….”
“어느 쪽 어깨 다쳤냐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 같아. 내가 좋아하는 에바니 어디 갔어?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에바니 좀 불러 줄래? 그리고 왼쪽 빗장뼈에 금이 갔으니까 오른쪽 어깨는 좀 베도 되지?”
여전히 어둠이 가득한 에반의 눈을 외면한 채 시우는 제가 내키는 대로 침대에 에반을 눕히고는 그의 오른쪽 어깨를 베고 누웠다. 움직일 때마다 아랫배가 당기고 아프지만, 지금은 이런 육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페로몬.”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반의 페로몬이 허공을 채우자 시우는 눈을 꼭 감았다.
“너랑 자두 괜찮으면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게 준비할게. 내 생각이 짧았고, 내가…….”
“됐어. 넌 할 만큼 했고. 알았다고 해도 막을 수 있진 않았을 거야. 비도 왔다며. 그것보다 자두 베타라고? 검사에서 페로몬 수치 검출되지 않은 거야?”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에반의 왼쪽 가슴에 올려 두었다. 에반의 심장이 일정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시우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응. 너랑 자두 둘 다 페로몬이 잠시 끊겼는데. 자두는 돌아오지 않더라고. 아직 너무 어리고 불안정하니까 후발현 할 수 있다는 말도 하던데 그런 건 중요치 않잖아.”
“……너도 못 느끼는 거야?”
“응.”
“난 느껴지는데. 우리 자두 커피 향 그 페로몬 말이야. 지금도 혼자 있기 싫대.”
“…….”
“자두가 알파이든 오메가이든 베타이든 그런 건 네 말대로 중요치 않아. 나처럼 히든일지도 모르잖아. 그런 것보다 우리 자두가 회귀만 안 했으면 좋겠어.”
잠이 내려앉은 시우의 목소리는 작고 느렸지만, 시우가 말하는 한 단어 한 단어가 에반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자두가 히든이라면 우리가 찾아 주면 되잖아. 자두가 우리만큼 행복해지게 도와주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이거 우리만 알자. 페이든도 모르게 해 줘.”
잠이 들기 전 시우는 아주 작게 읊조렸다. 그건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평범하게. 평범하게…… 다른 사람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해 줄 거야.’
* * *
“에바나~”
에반은 멀리서 들리는 시우의 소리에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병을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빨리!”
지금 간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재촉하는 시우의 말에 이어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자, 에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상의는 입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뜬 머리카락이 어스름한 달그림자에 도깨비 뿔처럼 보였다.
“가고…… 하암…… 있어.”
터져 나오는 하품을 숨기지 못한 채, 침실로 들어간 에반은 곧장 아기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시우의 품에 안겨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아기를 안아 들고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안정적으로 안고 젖병을 물리는 모든 행동엔 군더더기가 없고, 마치 전성기 시절 숙달된 안무를 추는 것처럼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던 아기 울음소리 대신 허겁지겁 젖병을 빠는 소리에 에반은 허탈한 듯 작게 웃어 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정말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아. 힘들어.”
에반의 웃음소리에 시우는 풀썩 침대로 쓰러지며 웅얼거렸다.
“그러게 보모가 있으면 이런 일 안 해도 된다니까.”
새벽 3시.
새근새근 잘 자던 자두의 울음소리는 초보 엄마, 아빠를 허둥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에반이 급하게 분유를 타는 동안 기저귀를 확인했던 시우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시우는 에반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언론을 멀리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언론을 일부러 멀리한 것이 아닌 처음으로 해 보는 육아에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어떻게 우리 자두를 다른 사람한테 맡겨…….”
웅얼거리는 소리에 이어 새근거리며 곧 잠에 빠져든 시우를 본 에반 역시 의자에 편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윽고 방 안엔 만족스럽게 젖병을 빠는 아기의 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