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2
변호사도 비서도 사고 소식에 놀라서 달려오신 어머니도 모두 돌려보낸 에반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짧은 시간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이제야 홀로 남은 것이다.
언론에서 제멋대로 떠들어 댄 글귀들이 허공에 맴도는 것 같았다. 자극적인 제목들, 자신과 시우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기원하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큰 사고에 비해 자신과 시우, 자두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셋 모두 큰 부상 없이 무사했으니까. 하지만 과연 무사한 것일까?
개월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자두는 소아 응급실의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 홀로 누워 있다. 마취가 풀리면 깰 것이라는 시우는 병실에 혼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자신은 시우가 있는 병실에 붙어 있는 거실에 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모두 다른 장소에 홀로 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사고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다.
하지만 예견된 사고다.
깨어난 시우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에반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려다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없을 땐 아픈 것도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온몸이 아프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긴장했던 것들이 이제 풀리는 것이겠지.
제가 이럴진대 잠든 상태로 이 많은 일을 겪은 시우는 어떨까?
곧 깨어날 시우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를 따라오던 파파라치 중 미친 것들이 들이받았다고 그래서…….
자두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먹먹해졌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던 시우의 페로몬은 아주 잠깐 사라졌었지만 금세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고 안정적인 감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시우가 잠들어 있는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페로몬을 느끼고 있던 에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정리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그건 시우의 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병실로 들어간 에반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새하얀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시우였다.
그의 몸에 이어져 있는 복잡한 선들에 무의미한 시선을 잠시 두었던 에반은 이내 침대 옆에 있는 의자가 아니라 시우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어나면 많이 놀라겠지만. 다 괜찮대. 내 빗장뼈에 금이 간 건 몇 주 고생하면 금방 아물 테고, 우리 자두는 혼자지만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어.”
허공에 잠시 머물러 있던 에반은 느릿하게 손을 내려 흐트러진 시우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계속해서 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지만,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 한국으로 가자고 말하기도 미안하다. 파파라치들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하겠다는 말조차 할 자격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파파라치들을 그저 자신의 배경과 아이돌 출신이라는 점과 더불어 특이 형질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파파라치들과 적당한 선을 지키며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다.
모두 제가 안일하게 생각했고, 싫어도 싫다는 말을 잘 못하고 혼자서 삭이며 그저 좋다 좋다 말하던 시우의 말을 믿었던 탓이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고, 출근하는 자신을 침대에서라도 배웅하며 입 맞춰 주는 시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입덧 때문에 집에 있는 것이 편하다고. 몸이 무거워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시우는 여행을 좋아했다.
오션 활동 휴식기엔 둘이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비록 벙거지나 캡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도 착용하긴 했지만, 둘이서 이곳저곳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니저도 스태프도 방송용 카메라도 없이 단둘이서 그렇게 돌아다닐 때면 시우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역시 자신들을 알아보는 이유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때문이라고. 이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다니면 아무도 모른다고 속닥거렸다.
과연 그랬을까? 시우는 모르겠지만, 그들 주위엔 항상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알아보고도 모른 척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가 되면 나가는 걸 좋아했다. 나중엔 모두가 잠든 새벽녘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을 왜 믿었을까.
갑작스럽게 회사로 찾아온 시우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에서 라이브로 팬들과 소통하면서 쇼핑을 하던 그 기분은 어땠을까?
모두 제 잘못이다. 자신을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미소를 짓는 시우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고 더 알아주었어야 했다.
시우와 자두만 괜찮다면 언제든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게 준비를 시작하라고 비서에게 말했지만, 시우에겐 이 모든 것이 엎드려 절받기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미……안해.”
마음속의 많은 말들은 결국 구구절절한 변명일 뿐이다.
시우의 이마에 닿은 에반의 손끝은 편히 잠든 시우의 얼굴 여기저기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시우의 얼굴에 맴돌던 손끝을 거둬들인 에반은 이내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시우의 손을 감싸고는 일정하게 링거액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지금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애써 깨우는 것이 아닌 시우가 스스로 깨어나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일어나…….”
“시끄러.”
너무 오래 자면 의료진을 또 불러야 하니까 그만 일어나면 안 되겠냐고 말하려던 에반의 말은 작은 소리에 뚝 끊겼다.
“코코. 코코? 일어났어? 괜찮아? 방금 네 소리 들은 것 같아서 그래.”
분명히 짜증이 스며든 시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잠시 링거액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느라 시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급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본 에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옆에서 뭘 그렇게 건드려 대고 중얼거려.”
초록 눈동자엔 물기가 어리고, 파르르 떨리며 시우에게 할 말을 고르는 에반의 입술은 시우의 거친 언행에 꾹 다물렸다.
“미친 파파라치 새끼들. 내 눈에 띄면 뼈와 살을 분리해 버릴 테니까, 내가 살인자 되는 거 보기 싫으면 네가 알아서 감방에 잘 처넣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거 침대 좀 세워 봐. 아, 진짜 배 아파.”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며, 자두가 생긴 것을 안 이후 착하고 좋은 생각을 하고 예쁜 말만 해야 한다며 한동안 조심하던 시우의 언행엔 거침이 없었다.
사고부터 그래서 지금의 상황과 자두 소식까지 천천히 설명하려고 준비했던 모든 멘트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명 사고가 일어나기 전 잠든 시우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보면 이미 다 아는 것 같았다.
“자두는 왜 혼자 뒀어. 당장 데리고 와. 별문제 없잖아. 나랑 강제로 떨어진 것도 서럽고, 인큐베이터에 갇힌 것도 싫은 애를 왜 혼자 둬. 네 잘난 배경을 이용하든 간호사나 의사를 항시 대기하게 하든 어떻게 해서든 자두 이 병실 안에 있게 해.”
시우의 재촉에 침대를 조금 세워 준 에반은 연이어 자두에 관한 이야기까지 하는 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넌 어디를 어떻게 다쳤기에 양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거야?”
자두에 관해선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시우의 시선이 제 어깨에 닿은 것을 본 에반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기려다 찾아오는 고통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시우의 독촉에 의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상황부터 그 뒤의 일들. 에반의 빗장뼈에 금이 간 상황과, 시우와 자두 모두 위급한 상황이라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다.
그 뒤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우의 파파라치를 향한 필터링이 전혀 되지 않은 거친 언행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든 자두가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자두. 제가 안게 해주세요.”
시우는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더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자두를 바라보다 그 옆에 서 있는 의료진에게 요구했다. 파파라치 때문에 사고가 난 것도, 급박한 상황에서 제왕절개를 한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두를 홀로 소아 응급실에 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온하게 잠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자두는 울고 있었다. 갓 내린 원두커피의 따스하고 고소한 그러면서도 쌉싸름한 자두의 페로몬 안엔 애타게 자신과 에반을 찾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조금 전 에반의 설명에 의하면 자두에겐 큰 의학적 문제는 없다고 했다.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자두에게 세상 모든 것이 위협적일 수 있는 건 안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인큐베이터 안이 자두에게 더 안정적일지는 모르지만, 애가 이렇게 무서워하고 자신을 찾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괜찮다고 자신과 에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에반은 지금 자신의 페로몬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임신 중엔 자신보다 자두의 감정을 더 잘 읽던 그였다. 그런데 이렇게 애타게 울고 있는 자두를 외면한다고?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자두 자고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깨어나면…….”
다정한 말투로 자신을 다독이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자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아야지. 넌 알잖아. 왜 모른 척해?
“너…… 왜 그래? 페로몬은 왜 숨겨?”
“여기 병원이잖아.”
병원이다. 에반이 틀린 말 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아마도 이 병실이 있는 곳은 알파, 오메가 센터겠지. 그러니 페로몬 조절을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다. 자신과 자두만 느낄 정도로 약하게 흘리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알파, 오메가 센터의 병실은 페로몬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특수하게 설계하고 건축했다는 것 정도는 시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병원이 문제가 아니라 자두가 네 페로몬 좋아하는…….”
“자두 베타잖아.”
시우는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하는 에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