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1
어깨와 팔을 짓누르며 제재하려는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는 에반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코코가 저기 있잖아. 내 전부가 저기 있는데.
왜…….
그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된 이들인지라 에반을 잡는 힘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쉽게 뿌리쳤을 그들의 손길에도 에반은 속절없이 휘둘렸다.
시우의 페로몬을 느끼는 건 에반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장시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시우가 흘린 그의 페로몬이 항상 그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시우에게 페로몬 샤워를 당하다시피 하던 에반은 갑자기 사라진 그 흔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늘 들이마시고 내쉬던 공기 속에 스며 있던 은은하고 달콤한 자두 향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 존재의 이유이자 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사라진 지금 에반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 겪어 본 기분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들지는 않았다.
겨우 입맞춤 한 번 하고 시간이 되돌아갔을 땐 다시 만나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으니까.
그건 그만큼 시우를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 에반의 삶은 온통 시우로 가득했다. 어떤 의미를 담지 않은 것 같은 작은 손짓에 숨은 뜻까지 알 정도였다. 서로에게 감정 동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난 이후 시우는 장난도 많이 쳤다.
회사에 있을 때 전화를 걸어 놓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키던 시우는 용건을 말하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날 집으로 돌아가는 에반의 손엔 포장된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감정이 가득한 시우의 페로몬이 끊어지기 직전 그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다.
자두가 그랬던 것처럼.
둘의 페로몬이 사라지기 직전 그들이 찾은 건 자신이었다.
경호원들의 손에 눌려 수술실 앞에 무릎을 꿇은 에반은 자신을 다독이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시우를 잃을까 두려운 에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장 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지만, 제가 지금 느끼는 현실을 마주할까 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는 젖은 볼을 쓰다듬으며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괜찮다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해 주는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볼 뿐 에반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나마 감정을 표현해 주던 그들의 페로몬이 사라졌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함을 자신만이 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모른다. 저를 온전히 알아봐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우가 전부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다. 밑도 끝도 없는 시간의 굴레에서 헤맨 것도,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고 싶은 수술실을 무작정 들어가겠다고 난리 치지 않은 것도 다 시우 때문이었다.
많이 당황하고 놀랐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어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자신도 자두도 에반도 모두 괜찮을 거라고 믿고 있는 시우 때문이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시우의 감정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사라지면.
둘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난 어떡하지?
괜찮을 거라고 진정하라는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에반의 시선이 수술실에 닿는 것과 동시에 수술실 문이 열렸다.
앞서 나온 페이든에 이어 천을 씌운 인큐베이터를 끌고 나오는 의료진의 모습에 에반은 그들이 아닌 그 너머 수술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날뛰던 자신을 짓누르는 경호원의 손을 빌려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은 인큐베이터에 씌워져 있던 하얀 천에 손을 댔다. 톡톡 튀는 느낌의 자두의 페로몬은 분명히 사라졌다. 익숙한 자두의 페로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아기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우렁차고 큰 소리가 아닌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가녀린 울음소리에 천을 잡은 에반의 손이 파리하게 떨렸다.
“자두는 소아과에서 추가 검사를 해야 해서…….”
에반이 천을 젖혀 확인하기도 전 자두가 있는 인큐베이터는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어딘가로 향했다. 시우도 자두도 모두 위험한 상황인지라 응급 제왕절개에 들어가 시우의 경우 추가 처리가 필요하다며 수술실 앞이 아닌 준비된 병실에서 기다려 달라는 페이든의 말은 에반에게 온전히 닿지 않았다.
수술실을 쳐다보던 에반은 유리문이 닫힘과 동시에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우의 페로몬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순간 제게 소중한 모든 이를 잃는 줄 알았다. 미약하게나마 다시금 시우의 페로몬을 느끼고서야 에반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응급 상황이라 자두를 보지도 못했고, 시우의 상태에 대해 전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해도 에반에겐 너무나도 고맙고 벅찬 상황이었다.
“페이든 말대로 병실에서 기다리자. 너 이마 치료 제대로 받고, 그 옷도 갈아입고, 시우한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어?”
“……”
제 팔을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어머니의 말에 손을 천천히 내린 에반의 입에서 헛웃음과 같은 한숨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피로 얼룩진 손과 흰색 셔츠 끝이 검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그리고 너도 검사받아야 한대.”
그제야 걱정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을…….”
어머니를 안아 주려던 에반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 * *
에반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우가 있는 병실을 한번 보고는 소파에 앉아 비서에게서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피로 물든 셔츠와 정장 대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에반의 양쪽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사고 순간 시우를 강하게 끌어안고 사고 충격을 제가 다 받으면서 빗장뼈에 금이 갔단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시우에겐 작은 타박상조차 없었고, 응급 제왕절개를 하면서 전신마취를 한 상태인지라 깨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무작정 들이받은 파파라치의 차가 완파되고, 에반과 시우가 타고 있던 차가 반파된 큰 사고에 비하면 이 정도로 다친 게 천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자두가 있었다.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난 자두는 홀로 작은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급한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겨우 1.5kg밖에 되지 않는 아이는 한동안 홀로 그 작은 곳에 있어야만 했다.
따뜻한 부모의 품이 아닌 그 작은 몸에 기계들을 주렁주렁 달고 외로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에반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안아 줄 수도 없단다. 홀로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 자두를 지켜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도 강하게 페로몬을 뿌려 모든 이들에게 최소 우성 알파일 거라는 말을 듣던 자두는 페로몬을 잃었다. 모두가 알파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검사 결과 자두는 베타로 판정받았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에반 역시 자두의 페로몬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에반과 시우가 돌연변이에 가까운 형질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자두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고 너무 어린 탓에 제대로 된 검사를 할 수도 없단다. 의사의 설명을 듣는 에반의 입에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무엇 하나 평범할 수 없단 말인가.
지금은 축복이라 여기지만 제가 가진 형질과 상황에 저주하던 시간이 더 길었다. 자두가 그런 길을 걷게 될까 두렵다. 지금 확인한 대로 베타인 것이 더 편할지 모른다.
‘우리 자두는 평범했으면 좋겠다. 그치? 지금은 좋지만, 우리 너무 힘들었잖아. 우리 자두도 그렇다면 나 속상할 것 같아. 그래서 자두가 연예인 한다고 하면 말릴 것 같아. 분명 너 닮아서 그 외모를 낭비하는 것 같긴 하지만 쉬운 직업은 아니잖아.’
‘알파로 태어난 이상 그리 평범하진 않을걸?’
‘태어나 보니 집안은 세계적인 재벌가고 부모가 우리니까, 이미 평범하기는 틀려먹은 것 같긴 하네. 거기다 알파에 너 닮으면……. 왠지 자두한테 미리 사과해 둬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마음으로 시우가 그런 말을 했는지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기에, 혹시나 연예인까지 한다고 나서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못 하게 하겠다고 했다가 어떻게 애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말을 하냐며 시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제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은 작은 자두와의 면회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저 현재 자두의 상태에 대해 의사에게 들으며 두꺼운 창 너머 인큐베이터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작고 여린 자두가 눈에 밟혀 심란한 마음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에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어 갔다. 그들에겐 한낱 가십거리다. 우리에겐 지옥 같은 이 사고조차 너무나도 가볍게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찍어 대던, 쇼핑하는 그들의 모습과 사고 장면을 찍은 사진. 자신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시우를 안고 다른 차에 옮겨 타는 모습까지 그들은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병원의 VVIP 전용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그곳에 있었다. 그 뒤로 그들의 상태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으니 온갖 억측을 갖다 붙이고 있었다. 온갖 자극적인 단어들을 다 버무려 놓은 기사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에반이 직접 주문 제작한 차가 아니었으면 더 크게 다쳤을 거라느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시우가 임신 중이기에 아기에게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겁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시우가 보지 못하게 모두 내리게 하세요. 이 시간 이후로 이딴 기사나 방송을 하는 언론사들은 내 전 재산을 탕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소송을 걸 테니까.”
쓰레기 같은 기사는 더 보고 싶지 않기에 태블릿을 끈 에반은 잠시 불러들인 변호사와 비서를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