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79화 (179/187)

외전 2. 18

“코코.”

연핑크색 젖병을 들고 보던 시우는 에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셀카봉을 들고 있는 에반의 얼굴을 힐끔 본 시우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젖병을 내려놓고 연핑크색 젖병 세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세트가 좋겠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이렇게 분홍분홍 한 것이 많은데 왜 쇼퍼님은 맨날 아이보리색이나 민트, 블루 계열만 보여 주신 건지 모르겠네. 여러분 성별에 특정 색을 지정하는 건 옳지 않아요. 나중에 우리 자두가 커서 파란색이나 초록색을 좋아할지는 몰라도 지금은 일단 내가 쓰는 게 더 많으니 핑크로 하겠습니다.”

에반이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는 시우가 충동 구매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조그마한 손 싸개, 발싸개. 너무 귀엽다고 한참을 구경하다 결국 세 개나 사 버린 모자와 유아용 헤어밴드까지. 그의 말대로 성별과 색에 구애받지 않는 것들이었다.

“와. 진짜 비싸다.”

오거닉 어쩌고저쩌고 온갖 설명이 붙은 유아 이불 앞에 몸을 굽혀 가격표를 확인한 시우의 시선이 다시금 에반에게로 향했다.

“사고 싶다고?”

초롱초롱한 시우의 눈빛을 너무나도 쉽게 읽은 에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냥 구경하다가 자두 물건 하나만 사자며. 이대로라면 이 상점에 있는 신생아용 물품은 죄다 살 기세였다.

“손수건이 많이 필요해요? 또? 기저귀 가는 테이블이랑 아기 침대? 아! 아기 침대는 선물해 주신다는 분이 있어요. 엥? 그건 또 뭐지? 에바나, 역류 방지 쿠션? 그런 것도 있다는데?”

방금까지 이불을 보고 있던 시우는 어느새 에반의 앞으로 와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에 시선을 두었다. 처음 들어 보는 물건들의 이름을 볼 때마다 시우는 외우기라도 하려는 듯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자두 물건 하나만 사기로.”

“아, 여기 없는 것도 있구나.”

역시나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채팅창을 한번 보고 옆에 있는 직원분과 대화를 나누는 시우를 본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시우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온종일 집에 갇히다시피 은둔하고 있던 시우는 모처럼의 외출에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분명 제가 하나만 사자고 하더니 빨빨거리며 여기저기를 누비다 하나씩 가지고 와 바구니에 넣는 모습에 에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집과 병원. 두 곳만 오가던 시우에겐 모처럼의 제대로 된 외출이었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집이 있어도, 정신을 빼놓는 러쉬가 있어도 이런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을 것이다.

쇼퍼가 골라 오는 최상급의 물건들도 좋지만 직접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일조차 시우는 하지 못했다.

여전히 휴대전화와 옆에 서 있는 안내원을 번갈아 보며 니모님들이 말해 주는 물건들이 여기 있는지 확인하는 시우의 뒤에 선 에반의 팔은 자연스레 시우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둥근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리가 덜 유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연예인이 아니었거나 내가 로이드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둘 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한국에서 만든 거래요? 역시 한국 엄마들 짱. 그럼 그건 한국에서 사 와야겠다. 뭐가 많고 어렵네요.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에반이 배를 쓰다듬든 말든 시우는 그의 가슴에 편히 기댄 채로 열심히 니모들과 소통했다.

에반의 페로몬이 시우를 감싸고, 그의 손이 느릿하게 배를 쓰다듬자 자두가 깨어났는지 에반의 손을 따라 꼬물거렸다. 결국 한창 종알거리던 시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반의 손을 자두가 툭 차자 에반은 얼른 다른 손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자두도 몸을 움직여 에반이 손을 올리고 있는 곳을 찼다.

요즘 에반과 자두는 이러고 노는 것에 재미를 붙였지만, 시우에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둘 다 좀 얌전히 놀 순 없어? 이제 제법 많이 큰 자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갈비뼈 쪽을 잘못 차기라도 하면 ‘아-’ 소리가 나올 만큼 아플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 나 힘들어.”

시우의 얼굴만 보고 있던 니모들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에반이 자두와 장난을 치자 결국 에반을 밀어냈다.

에바니는 그렇다 치고 자두 넌 배 안에서 축구라도 하니? 그만큼 네가 튼튼하다는 건 알겠다만, 지금은 좀 멈춰 줘.

시우는 한 손으로 배 아래쪽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배를 쓸며 흥분한 것 같은 자두를 달랬다. 방금까지 뻥뻥 차던 자두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지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에반이랑 자두가 장난이 심해서. 하-. 그럼 오늘은 이 정도만 살게요. 공부해서 다시 와야 할 것 같거든요. 다시 올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저희가 여기 있으면 다른 분들이 편안하게 쇼핑할 수가 없잖아요. 저나 에바니도 평범한 사람이고. 저 나름대로는 저희가 생활하는 거 많이 보여 주고 소통한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한가 봐요. 솔직히 예전엔 사생들 진짜 무섭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곳 파파라치에 비하면……. 아니다, 오십보백보. 저렇게 찍을 시간에 그냥 여기 접속하셔서 궁금한 거 채팅창에 올리세요. 대답해 줄 테니까.”

언뜻 보아도 매장 밖에서 카메라를 들이댄 사람이 많은 것을 본 시우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는 한 손으로 허리 뒤를 짚은 채 에반보다 앞서 걸었다. 물건을 포장한 종이 백이 동행한 경호원의 손에 들리고, 또 다른 경호원이 사 온 패션프루트에이드를 마시던 시우는 그만 가야 할 것 같다는 에반의 말에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라이브도 더 하고 놀고 싶은데, 이제 매장 나가야 해서 오늘은 그만. 다음에 브이로그에서 만나요.”

라이브를 끝낸 시우는 밖을 바라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어?”

“조금.”

당장이라도 자신을 안아 들 것 같은 에반의 표정에 시우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에 올리고 작게 토닥거렸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열심히 일하던 에반을 불러냈고, 쇼핑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평소보다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표정 펴세요. 이래 봬도 제가 왕년에 두 시간이 넘는 콘서트를 지치지 않고 뛴 사람이거든요?”

“그거랑 다르잖아.”

“외식까진 못 하겠다. 바로 집에 가. 아, 나 거기 레스토랑 있잖아. 거기 티본스테이크 먹고 싶었는데. 포장해서 먹는 거 맛없어. 거기서 먹어야 맛나지.”

시우는 가슴을 토닥인 손을 들어 주름이 생긴 미간을 만져 주며 다른 손에 든 에이드를 마셨다.

“셰프한테 준비해 달라고 할까?”

“그러든지.”

에반과 이야기를 하면서 걷던 시우는 멈춰 선 경호원 때문에 절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외출 시 파파라치가 붙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닐 때도 늘 따라다녔고, 지금은 파파라치끼리 연락이라도 하는지 사람이 더 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상태와 자두에 대해서 알아내려 병원 직원과 내통하려 들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다른 셀럽들에 비해 시우와 에반의 삶은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숨기려 들수록 더 집요해지는 것을 알기에 브이로그와 라이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무엇이든 더 알아내려 안달이 난 그들을 보니 할 말이 없다.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제대로 된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시우는 임신을 한 것이 거짓이 아니냐는 중얼거림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자신과 에반에 대해서 말하는 건 어느 정도 눈감아 주겠지만, 아이만은 건들지 말라고. 시우가 발걸음을 멈추자 더 신이 난 것인지 진짜 오메가이긴 하냐. 굳이 임신으로 어그로를 끌려는 이유가 뭐냐. 상상치도 못한 말을 쏟아 내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임신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밝혀질 일이다. 거기다 왜 저와 에반이 아이까지 들먹거리며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진짜 싫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 계속 이어지자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도발해서 화를 낸다거나 평소와 다른 모습을 찍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가십 잡지나 방송에 팔아먹으려 드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코코랑 자두 예쁘고 좋은 말만 들어야 하는데.”

제 기분을 아는 에반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두 손을 들어 양쪽 귀를 막아 주는 행동에 시우는 피식 웃었다.

로이드가에선 계속해서 파파라치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이제 학생이 되는 케이티 역시 그들의 먹잇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예쁘고 밝은 아이가 자신을 향해 마구 터지는 플래시에 지쳐 울음을 터트렸다. 유치원까지 찾아온 파파라치들은 케이티의 친구들에게까지 어이없는 질문들을 퍼부었다.

도대체 그 어린아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과목을 잘하고 못하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한국 가고 싶어. 한국엔 저리 난리 치는 파파라치가 별로 없잖아.”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백화점 보안팀까지 오고서야 백화점 정문에서 대기 중이던 차에 오른 시우는 에반의 품에 기댔다.

오랜 시간 서 있었고, 파파라치들 때문에 긴장까지 한 상황이라 허리도 뻐근하고 배도 뭉쳐 있었다.

“힘들어?”

“응.”

“미안해.”

시우는 에반의 손을 끌어 배가 뭉친 부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의 손 위로 손을 겹쳐 천천히 쓰다듬게 했다.

“네가 뭐가 미안해. 저것들이 문제지. 자두 화났지?”

“조금. 네가 힘들어하니까.”

“괜히 내가 쇼핑하겠다고 우겨서 이 사달을 만들었네. 그냥 인터넷으로 보고 주문해야겠다. 아니면 쇼퍼한테 말하든지. 또 나오긴 힘들겠지?”

시우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원하면. 백화점 운영 시간 끝나고 와야지.”

“쟤들 꼴 보기 싫어서 안 나올래.”

시우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차 안엔 침묵이 내려앉았고, 피곤한 시우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자두 너도 조금 자자. 너 깨서 놀면 엄마 힘들어.”

에반은 시우가 뭉쳤다는 부분을 부드럽게 만져 주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자두를 느끼곤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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