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76화 (176/187)

외전 2. 15

시우에게 찾아온 입덧은 정확히 한 달을 머물고 사라졌다.

온종일 누워만 있어도 피곤하고, 샤워 한번 할라치면 큰 다짐을 해야 했다. 샤워를 하다 말고 욕실 부스 안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은 채,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길 기다리다 혼자 울기도 했다. 도대체 엄마는 이런 걸 어떻게 두 번이나 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에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에반의 품에선 입덧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잘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뭐든 조금은 먹을 수 있었다. 더 심한 날도 있고 덜한 날도 있지만, 어차피 뱃멀미 속에 있는 것이라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기에 시우의 삶은 짧은 시간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속이 비면 입덧이 더 심해지는지라 침대 옆 테이블에 보리차와 비스킷을 두고 자는 것에 익숙해졌다.

의사나 엄마의 말대로 죽으란 법은 없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시우는 그날도 어김없이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팔을 뻗어 보리차부터 찾았다. 입술부터 좀 축이고 비스킷을 먹어 울렁이는 속을 달래려던 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지? 이거 무슨 일이지?

혼을 쏙 빼놓은 롤러코스터에서 막 내려 땅에 발을 딛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많이 줄었다. 물먹은 솜처럼 힘이 없어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던 시우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빈혈기가 몰려오지 않았다.

의사가 철분제를 비롯해 각종 영양제를 챙겨 줬지만, 시우는 제대로 챙겨 먹을 수가 없었다. 먹고 게워 내는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페이든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수액을 놓아 줬다.

“어?”

갑자기 사라진 입덧에 놀라는 것도 잠시 시우의 손이 조금의 변동도 없는 자신의 아랫배에 닿았다.

“코코, 괜찮…….”

시우는 뒤에서 들리는, 꽉 잠긴 에반의 목소리에 아니라고 넌 더 자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에반이 침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시우에게서 떠난 입덧은 에반에게로 갔다.

골든 알파의 입덧이라니. 처음엔 체한 것이라 생각했고, 속이 불편한 것이 며칠 이어지자 신경성 위궤양이라 여겼다.

멀쩡해진 시우와 달리 점차 울렁거림과 불면증이 심해지던 에반은 결국 시우의 등쌀에 떠밀려 건강검진을 받고 페이든으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다.

건강검진 결과 모든 것이 정상으로 아주 건강한 상태인 에반의 현재 증상은 입덧과 유사했던지라 페이든은 에반에게 입덧이라는 병명을 내려 주었다.

병명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그런 진단을 받은 에반은 지금 지옥을 걷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아진 시우와 라이브를 찍을 때부터 시작된 입덧은 쉬이 사라질 생각을 않고 에반에게 머물러 있었다.

* * *

입덧이 사그라드는 것과 동시에 시우에게 찾아온 건 식욕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먹고 싶은 것을 원 없이 먹으며 시우는 브이로그를 찍기 시작했다.

대부분 10분 내외의 짧은 일상생활을 찍다가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직접 요리를 하는 브이로그도 찍었다. 에반의 부모님 댁에서 일하시는 셰프님께 뱅쇼와 에그타르트를 만드는 것을 배우면서 찍었더니 반응이 좋아 아예 셰프님과 함께 하는 요리를 브이로그 아이템 중 하나로 지정해 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은 요리, 한 번은 일상을 찍고 직접 편집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결혼 전에 에반이 회사를 간 동안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지만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 되어 버렸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입덧에 시달렸고, 지금도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임신 전보다 빨리 지쳤기에 수시로 누워서 쉬고 꼬박꼬박 낮잠을 자느라 지루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설날을 맞아 특별한 요리를 하기 위해 팬들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불렀다.

“뭐가 작은 집이야. 궁궐이구만.”

“누가 작은 집이래요. 에바니 기준으로 작은 집이지 내 기준으론 큰 집이거든요. 인테리어 하고 뭐 하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커진 거예요.”

“깨소금 볶는 냄새가 진동을 하네, 진동을……. 그래, 결혼하니 좋냐?”

“억울하면 형도 연애하고 결혼하든가.”

“됐거든.”

“맨날 됐대. 형 나이를 생각해 봐요. 연애 한번 못 하고 서른이야.”

시우는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서 정원을 보는 상준의 앞에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내놓았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현수에게 다가갔다.

“현수 형, 상준 형이랑 다니는 거 피곤하지 않아요? 아닌 척하면서 은근 잔소리쟁인데.”

“응? 난 괜찮은데?”

“괜찮으니 다니겠죠. 오늘 우리 라이브 하면 난리 나겠다. 그쵸?”

“진짜 나도 라이브 같이 하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 해요?”

시우는 제 몫의 오렌지주스를 들고는 벽난로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이런 곳은 얼마나 하냐는 현실적인 현수의 말에 우린 죽었다 깨도 못 산다고 대답하는 상준을 번갈아 보았다.

상준도 현수도 제게는 참 소중한 사람이었다. 거의 7~8년 전 일이 되어 버렸지만, 현수와도 함께 한 ‘Journey’ 촬영은 에반과 시우가 심심하면 꺼내 놓는 이야기였다.

이번 삶에도 현수는 아이돌이자 라디오 진행자였고, 오션이 그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친목을 쌓을 수 있었다. 각자 바쁜 삶을 살면서도 간간이 연락하던 사이였는데, 오션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상준은 홀로 현수의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라디오 방송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상준이 현수에게 곡을 만들어 주면서 더 친해진 것 같았다. 영국에서 한번 곡 작업을 하더니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수시로 영국을 들락거리는 상준에게 같이 브이로그를 찍자고 연락했더니 대번에 돌아온 대답이 현수와 같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또 그걸 놓칠 순 없지.

시우는 둘을 초대했고, 초대한 김에 또 그냥 있을 수가 있나. 이미 충분히 인기가 있는 것 같다만 늘 에반, 시우, 러쉬, 셰프님만 나오는 브이로그에 새로운 출연자로 그들을 넣기로 마음먹었다.

“상준이야 당연히 너랑 찍는 거고. 난 구경할게.”

“그런 게 어딨어? 왔으면 같이 찍는 거지. 나 요리 못하는 거 둘 다 알잖아.”

시우는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왜 의심스럽지.

원래 자신의 일보다 제삼자의 일을 알아채기 쉬운 법이었다.

그 와중에 처음 보는 현수보다 그래도 몇 번 본 상준이 편한 건지 현수를 쳐다보면서도 러쉬는 상준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러고는 쉬고 있는 상준의 한 손을 끌어 어서 제 몸을 쓰다듬으라고 재촉했지만, 상준이 그 시그널을 알아채지 못하자 러쉬는 억지로 그의 손 아래 제 머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상준 형, 러쉬 좀 쓰다듬어 줘요. 애가 그리 원하는데 머리 만져 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그것도 귀찮아요?”

“난 숨 쉬는 것도 귀찮은 사람이야.”

“자, 음료 한 잔씩 하셨으면 이제 방송 시작해야죠.”

“난 안 한다니…….”

“의자 세 개인 거 보이시죠? 늦었어요. 어서 앉으세요.”

그렇게 양쪽에 상준과 현수를 둔 시우는 싱긋 웃고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시우입니다.”

“……라이브야?”

“네. 라이브죠.”

“너 라이브……. 흐음. 니모~”

라이브라는 시우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시우를 쳐다본 상준은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브이로그 찍는다며? 그런데 왜 라이브야. 일단 이건 나중에 이야기해야 할 사안이고 일단 지금은 방송에 충실해야 했다.

“우와, 채팅 진짜 빨리 올라가요. 아무래도 제 옆에 있는 이분 때문에 그러신 것 같은데. 직접 소개해 주시죠.”

“안녕하세요, 현수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시는 그 그룹의 멤버 맞고요. 시우가 초대해서 놀러 왔는데, 갑자기 라이브를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이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니모님들은 아시겠지만, 저희 현수 형 라디오 나가면서 친해졌잖아요. 상준 형은 최근까지도 현수 형 라디오 패널로 있으니까 더 친하고요. 그건 요리하면서 차차 말해 보고요. 오늘 저희가 만들 건요.”

시우는 앞에 놓여 있는 음식 재료를 제 쪽으로 당겨 오면서 말했다.

“역시 우리 니모님들 말 안 해도 다 아셔. 시우가 설날이라고 만두 빚재요. 셰프님이랑 할 때는 스테이크 막 이런 거 하고, 우리는 이런 거 시키고.”

라이브를 시작한 이후 채팅창이 너무 빠르게 올라가는 탓에 시우는 채팅을 보는 건 포기하고 상준과 현수 앞으로 분배해 놓은 재료들을 밀어 주었다. 오늘은 시우의 라이브라기보다 상준의 라이브에 가까웠다.

활동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는 찬과 예찬과 달리 상준은 여러 가수들과 곡 작업을 한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줄 뿐 정작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봐 봐요. 이거 내 라이브인데 전부 상준 형이랑 관련된 거잖아요. 내가 아니라 상준 형이 모습을 보여야 해요. 그런데 현수 형은 왜 영국에 있냐는데요?”

주로 상준이 이끌어 가고 현수가 대답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시우는 일부러 현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진짜 오랜만에 라디오에서 휴가받았거든요. 2주 휴가를 받았는데, 갑자기 상준이가 전화해서 영국에 집 샀다고 자랑하면서 놀러 오라길래. 마땅히 할 것도 없는 차에 놀러 왔습니다.”

“와, 형들. 진짜 슬프다. 이 연말연시, 가는 해 오는 해로 뜨거운 시즌에 둘이서 우울하게 뭐 했어요?”

“왜 우리가 우울했다고 생각해?”

시우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유리 볼에 들어 있는 두부를 장갑 낀 손으로 주무르던 상준이 정색하며 물었다.

“퍽이나 아름다웠겠어요. 다들 아시죠? 우리 상준 형, 뭐랄까 굉장히……. 팬분들은 알 거야, 분명.”

“재미없긴 하지.”

“내가 뭐요!”

굉장히 현실적으로 뼈 때리는 말만 골라 하는 상준을 어떤 말로 표현할지 고민하는 시우 대신 현수가 간단하게 그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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