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74화 (174/187)

외전 2. 13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시우는 에반이 건네는 벙거지를 받아 쓰면서 차고 안을 채우고 있는 같은 디자인, 같은 색의 차 네 대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가까이 다가와 마스크까지 직접 씌워 주면서 말하는 에반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에반이 보고 싶어서 무작정 나왔던 날.

그날 이후 둘은 신혼집에서 살고 있었다. 페이든은 아이보다 시우가 힘들 것이라 말했고, 그 말에 에반도 만류했지만, 시우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했다.

비록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같은 침대에서 잘 순 없어도 몇 걸음만 움직이면 에반을 볼 수 있었다.

둘의 거리가 열 걸음이 아홉 걸음, 여덟 걸음으로 줄어들고, 에반의 페로몬에 거부감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해 음식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운 집에서 에반이 출퇴근을 하고 그 집으로 꾸준히 페이든이 들락거리지만,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 시우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이 집에 꽂혀 있었다.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도 없고, 병원 진료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필요한 장비는 다 사겠다는 어이없는 말을 해 대는 에반을 말리는 건 시우의 몫이었다.

결혼식 이후로 거의 한 달을 두문불출하던 시우는 결혼 후 첫 외출이 병원행이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꾸준히 하려고 했던 브이로그 촬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사냐고 다들 자신만 보면 너희들 이야기부터 물어본다고,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상준 형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마음 돌리면 바로 주문…….”

기적처럼 찾아온 자두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입덧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엄마를 닮은 것인지 속이 비면 불편해 비스킷을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자연스럽게 집에서 음식을 하는 건 금지가 되었다. 며칠 전엔 물을 마시려 냉장고를 열던 에반에게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냉장고에서 나는 잡내가 속을 뒤집은 것이다. 그것만 그런가?

물에선 비린내가 가득하고, 세상의 모든 냄새가 자신을 괴롭혔다.

민초 맛 아이스크림을 시작으로 지난 시간 동안 시우가 먹은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영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먹고 싶다면 언제든 에반에게 말했다. 에반이 아니라면 집사님께 말했고, 그렇게 사 온 것들을 한 입 먹고 물릴지언정 먹고 싶은 건 다 먹었다.

그러다 오늘 새벽.

잠든 에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조심스럽게 침실을 빠져나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따스한 보리차에 비스킷을 먹던 중 갑자기 할머니 콩나물해장국이 먹고 싶었다. 먼동이 트는 걸 보면서 한 조각의 비스킷도 몇 번이나 나눠 먹고, 좋아하는 탄산이 아닌 보리차를 마시는 제 신세가 갑자기 처량하게 느껴졌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소맥에 치킨 신나게 뜯고, 다음 날 지끈거리는 두통과 쓰린 속을 부여잡은 채, 할머니에게 거한 욕을 들으며 먹었던 뜨끈한 콩나물해장국이 도화선이 되어 버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기적이었고, 에반과 자신을 닮은 아이라니 신비롭게까지 여겨졌다.

혼자 아기 얼굴도 그려 보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랄 니모들을 생각하며 웃기도 했다. 팬 사인회에서 받았던 많은 아기용품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거 다 어디 뒀더라? 어쨌거나 최대한 긍정적으로 지내던 시우였다.

할머니 콩나물해장국을 시작으로 여기서 구하기 힘든 것들이 중구난방으로 떠올랐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녹두전과 식혜, 환장하도록 매워 우유가 없으면 시도도 못 하는 불족발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아는 건 현재 페이든과 엄마, 집사님, 에반이 전부였다. 어제도 엄마와 통화를 했었다. 뭐든 먹고 싶은 건 다 이야기하고, 푹 쉬라고 제 걱정만 해 주던 엄마도 보고 싶다.

그렇게 시우는 저도 모르게 한 손엔 비스킷 다른 손엔 보리차가 든 머그잔을 들고 울어 버렸다.

‘코코.’

제가 없어서 깬 것인지, 원래 일어날 시간에 일어난 것인지. 어쨌거나 침실을 나온 에반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해장국도 불족발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에반일지도 모른다.

회사에 있는 중에도 문자 한 통에 거의 한 시간 이내로 원하는 음식들을 보내 주었고, 먹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날엔 평소 제가 좋아하던 것들을 잔뜩 사서 퇴근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제 옆에서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감정 기복으로 인한 투정을 죄다 받아 내고 있었다.

‘한국 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먼저 꺼낸 건 에반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정확한 상태를 아는 것이었다.

“힘들면 오후에 가도 돼.”

차 앞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던 시우는 제 안색을 살피며 말하는 에반의 손을 꾹 잡았다.

“지금 가. 오후에 간다고 파파라치가 안 붙어?”

차고를 나란히 빠져나간 네 대의 차는 세 번째 만난 사거리에서 흩어졌다. 시우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에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가 생각했던 신혼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저보다 더 초조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천하의 에반 루이스도 긴장하는 게 있어?”

“긴장 안 했어.”

“거짓말. 뭘 그렇게 걱정해. 이 정도는 누구나 겪는 거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 있지. 우리 에바니.”

슬쩍 말을 돌리는 에반에게 장난을 걸어도 쉽사리 그의 기분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랬기에 일부러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쓸었다.

“까분다.”

에반이 흔쾌히 동조해 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않았지만, 슬금슬금 허벅지를 만지던 제 손을 잡아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그의 행동에 시우는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늘 그렇듯 거의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알파, 오메가 센터로 들어간 시우는 여전히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오늘 왜 이렇게 굳어 있어.

그러고 보니 이 공간에 이러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게 옆에 앉아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문가에 기대서 있었지만 말이다.

제가 초음파 검사를 받는 것이 그때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조금 차가울 수 있어요.”

살짝 드러내 놓고 있는 편평한 시우의 복부에 묽은 젤을 바르고 기계를 대는 의사의 말에 시우의 시선이 절로 모니터로 향했다. 그리고 에반의 시선 역시 모니터에 닿아 있었다.

“여기 보여요?”

“…….”

뭐가 희뿌옇게 보이긴 하는데,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시우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심장 소리도 들어 볼게요.”

쿵쾅거리는 것처럼도 느껴지는 빠른 소리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에반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히트 사이클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모르신다고 하셔서. 지금 상태로 봐서는 7주 정도 될 것 같네요. 지금은 초기라서 측정하는 위치나 상황에 따라 오차가 조금 날 수 있거든요. 심박 수도 안정적이고 크기는 1cm 조금 넘어요. 다음번에 오시면 젤리 곰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상담은 자리 옮겨서 할게요.”

상담이라고 했지만, 에반과 시우는 어떤 말도 쉽사리 하지 못했다. 페로몬 분야에선 페이든이 최고 석학자였지만, 오메가의 임신과 출산 부분은 저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며 그가 소개해 준 의사는 중년의 남성분이셨다.

“놀란 표정이 가득한데, 누구보다 시우 씨 마음 내가 제일 잘 아니 걱정하지 말아요. 열성 오메가라서 모두 저도 아이 낳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이래 봬도 애가 셋입니다.”

“아니…… 그 입덧…….”

“죽겠죠? 진짜 딱 죽지 않을 만큼 하고 괜찮아지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몸무게 조금 줄긴 했네요. 저도 초기에 7kg까지 빠져 봐서.”

“네?”

“페이든 교수님께서 잘 챙겨 주셔서 아시겠지만,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영양제 꼭 챙겨 드셔야 해요. 특히 철분제, 그리고 혹시 모르니 제가 입덧 억제제도 처방해 드릴게요.”

“……그런데 제가 물도 제대로 못 삼켜서 약을 먹을 수가.”

에반의 눈치를 살짝 본 시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물비린내 때문에 생수는커녕 보리차 한 잔도 입술만 축이는 식으로 반나절에 한 컵 먹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렇게 상담을 끝내고 나온 뒤, 에반의 표정은 더욱 굳어 있었다.

일반인보다 힘든 것이 오메가의 임신이다. 그러니 한국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무섭게 장거리 이동은 위험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의사의 조언은 간단했다. 무리하지 말고 쉬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못 먹는다고 너무 겁내지 말고. 뭐든 먹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먹으라는 것이 전부였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 시우는 침묵을 고수하면서도 제 손을 놓지는 않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조수석 한쪽에 있는 작은 종이 백 안에는 오메가 임신과 관련된 안내 책자와 방금 찍은 자두의 초음파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에반.”

“응.”

내가 무조건 좋다고 하랬잖아.

시우는 지금 에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덜컥 겁이 났다.

“안 돼.”

“왜? 내게 제일 중요한 사람은 너야.”

“한 번만 더 그런 생각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너 안 볼 거야. 자두한테 그러지 마.”

“…….”

시우는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긴 한숨을 쉬며 깍지 낀 손을 더 세게 움켜쥐는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의사가 한 말 생각하지 마. 나도 자두도 괜찮을 거야. 너도 있으니까 잘할 수 있어.”

“코코. 네가 아닌 내가 힘든 거면 나도 이런 생각 안 해.”

“에반.”

“…….”

“에반 루이스.”

“왜?”

“네가 힘들면 좋겠어? 그래? 입덧 딱 하루만 네가 해 봐라. 그런 말 나오나. 오늘부터 그 생각 바꿔. 우리 자두 열심히 크고 있으니까, 응원이나 하라고. 알겠어? 그리고 할머니 콩나물해장국이랑 씨앗호떡, 불족발, 거기에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녹두전이랑 식혜 세트. 뭐 말하는지 알지? 내가 좋아하는 거. 술빵이랑…….”

계속해서 딴생각을 하는 에반을 위해 시우는 제가 먹고 싶은 것들을 쫙 늘어놓았다. 내가 한국에 갈 수 없다고? 에반 루이스, 그럼 네가 제일 잘하는 거 지금 해. 당장 한국에 연락해서 보내 달라고 해. 과연 내가 다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경이라도 하게.

그리고 다음 날.

시우는 한국에서 건너온 엄청난 음식들을 앞에 두고 욕실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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