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0
“뭐가 됐든, 무조건 좋다고 해.”
또 시작된 시우의 뜬금없는 말을 들으면서 에반은 이미 갈무리하고 있던 페로몬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까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조금 전 어머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나 죽었다 생각하고 살면 된다고 하셨다.
어색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인 에반을 확인한 시우는 지금껏 손끝으로 꼭 잡고 있던 코끝을 놓았다. 에반과 가까이 있으면 속이 좋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를 막았었다. 한 발만 더 다가가면 몸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지금은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됐어.”
여전히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에반의 가슴을 두 손으로 팡팡 치며 숨을 들이마시던 시우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진짜 어딘가 문제가 생겨도 크게 생긴 것이 분명했다.
다시금 욕실로 뛰어든 시우는 차가운 물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볼을 꿀렁거리며 입 안에서 물을 가지고 놀던 시우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까치집을 지은 머리와 붉어진 얼굴로 입 안에서 물을 옮길 때마다 볼이 불룩거렸다.
엄마의 말이 사실일까? 다시금 그의 손이 자신의 아랫배에 닿았다.
힘들 거라고 했잖아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른다고 조심했지만 이미 들은 말이 있었기에 피임을 하지 않으면서도 딱히 생각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시우의 건강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알아본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매번 일반적이지 않으며 정확한 학술적 자료가 없다는 말만 들어 왔다. 오메가들은 짧으면 한 달 보통은 두 달, 거의 50일을 주기로 히트 사이클이 발생한다고 했다. 하지만 시우는 1년에 세 번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이제 주치의가 된 페이든은 각인의 영향과 항상 붙어 있는 데다 서로의 페로몬에 노출되어 있어서 가볍게 지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정기적으로 페로몬 검사를 받을 때마다 시우의 수치는 열성 오메가보다 낮았다. 그래서 임신은 힘들 것이라고 했었다.
“코코. 괜찮아졌으면 1분 정도 있다가 나와 줄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시우는 에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나오라는 것도 아니고 1분 있다가 나오라는 건 또 무슨 이유야? 입 안에서 굴리고 있던 물을 뱉고 양치를 다시 하고 나간 시우를 기다리는 이는 에반이 아닌 페이든이었다.
“결혼 축하해요. 어제도 말했지만 정신없어서 제대로 기억도 안 나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페이든과 마주 앉은 시우는 먼저 말을 꺼내는 그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초코우유를 마시며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지금도 딱히 실감 나지도 않고요.”
“채혈부터 할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만. 선 채혈, 후 담화인가요?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페이든에게 순순히 팔을 내밀며 시우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결혼 소식 알려지고 나면 정신없고 그럴 텐데. 앞으로 뭐 하면서 지낼 거에요?”
그의 질문에 브이로그 쪽으로 가 볼까 한다는 말을 꺼냈다. 에반과의 결혼 생활이라든가 한국과 다른 영국 생활을 찍어 보는 것이 어떻냐는 태훈의 말에 에반과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었다.
연예계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팬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제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은 브이로그가 유일했다. 지난 1년간 띄엄띄엄했던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영상 편집을 제대로 배우려고 전문가를 섭외해 놓았다.
채혈을 끝낸 페이든이 테스트에 피를 떨어뜨리는 것을 지켜보며 시우는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요. 팬분들이 많이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어떻게 불편한지 말해 줄래요?”
청진 후, 혈압을 체크한 페이든이 건강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자 시우의 얼굴이 괜스레 붉어졌다.
아침부터 민망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집을 나가면서 제 엉덩이를 두드리며 대견하다는 칭찬을 건넨 엄마부터, 뭐랄까 이미 뭘 알고 있는 것 같은 에반의 행동과 말투를 보건대 이미 그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페이든이 온 이유도 그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딱히 불편한 곳은 없고요. 가끔 속이 메슥거리고 역한 느낌에 구토하고 싶긴 한데, 그것도 계속 그러는 게 아니라 아주 잠깐씩 그러거든요.”
“에반과 있을 때요?”
“그럴 때마다 에반이 옆에 있긴 했어요.”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시우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에반이는 또 어디 간 거야? 페이든을 부른 것도 그일 텐데. 병원을 가든 페이든이 오든 제 건강 상태를 예민하게 체크하는 이는 자신이 아닌 에반이었다.
솔직히 방금 혈압을 측정했지만, 시우는 측정치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몇 가지 테스트를 할 텐데, 불편하면 말해요.”
분명 페이든은 테스트를 한다고 했지만, 그가 하는 일은 작은 병들을 열었다가 닫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다 테스트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 비스킷을 집어 먹으며 창가로 걸어간 시우의 시선이 드넓은 정원으로 향했다.
에반은 러쉬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공을 멀리 던질 때마다 러쉬는 신이 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일부러 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자명한 행동에 시우의 입술이 삐죽이 나왔다. 햇볕을 받아 따뜻한 창에 이마를 대고 러쉬와 에반을 보던 시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하관을 가렸다.
고개를 돌려 페이든을 바라보자 그는 역시나 작은 병들의 뚜껑을 여닫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축하한다는 말부터 할게요.”
그리고 시우는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페이든이 하는 말을 넋을 놓고 들었다. 한쪽 귀로 들어와 바로 다른 쪽 귀로 흘러 나가는 것 같았지만, 꼭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시우 씨. 이해했죠?”
이해라고 하면 제 혈액으로 테스트를 했는데 혈액 속에 무슨 호르몬인지 뭔지 하는 것의 수치가 평균치보다 높은 것으로 보아 임신이라는 걸 말하신 거요? 수치가 그리 많이 높지는 않은지라 초음파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포함이겠죠?
2주 정도는 지나야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으니 그동안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는데, 문제는 결혼 발표 후 난리가 날 것 같으니 영화를 보거나 책 보면서 조용히 지내라는 말도 듣긴 했습니다. 그사이라도 궁금하면 언제든 피검사를 통해 수치 변화를 체크해 볼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아닐 수도 있죠?”
“착상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하면 그렇겠죠. 한데 지금 시우 씨 반응을 보아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음…… 어제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래서 두 분은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페이든의 말을 듣는 시우의 표정이 갈수록 묘하게 바뀌었다. 아니. 아직 세포분열 중이라면서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페로몬 이야기이십니까? 그렇게 여닫고 있던 병들에 페로몬이 담겨 있었는데, 오메가 페로몬엔 아무렇지 않다가 알파 페로몬에만 제가 불편해하는 게 뭐 어때서요.
페이든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시우의 몸은 창가로 기울어졌다. 떳떳하게 함께 있으려고 결혼했는데, 떨어져 있으란다.
떨어져 있기 싫어서 연예인 포기했는데. 강제로 이별하게 생긴 것이다. 아직은 세포의 모습을 한 아기가 알파일 것이란다. 말 그대로 작디작은 세포인 알파에게 다른 알파의 강한 페로몬은 독이기에 생존 본능으로 자신을 품은 오메가가 알파와 멀어지게 하려는 반응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요?”
“이것 역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넌 기존 자료에 해당이 안 됨. 그러니 지켜봐야 앎. 이 말이시네요.
“아. 그런데 저 코 막고 에반이 옆에 갔을 때는 괜찮았…….”
시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페이든의 눈빛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자리 잡고 난 후엔 오히려 강한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하니 더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설명에도 시우는 쉬이 웃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창가에 서서 창문만 열고 손을 흔들며 에반과 인사를 하는 시우의 입술이 불안정하게 삐죽거렸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한번 안아 주고 가지. 자신과 이야기를 끝낸 페이든은 따로 에반을 만났고, 그길로 에반이 짐을 싸서 고성을 떠나는 것이었다.
“코코.”
들고 있는 휴대전화 너머 에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은 폰은 꺼 놓은 상태인지라, 페이든의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이 상황이라니.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새 휴대전화 바로 보내 줄게. 그리고 월요일에 기사 나면 정신없으니까, 그거 내가 다 수습하려고 잠시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 먹고 싶은 거 다 말하고. 네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집사님만 오시니까. 그런데 괜찮아?”
무슨 말이니? 똑똑한 에반이도 두서없는 말을 할 수 있구나.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3층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시우는 그냥 손만 살짝 흔들었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에반의 기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기 싫어 죽겠지? 나도 보내기 싫어 죽겠어.
계속해서 사랑하고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을 하다가 거기 우리 쓰는 메인 룸은 추울 수 있으니 남쪽 세 번째 방을 쓰라고 하더니, 뜬금없이 집사님 편으로 전기장판을 보낸다고 했다가 그건 몸에 안 좋으니 온수 매트가 낫겠다고 이야기하는 에반의 말을 시우는 한 단어로 끊었다.
“자두.”
“러쉬도 데리고……. 응?”
시우 편히 쉬라고 러쉬도 데리고 간다는 말을 하던 에반이 뜬금없는 시우의 말에 반문하자 시우는 소리 내며 환하게 웃었다.
“아기. 태명 자두 하자. 난 그러면 좋겠는데, 넌?”
30분 넘게 사랑해, 보고 싶어, 너밖에 없고 몸조심하고, 손 뽀뽀에 허공 뽀뽀까지 날려 대는 닭살 커플의 이별을 지켜보던 페이든은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다 식은 커피 잔을 집었다.
오늘 안에 이 작별 인사가 끝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