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6
천천히 걸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시우는 늘어뜨리고 있던 손등을 건드리는 에반의 행동에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그가 다가온 만큼 손을 움직이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다 되레 손을 먼저 잡았다.
처음엔 그냥 마주 잡았지만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 손깍지를 낀 시우는 슬쩍 고개를 틀어 제 옆에서 나란히 걷는 중인 에반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가 그를 볼 것을 알았던 것처럼 때맞춰 고개를 틀어 준 에반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또 뭘 봐야 해?”
깍지 낀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말하는 그를 향해 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딱히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이렇게 손깍지 끼고 여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이 알파가 내 알파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어제 서류에 도장도 찍었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시우가 할 수 있는 건 손깍지를 끼는 것이 전부였다.
활동할 때도, 그 뒤로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지내면서도 사람들 많은 곳에서 에반과 손을 잡거나 가깝게 붙어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스치듯 잡거나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를 끌기 위해 팔을 잡고 당기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손을 잡는 행위가 이렇게나 간질거리고 어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서재 진짜 내 마음대로 해도 돼?”
“응. 거긴 네 공간이니까.”
“까맣게 만들어도?”
“귀신 집 만들어도 괜찮아.”
깍지 낀 손을 흔들며 둘은 쇼핑 거리를 걸었다.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 멈췄고, 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더 알고 싶으면 매장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그들의 앞뒤로 촬영 팀이 붙었고, 촬영 팀 주위로 경호원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결혼 준비나 일상생활의 촬영 콘셉트로 에반이 선택한 것은 쇼핑이었다.
갑자기 촬영 팀을 대동하고 나온 그들을 보고 놀란 파파라치들이 따라붙고, 갑자기 평일 낮 시간 쇼핑몰에 나타난 그들을 본 사람들의 이목이 몰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무언가를 촬영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묻혔다. 신혼집을 꾸미기 위해 쇼핑을 하고, 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손을 잡거나 에반이 에스코트하듯 시우의 허리에 손을 올려도 촬영 팀과 함께하면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촬영. 그 사실 하나면 어떤 행동을 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해체를 하지 않은 건 멤버들과 상의 끝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몇 년간 같이 동고동락하며 지낸 이들이다. 각자 제가 가장 잘하는 분야로 나아가더라도 그들이 오션이었다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각기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되, 굳이 해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바랐다.
다시 다섯 명이 한 무대에 서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오션이었다.
그렇게 내린 결론마저 지금 이 상황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식기는 예쁘기도 하고 좋은데 무겁더라.”
시우는 에반이 집는 식기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 무거웠어?”
한 손으로 커다란 웍을 들고 휙휙 젓던 에반의 말에 시우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있는 거라고는 힘밖에 없는 놈.
“너 쓰려면 사고. 참, 인테리어 이번 주말까지 된다고 했지?”
“어떻게든 일요일까지 끝내 달라고 말하긴 했어.”
“그러게 뭘 그렇게 뜯어고치는 거야?”
아담한 집에서 알콩달콩 살려고 했다. 한데 집을 계약하러 가려던 시우는 회의까지 미뤄 버리고 따라나선 에반을 달고 다녀야만 했다.
‘……메인 침실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뭐가 작아. 그리고 잠만 자는 침실이 딱히 클 이유가 없잖아.’
‘드레스 룸이 작아. 너 그 옷들 다 어떻게 하려고?’
‘…….’
‘부엌이 좀 더 크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
따라다니던 에반이 한마디씩 꺼낼 때마다 시우의 입술이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혼자 집을 보러 다닐 때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에반이 콕콕 꼬집은 것이다. 현재 에반과 지내던 집에서는 못 느끼던 점이었다.
큰 키와 체격을 가진 에반이 좁은 부엌을 돌아다니는 것을 본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국의 집이 다 넓고 크고 높았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에반도 에반이지만 루이스가 알파들이 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 보니 그들이 머무는 곳의 가구나 물건들은 다 그들에게 맞게 제작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 에반과 다니다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큰 집을 사고 말았다. 예상가보다 훨씬 웃도는 가격의 집을 계약하게 된 시우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계약서에 시우 제 이름이 적히고, 최종 금액까지 본 시우의 입꼬리가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갔다. 오션 활동 하면서 열심히 모아 놓은 돈 여기 다 쓰겠네.
여기서 인테리어도 좀 하고, 가구도 채우고 하려면.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약서를 자필로 채워 가던 시우의 눈에 안절부절못하는 에반이 들어왔다.
푹신한 소파에 편히 앉아 다리를 꼬고는 제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굉장히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세였지만, 시우는 그에게서 폴폴 느껴지는 불만 가득한 페로몬에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가 원하는 조건까지 넣어서 시우 기준으로 훨씬 큰 집을 구매하는 중이었다. 집에 왜 수영장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긴 고성에 있던 넓은 연못을 떠올리니 지금 이 집에 딸려 있는 수영장이 참으로 소박해 보였다.
‘왜?’
마지막으로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려던 시우는 자신의 손을 턱 잡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내가 집 사면 안 될까?’
‘어. 안 돼.’
‘그럼. 이 집도 사고 처음에 본 거기, 네가 본 그 집도 사 줄게.’
‘이봐요. 에반 루이스.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거 내 집이야. 내가 번 돈으로 내 이름 당당히 달고 사는 내 집. 넌 여기서 같이 사는 동거인이자 반려인이고. 네가 집을 사 주는 것도 좋은데, 난 내가 산 내 집에서 우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방금 에반에게 말한 대로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의 공간에 제가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제 공간에 그가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실랑이가 길어지기 전에 시우는 서둘러 마지막 서명란에 멋들어지게 제 서명을 넣었다.
‘그럼. 인테리어는 내가 해도 돼?’
‘……. 뭐. 그러든지.’
제가 작성한 서류를 중개인이 확인하는 것을 기다리며 시우는 별것 아닌 일이란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었다. 그렇게 집을 계약하고 시우는 에반과 조용한 곳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시간 뒤, 시우는 제가 산 집의 거실에서 에반과 함께 햄버거에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아뇨. 부엌이 더 컸으면 좋겠으니까, 그 옆에 있는 다용도실까지 터 버리죠. 창도 크게 넣어서 뒷마당이 잘 보이면 좋겠고요.’
이 집의 설계도를 들고 나타난 인테리어 업자와 바로 이야기하게 될 줄이야.
‘코코, 침실 쪽에 드레스 룸 바로 이을 거야? 아니면 실내복만 둘 작은 드레스 룸을 침실에 두고 메인 옷들은 다른 드레스 룸을 만들까?’
이럴 거면 그냥 집을 새로 짓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그럴 것 같아서. 어쨌거나 골조만 빼고 거의 다 바꾼다고 생각할 만한, 어쩌면 제가 집을 구매하면서 쓴 돈보다 인테리어 비용이 더 많이 들 것 같은 신혼집은 지금도 열심히 공사 중이었다.
“우리 예복도 정해야 하지?”
시우는 에반이 자신의 입가를 건들면서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이런 걸 찍어서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촬영 팀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 돌아다녔지만 실제로 그들이 구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이건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자마자 시우는 엄청난 포트폴리오를 들고 온 인테리어 디자이너 몇 명과 꽤 긴 회의를 해야만 했다.
서재 외에는 모두 네 마음대로, 라는 말을 한 에반은 모든 결정을 시우에게 미뤘기에 그날 밤 시우는 에반과 거하게 싸우기도 했다.
‘야! 같이 사는 집이잖아.’
‘난 너만 있으면 돼.’
‘... 쫓아내 줘?’
‘서재만 내 마음대로 하게 해 줘. 그러면 침실 벽지로 신문지를 쓴다고 해도 난 괜찮아.’
‘……침대 빼 버린다.’
침대 생활이 편하긴 하지만 회귀하며 고생을 많이 해 온 시우는 맨바닥에서도 잘 잤다. 반면 에반은 맨바닥에 양반다리로 앉는 것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서서 하면 더 깊이 들어가서 좋다더니, 그럼 오늘은…….’
‘이 미친놈아!’
인테리어 이야기 하려다 또 엉뚱한 곳으로 빠져 버리는 에반 때문에 시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자신의 역정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에반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에 도움을 주었고, 그날 밤 시우는 벽과 에반의 사이에 끼인 채 엉엉 울어야만 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팀에선 작은 소품까지도 모두 제안했기에 딱히 시우와 에반이 살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 준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댔으니 이렇게 촬영을 하는 것이고, 에반은 이걸 핑계로 회사에 당당히 휴가계까진 낸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휴가 쓰고 뭐 쓰고 할 거면 차라리 신혼여행을 가지 그랬니?
“이거 먹고는 예복 보러 갈까? 아니면 해야 할 것 있어?”
시우는 에반이 제 입가를 건들든 제 앞으로 뭘 밀어 놓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휴대전화를 한 손으로 조작했다.
“……결혼식 콘셉트 잡아 달래. 어제 포트폴리오 잔뜩 왔는데 귀찮아서 확인 안 했거든. 그거 결혼식 콘셉트인데 왜 컨펌 안 해 주냐고.”
한 달 만에 결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회귀는 수없이 했는데 연애도 결혼도 처음이라서 말이야.
시우는 웨딩 팀에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찍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라고 왔는데?”
시우는 휴대전화를 든 제 손을 에반이 감싸며 화면을 같이 보려 하기에 그도 보기 편하도록 손목을 살짝 꺾어 주었다.
“포인트 색 말이야. 핑크도 좋은데 가을이니까 감색이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뭐든 다 좋…….”
역시나 난 네가 좋은 건 뭐든 좋다고 말하려던 에반은 시우의 차가운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외전 2-7
“너희 진짜 뭐냐?”
시우는 제 옆에 앉자마자 들고 있던 카탈로그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이는 찬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표정은 싹 지우고 태연한 표정으로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정리해 꼬고 있는 자신의 다리 위에 단정하게 올렸다.
“뭐가요.”
“뭐가요? 뭐가요? 지금 그 말이 나오냐? 와. 내가 오늘 아침에 그 이야기 듣고 어이가 없어서. 진짜.”
패션쇼가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와 소음들은 시우와 찬의 대화를 적절하게 가려 주었다.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어요?”
시우는 제가 한 말이 고대로 말투가 싹 바뀌어 의문형으로 다가오자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명한 디자이너의 패션쇼 행사장이었기에 주위엔 기자들과 셀럽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있는지라 시우는 지금의 대화도 대화지만 주위 상황에도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아마 저 많은 카메라 중 한두 대는 이곳을 향할 것이 뻔했다.
“설마 형 진짜 몰랐다고 말하는 거예요? 갑자기 예찬이 영국에서 열리는 패션쇼 메인 모델로 발탁되고, 형이 왜 CF를 영국에서 찍는지. 거기다 상준 형은 작업한다고 몇 주 전부터 영국에서 지내고 있었잖아요.”
시우 역시 찬이 하는 것처럼 살짝 그에게로 몸을 기울이고는 카탈로그로 얼굴을 가리며 빠르게 말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냐? 네 입으로 말해 봐. 너희 진짜 결혼해?”
“네. 형이 들은 대로 내일 저녁이요. 형이랑 예찬이 한국 가는 비행기 일요일 낮이라면서요. 상준 형은 한 달 정도 더 지내면서 곡 작업 마무리 짓는대요.”
“난 진짜 모르겠다. 그럼. 이 일정들이 다 계획된 거라고? 자베는 알고?”
예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이 일정들은 태훈 형한테 부탁한 거죠. 오션 멤버 스케줄 조절해서 시기 맞춰서 영국에 있게 해 달라고요. 갑자기 전세기가 뜬다거나 멤버들이 동시에 영국으로 들어오고 우리 부모님까지 영국으로 같은 시기에 온다면 너무 티 나잖아요. 그리고 예찬이는 아직 몰라요. 패션쇼 끝나고 말해 줘야지, 지금 알면 쟤 난리 나서 무대 망칠지도 몰라.”
소곤거리며 말한 시우가 옷매무새를 만지며 바로 앉아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찬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우와 에반이 평범한 관계가 아닌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놓고 하는 비밀 연애였으니까. 그리고 제가 나서서 그들에게 왈가왈부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알파와 베타가 결혼이라니.
일반인들이 해도 말이 많은 케이스인데 이들이 한단다. 이들도 이들이지만 결혼 소식이 알려진 후 자신을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기자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하얘졌다.
이들에게서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최측근인 자신과 예찬, 상준에게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알아내려고 난리일 것이다.
“너네가 결혼한다는데 왜 내 머릿속이 이리 복잡하냐. 그래서 부모님 지금 어디 계셔?”
“일주일 전부터 유럽 여행 중이시죠. 지금은 프랑스에 계시고요. 내일 낮에 영국으로 오실 거예요. 우리 누나 영국에서 유학 중인 건 알죠?”
“무섭다. 무서워. 이거 다 에반이 생각?”
“걔가 좀 철두철미하잖아요. 아. 그리고 저기 4시 방향은 보지 마요.”
“응? 4시? 거긴 또 왜.”
“촬영 중.”
“뭐?”
“아~ 진짜 이 형이 쳐다보지 말라니까. 아무래도 결혼 소식 나가면 난리 날 거니까, 미리 촬영하고 있어요. 우리 결혼식 끝나고 언론에 밝혀질 때 그때 맞춰서 소속사 홈피에 영상 뜰 거니 너무 걱정 마요.”
시우는 그쪽을 보려는 찬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와……. 와, 진짜 할 말이 없다. 결혼식까지 방송용이냐?”
“아뇨. 결혼식은 비공개죠. 그냥 영국에서 나랑 에반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런 거 촬영하는 거예요. 우리 ‘Ocean Story’ 촬영 팀이라 걱정 안 해도 돼요.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 아무도 눈치 못 채고 있잖아요. 진짜 지긋지긋한 영국 파파라치들도 모르는데, 뭐.”
“둘 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래서 좋냐? 좋아?”
“음……. 글쎄요. 서류상으로 가족 된 지는 좀 돼서…….”
얼빠진 듯한 찬의 표정에 시우는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며 그를 놀렸다. 여기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는 말에 따로도 할 말이 없다며 찬을 더 놀렸다.
“그나저나 형이랑 예찬이는 잘 지내고 있죠?”
“아니.”
패션쇼가 시작되고 모델들이 무대 위를 누비는 것을 지켜보다 한마디 건넨 시우는 예상과 다른 대답이 들려오자 얼른 고개를 틀어 찬을 바라보았다.
“에?”
“네가 질문한 거 그냥 잘 지내냐는 뜻 아니잖아. 너 때문에 더 난리 나게 생겼으니까, 묻지 마.”
시우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랩 하듯 작고 빠르게 속삭이는 찬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서 앞을 보라는 듯 자신을 툭 건드리는 찬의 손길에 다시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우는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페로몬이 느껴지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에반 역시 이곳에 오기로 한 것이다.
“늦어서 미안. 형, 잘 지냈어요.”
예찬의 패션쇼장에 얼굴을 내비침으로써 오션 멤버들이 잘 지내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예찬의 패션쇼장에 모습을 드러낸 에반과 시우, 찬에 관한 내용이 짧은 기사로 나갈 것이다. 에반이 나타나자 이쪽을 향해 플래시들이 빠르게 터졌다. 몸을 낮춘 에반은 찬과 간단히 악수를 나누고 시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코코는 오늘도 이쁘네.”
찬과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더니 자신의 턱을 톡 건드리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일부러 과장되게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예뻤거든. 오늘도 회의가 늦어진 거야?”
시우는 제 말에 자리에 앉으려던 에반의 표정이 변하자 살짝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시우보다 에반이 빨리 움직였고, 이번에는 턱을 건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제가 피하지 못하게 턱을 살짝 잡은 에반의 입술이 기어이 시우의 입술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고,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이 별일 아니라는 듯 에반은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누구 분부대로 내일 일정을 싹 빼다 보니 어쩔 수 없잖아.”
아직은 아니라고! 내적 비명을 지르는 시우와 다르게 에반은 시우의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하며, 시우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슬쩍 빼 갔다.
“둘이 작작 해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죄로 에반이 벌이는 만행을 똑똑히 본 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심란하다, 심란해.
복잡한 제 머릿속을 더 엉키게 만들 생각인지, 타이밍 좋게 예찬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습생 시절 막내로 쫄쫄 따라다니던 어린 예찬과 지금 무대에 있는 남자가 겹쳐 보였다. 이렇게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슈트를 갖춰 입은 예찬에게 시선을 둔 찬은 의자에 몸을 더 깊게 묻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 건데요. 난 아무 문제 없는데 형에겐 왜 모든 게 문제예요?’
‘문제라는 것이 아니잖아. 우리 서로 생활 패턴도 다르고 하니까.’
‘문제가 아니면 뭔데? 또 끝낼 준비 중이잖아. 잘 지내다가 네가 이럴 때마다 내가 미치는 거 몰라? 이번엔 무슨 핑계 댈 건데? 처음엔 어리다고 그러고. 다음엔 형질로 한바탕했고.’
‘강예찬!’
‘같이 있다간 내가 또 미쳐서 무슨 짓 할지 몰라서 나가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이번엔 네가 와. 잘 생각해 보고 네가 결정하라고. 매번 내가 매달리고 끌려다니고 해서 내가 우기고 우겨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도망가든 회피하든 다 네 마음대로 해.’
찬이 꽉 잡고 있던 손목이 아팠지만 말하지 못했다. 같이한 시간이 길었지만 그렇게 차가운 눈도 처음이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능글거리며 넘어갔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늘 그렇듯 분위기를 풀려고 페로몬으로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겠지. 버릇없이 반말로 찍찍 경고성 멘트를 날리던 예찬은 침착했다. 차가운 눈빛과 얼어붙은 얼굴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끝낸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가 버렸다.
그게 2주 전 일이고 그 뒤로 예찬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같이 살던 집을 나간 예찬은 부모님 댁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매니저를 통해 알아냈다.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틈만 나면 전화를 하던 예찬은 정말 그 모든 연락을 끊어 버렸다.
겹치는 일정이 없다 보니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 영국 촬영이 잡히고, 예찬의 패션쇼가 같은 시기에 있어서 그곳에 들른다는 스케줄을 들었다. 분명 예찬도 알 것이다. 제가 이곳에 오는 것을.
하지만 역시나 예찬에게선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찬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예찬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 스무 살 되자마자 술부터 마시고 싶다고 방방 뛰던 놈이다. 제 주량도 모르고 신나서 덤벼들었다가 고주망태가 된 놈을 클럽에서 부축해서 끌고 나온 것이 떠올랐다.
늘 내려다봤는데 어느 날 보니 눈높이가 맞았다. 그랬는데 이제는 제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둘이 술을 마셨던 날 어쩌다 보니 입을 맞췄다. 어린놈의 취기라 여겼다. 스태프와 멤버 외엔 타인들을 쉽게 만날 수 없는 환경 때문이라 생각했다.
잠시 그러다 말겠거니 했고, 제가 예찬의 장단에 맞춰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밀어내고 거부해도 변죽 좋게 웃었다.
잘난 놈이 잘난 얼굴 들이밀면서 저 좋다고 난리인데, 어떻게 안 넘어가나.
울고불고 형밖에 없다고 우는데 어찌 매정하게 쳐 낸단 말인가.
멤버로 뒤섞여 지낼 때는 무시했던 것들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되니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떨어져 지내면 예찬이도 다른 것들이 보일 테고, 그러면 지금 우리들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같이 살던 공간을 분리하자고 했다.
다른 일에는 둔한 것 같던 놈이 기가 막히게 제가 품은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았다.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더 모질게 밀어붙였을 텐데. 차갑던 예찬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예찬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갑자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반짝이던 눈동자 대신 차갑고 무심한 눈빛이 제 가슴을 꿰뚫었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일이 없던 예찬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되든 내일은 예찬과 마주해야 했다. 뒤늦게 고개를 튼 찬은 뭐가 그리 좋은지 머리를 마주 대고 카탈로그를 보면서 쑥덕거리는 둘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겠다.”
이 커플에게 내일이 새로운 날의 시작인 것처럼 제 인생에도 내일은 꽤 중요한 날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