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4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시우는 손을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었다. 굳이 이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갑게 식은 자리를 확인한 그의 입에선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거운 몸을 굴려 에반의 자리로 옮겨 갔다.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킹사이즈 침대에서 조금 옆으로 이동한 것만으로도 온몸이 뻐근했다. 에반의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진하게 배어 있는 그의 페로몬을 느끼다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었다. 그리고 현재 시각이 오후 3시 45분인 것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연애 초기도 아니고, 히트나 러트도 아닌데 이럴 수도 있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에반의 페로몬에 전 상태로 말하기도 민망한 곳이 욱신거렸다. 연한 눈가의 피부가 따가운 건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너머로 먼동이 튼 것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시우의 눈엔 무겁게 드리운 암막 커튼이 보였다.
에반이 나가기 전에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고 볼에 입 맞추면서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도 않아 한 손을 아랫배에 올린 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시우의 입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진짜…… 에반 루이스.”
순식간에 볼과 귀가 붉게 달아오른 시우는 덮고 있던 이불을 퍽, 하니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갑자기 거칠게 움직인 시우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난밤 그렇게 에반이 자신을 몰아붙인 이유가 겨우 그것 때문이라고?
‘결혼. 언제부터 생각한 거야? 물을 때마다 늘 다음에, 언젠가 이런 식으로 말했잖아.’
‘결혼 생각이야 늘 했었지.’
웬만해선 몸에 무리가 간다며 노팅을 하지 않던 에반이었지만, 처음부터 격하게 시작했던 관계는 결국 노팅으로 이어졌다. 몸속 깊이 그를 가득 품은 채 잠시 숨을 고르며 나눴던 대화가 적당히 끝날 관계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사귀는 사이라면 누구나 결혼을 생각하는 거 아닌가? 사귄 기간이 길든 짧든 연인과의 먼 미래는 누구나 그리기 마련이었다. 그땐 그리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를 가득 품고 살을 맞대고 입술을 맞추면서도 가끔 제가 진짜 에반과 이런 관계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던 탓이었다.
곤히 잠든 모습이나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것같이 멋진 슈트를 갖춰 입고 출근하는 에반을 배웅하다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계속된 회귀 속에서 긴 시간 에반은 제겐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람 혼란스럽게 계속 자두를 주고 자신을 챙기는 그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다 문득 설마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얼른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던 시간이 떠올랐었다.
‘늘이라는 게 언제부터야?’
‘음……. ‘Journey’ 촬영 끝나고 돌아온 이후, 네가 나 자두 줄 때쯤?’
등을 쓰다듬고 볼과 턱 어깨 등 드러나 있는 곳곳에 입을 맞추며 질문을 하는 에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시우는 과거의 이야기를 끌어왔다.
‘뭐? 회귀 전?’
제 목선을 꾹 깨물고는 놀란 듯 시선을 맞추는 그를 보며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읏. 잠깐만. 왜…… 왜 더 커지는 건데……’
그래서 다시 시작된 관계가 새벽까지 이어졌고, 노팅이 몇 번 이루어졌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쨌거나 솔직한 것이 죄였나 보다.
앙큼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왜 한 번도 표현하지 않고, 제가 결혼 이야기를 할 때마다 피했냐며 더욱더 몰아붙이던 에반이 떠오르니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같이 늙어 가는데, 왜 갈수록 자신은 체력이 떨어지고, 에반은 더 좋아지는 것 같은지.
[시우야. 방송 하나 하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자른 건 소속사 대표 태훈의 메시지였다.
* * *
은은하게 노을이 지는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에반과 시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헤벌리고 있는 스태프들을 바라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반에게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를 하고 난 다음 날 받은 소속사 대표인 태훈의 메시지에 시우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바로 둘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공식적으로 해체하지 않은 오션 멤버인 둘이었기에 그들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이었다. 물론 그들의 결혼식에도 와야 하고.
갑작스러운 소식에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온 태훈의 대답에 시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었다. 축하한다는 말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좀 놀란다거나 상황 설명을 요구할 줄 알았던 그는 참으로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럼 그걸 촬영하지, 뭐.’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의 패널로 자리가 있는데, 해 보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는 태훈은 그 자리에서 바로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어 버렸다.
‘Ocean Story’ 촬영팀과 함께 에반과 시우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방송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아예 다른 길을 가는 에반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시우를 둘러싼 루머는 계속해서 생겨났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거기다 지금껏 시우가 실수로 라이브로 터트린 사건들은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그렇게 묻어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한 줄 기사로 둘의 결혼 소식을 접하게 될 니모들을 생각해서라도 솔직한 모습을 찍자는 것이었다.
소속사 사이트에만 풀릴 것이며, 브이로그처럼 짧게라도 결혼 준비 과정이라든지 아니면 둘의 실제 모습을 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시우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촬영을 결정하자마자 영국으로 넘어온 촬영팀은 약 한 달간 영국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촬영의 시작은 간단한 인터뷰였다.
몇 년을 함께 손발을 맞춰 온 ‘Ocean Story’ 촬영팀이었기에 서로 안부를 묻고 편안한 대화를 하다가 가벼운 주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Q.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려 주세요.
에 :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코 : 그냥 편하게 놀았어요. 브이로그 찍어서 제가 직접 편집해서 올리기도 했었죠?
Q. 고백은 누가 먼저 하셨나요?
에 : 저죠.
코 : 그래도 마지막 프러포즈는 내가 했다, 뭐!
피디의 질문에 둘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대답했다. 사전에 미리 합의한 질문지대로 진행하는 인터뷰인 데다 처음 기획대로 공영방송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소속사 사이트에만 풀릴 것이기에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Q. 어. 이건 질문지에 없던 건데. 마지막 프러포즈 언제 하셨어요?
코 : 일주일 전이요!
서로 알 만큼 알고 그들의 썸부터 연애까지 본의 아니게 다 지켜본 촬영팀이었기에 그때그때 질문이 추가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저 썸이나 팬 서비스 같은 브로맨스로 끝날 줄 알았던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나 발전해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촬영을 위해 급하게 준비하고 영국으로 오면서도 믿지 못했고, 지금 이렇게 둘을 보고 질문을 하면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정말 해맑은 얼굴과 밝은 목소리로 일주일 전에 마지막 프러포즈를 했다는 시우의 대답에 에반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대로 청바지에 헐렁한 후드 티셔츠를 입은 시우와 슬랙스에 니트를 입은 에반은 투덕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Q. 일주일 전이요? 결혼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그럼 시우 씨, 어떻게 프러포즈하셨어요?
코 : 비밀…….
에 : 코코가 이 집에 서재 만들어 준다고 장가오라고 했어요.
코 : 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에 : 맞잖아. 프러포즈하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코 : 아니야! 했어! 했잖아! 했어요!
비밀이라고 얼버무리는 시우와 다르게 싱글거리며 에반이 대답하자 발끈한 시우가 에반의 허벅지를 툭 때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계속 말을 이으려는 에반의 입을 손으로 떡하니 막은 시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둘의 만담 같은 대화는 둘째 치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촬영진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시우가 손으로 급하게 입을 막자, 오히려 시우의 손을 감싸 쥔 에반의 얼굴엔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시우의 손을 슬쩍 떼어 내는 에반은 카메라가 아닌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 : 언제?
코 : 그때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키스해서 못 했잖아. 그리고 침대에서 내가 몇 번이나…….
에 :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방금 촬영을 시작했는데, 촬영팀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지 둘은 둘만의 대화에 빠진 것 같았다.
처음엔 시우가 에반의 입을 막더니 이번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에반과 다르게 흥분한 시우가 따박따박 받아치다가 에반의 손에 입이 막혔다. 한 손으로 시우의 입가를 가린 에반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깨달은 시우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Q. 자, 두 분 이쪽 봐 주시고, 인터뷰 계속할게요. 같은 그룹의 멤버이다 보니 함께한 시간도 길었고, 여러 가지 일도 많으셨을 텐데, 언제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시고 사귀게 된 건가요?
에 : 처음부터.
코 : 엥? 처음이 언제야?
에 : 그럼 우리 언제부터 사귀었는지 정확히 알아?
코 : ……그러게. 언제부터라고 해야 해?
에 : 난…… 비행기부터 할래.
코 : 그게 무슨 사귄 거야. 호텔 아니야?
에 : 호텔? 그럼. 그날로 하지, 뭐.
코 : 1집 휴식기로 하면 되겠다.
이번에도 둘의 대화에서 소외된 피디는 제가 들고 있는 질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편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할까? 첫 질문부터 서로 입을 막아서 가렸지만, 애 둘 아빠인 그는 묵음 처리된 내용을 알아듣고 말았다.
프러포즈하고 침대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이 질문은 그냥 덜어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질문을 했건만 이번엔 호텔이란다.
그것도 1집 휴식기라고? 이미 그 전부터 그들을 보고 있던 촬영팀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파와 베타, 팬 서비스가 가미된 브로맨스라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진짜 연애이자 밀당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