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3
“어머님께 여쭤봤더니 고성에서 결혼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대. 아버님은 날짜만 나오면 어떻게든 시간 만드신다고 하셨어. 10월이니까 야외 결혼식도 괜찮을 것 같고, 그날 날씨가 안 좋다고 하면 고성 안에 거기 중앙 응접실 크잖아. 거기로 해도 되니까. 그리고 결혼식에 사람들 많이 부르고 그럴 거 아니지? 소규모로 작게 하고. 또…… 언론이 몰랐으면 하는데, 결혼 전까진 기사 뜨는 거 최대한 막았으면 하고, 결혼 후에 공개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또 뭐가 있더라. 아! 왜 한 달 뒤냐면 네 비서님께 물어봤는데, 너 그때 시간 괜찮대.”
방금까지 제대로 시선도 맞추지 않고 부끄러움에 발갛게 달아올라 혼자 빽 소리 지르고 민망해하던 시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슨 결혼식이 동네 꼬마 아이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방싯거리며 설명하는 시우를 보며 에반은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볼 때마다 새롭다는 건 시우를 위한 말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모르는 이 결혼 계획을 제 부모님이 알고 있다는 것이 제일 놀라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달 뒤 어느 날. 고성에서 야외 결혼식을 하는구나.
그것 말고 내가 또 알아야 하는 게 있을까? 그런데 언제 우리 부모님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거니?
시우의 특별한 형질 및 시우와 에반이 각인까지 한 사이라는 것은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가끔 혼자 부모님을 뵐 때면 부모님은 슬쩍 제게 결혼과 관련된 걸 묻기도 하셨지만, 에반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딱 잘라 말해 왔다. 한데 지금 시우의 말에 의하면 이 결혼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진행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너 신혼여행 꼭 가야 하고 그런 거야?”
“어. 응? 아니.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기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그거 상견례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여기저기 많이 다녔잖아. 굳이 사람들 시선 끌어 가면서 어딜 돌아다녀. 그래 봤자 파파라치한테 쫓겨 다니기만 할 텐데. 금요일 저녁에 결혼하면 일요일까지 너 쉴 거고. 월요일에 정상 출근 하면 돼. 괜찮지?”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고, 제가 생각한 것들을 모두 말하고는 마지막 확인인 것처럼 입술에 장난스럽게 뽀뽀까지 하는 시우의 만행에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예의상 제 의견을 물어보는 듯 ‘괜찮지?’라는 말을 달긴 했지만, 이미 시우의 머릿속에 에반이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부모님들 너무 재밌으셨어. 우리 엄마는 나 한국 들어갈 때마다 언제 결혼할 거냐고 막 그랬거든. 그래서 이번에 갔을 때 나 결혼할까 했더니 내일이라도 당장 하라는 거야. 그런데 어머님도 그러시더라. 지난달에 케이티 만났었잖아. 그때 어머님도 뵀었거든. 요즘 어떻게 지내니 하고 물으시길래, 내가 장난으로 그냥 에반이랑 결혼이나 할까 봐요, 라고 말했더니 너무 좋아하셨어. 아버님도.”
에반은 이런 앙큼한 계획을 추진하면서 지금껏 제게 귀띔조차 해 주지 않은 시우를 향해 짐짓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양가 부모님과 상의까지 끝난 거니?
제가 할 일들을 시우가 다 해 버렸다. 지난달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했다면서 바로 지난 주말 혼자 부모님을 뵀을 때, 두 분은 제게 결혼과 관련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코코.”
에반은 이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좋다. 미치도록 좋은데,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랬기에 조금 말꼬리를 늘이며 그를 불렀다.
“…….”
방금까지 눈을 반짝거리며 한껏 들떠 조잘거리던 시우의 표정 역시 순식간에 굳었다. 에반의 볼을 감싸고 있던 손도 머뭇거리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곤 꼼지락거리며 에반의 품에서마저 벗어나려는 시우의 모습에 에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내가 묻지 않았으면, 언제 말하려고 했어?”
한숨마저 예민하게 받아들인 시우가 움찔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말할 건 해야 했다. 물론 지금 시우가 말한 계획들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우를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저 혼자만 볼 수 있게 가둬 두고 싶은 충동이 지금도 몰아칠 때가 있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시우는 불편해했다. 그리고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음에. 나중에.
그랬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에반도 그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자다가 얼핏 깨어 제 품에서 잠든 시우를 보면서 밤을 지새우는 건 지금도 흔했다.
결혼식이라는 이벤트 같은 행사나 서류상으로 묶여 있는 그런 절차보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소중했다.
시우가 원치 않는 결혼이라는 구속을 내세웠다가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집 계약하고, 계약서 보여 주면서 그러니까 아마 내일, 내일 결정하려고 했거든.”
시선을 피한 시우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다르게 한껏 작아졌고, 끝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시선이 마주치자 급하게 무슨 말을 이으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기에 에반은 시우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제일 중요한 말들이 빠졌잖아.”
짧은 시간 다양한 감정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 시우의 얼굴엔 이번엔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아랫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커다란 눈만 깜박거리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에반은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이런 모습들이 시우의 매력이긴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모르겠어?”
제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보아하니, 시우는 지금 제가 한 말들을 곱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없이 소극적이면서도 가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적극적이었다. 긍정적이고 밝으면서도 그보다 더 어두운 외로움을 품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아마 시우는 제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 뻔했다. 마음대로 집을 알아보고 일을 진행해서 일이 꼬였다고 생각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둘의 관계까지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에반은 고개를 숙여 제 시선을 피한 시우의 턱을 살짝 받쳐 들었다. 순순히 고개를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고민인지 시선을 맞추지 않는 시우를 보는 에반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다.
뭘 해도 상관없다. 시우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일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그러면 된다.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 만약 시우가 천둥 번개 치는 폭풍 속에 야외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하면 에반은 기꺼이 그리할 것이었다.
“이 멍청이를 어찌할꼬.”
“내가 왜 멍청이야!”
“사랑해.”
시우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겨우 한 단어에 담아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 단어밖에 할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바짝 긴장했던 시우의 표정이 사르르 풀려 갔다. 종알종알 할 말이 많아 빠르게 속삭이는 아기 새처럼 신나서 제 계획들을 줄줄 말하던 시우의 얼굴에 다시 홍조가 어렸다.
에반은 머뭇거리는 시우의 코끝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우리 지금 결혼 이야기 하는데 제일 중요한 말이 빠졌잖아. 나름 프러포즈인 것 같은데 ‘사랑해’라는 단어는 들어가 줘야지.
“답을 가르쳐 줘도 몰라?”
넘치다 못해 주체하지 못한 제 감정을 먼저 말한 에반은 시우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은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 난…….”
“이대로 지내든 결혼하든 네가 내 옆에 있다면 난 뭐든 다 좋아. 나 모르게 벌써 양가 어른들께 혼자 허락 다 받아 버리면 어떡해. 그런 건 나 시켜야지. 뭐든 말하라고 했잖아. 네 말 한마디면 뭐든 다 한다고도 말한 거 같은데. 그런 건 다 까먹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식 이야기는 하면서 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 줘? 우리 바보 코코. 그러니까 우리 코코 내가 더 사랑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
마지막으로 살짝 고개를 꺾은 에반의 입술이 이번엔 시우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거창한 프러포즈를 생각하진 않았다.
에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케이크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직접 준비하고, 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작은 집을 샀다고.
그 집엔 널 위한 서재도 있는데, 우리 예쁘게 같이 살지 않겠냐 이런 말이면 될 것 같았다. 남들처럼 영원히 사랑할게, 너밖에 없어 같은 간지러운 말을 할 자신도 없었고, 에반이라면 제가 그렇게 말해도 뜻을 알아줄 것이다.
한데 어디서부터 뭐가 꼬인 것인지.
프러포즈는 무슨 에반이 오해하는 것이 싫어 집을 사려던 것을 말하다 보니 얼떨결에 결혼과 관련된 말도 하게 됐다.
그렇다고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 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상세히 말하려 했다. 방금 에반이 뭐든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우 역시 일단 지금 말하는 것들은 순전히 자신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그에게 맞춰 줄 의향도 있었다.
시우는 이마에서 코를 지나 입술로 다가온 에반의 입술을 피하며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사랑해’라는 말도 하려 했다.
“잠깐…… 잠깐만. 나 아직 할 말이……”
에반의 어깨를 짚어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려던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현재 그의 다리 위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상태였던지라 방금까지 잠잠하던 에반의 것이 부피를 키우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 이거 세울 때가 아니고, 대화부터 좀 하자.
“아! 이제 콘돔도 필요 없겠네.”
시우는 제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에반이 엉덩이를 움켜쥐며 하는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페로몬 이딴 식으로 확 풀면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