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2
한국에서 아이돌을 하면서 유명하기도 했지만 가문 때문에 더 유명한 에반이 가업의 일에 뛰어드는 순간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춤과 노래만 하던 이가 어떻게 사업체를 이끌 수 있냐는 비판적인 시각부터 알파라는 형질을 들먹이며 뭐든 잘할 것이라는 우호적인 시각까지 다양한 말들이 그를 두고 피어났다.
무엇보다 아직 20대라는 나이와 공식적으로 싱글인 그를 향한 러브콜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일단 그에게 들어오는 러브콜 자체가 시우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들이 아니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의 자제나 유명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콘서트장에서의 돌발적인 프러포즈에 이어 팬 사인회장에서 장난스럽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에반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시우 역시 이미 확고해진 둘이 사이를 가지고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둘의 약지엔 함께 디자인하다 합의에 실패하여 어떤 무늬도 없는, 정말 매끈하게 다듬어지기만 한 은색의 반지가 있었다.
그 뒤 시우의 손가락에 수없이 많은 장신구가 자리했지만, 왼손 약지엔 항상 그 반지가 있었고, 연예계를 떠난 이후 에반은 그 반지 외엔 어떤 것도 손가락에 끼지 않았다.
가십이 늘 그렇듯 자신과 에반을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있을 때면 같은 침대를 쓰고, 오른손잡이이면서도 양치할 때면 꼭 왼손으로 칫솔을 잡는 사소한 에반의 버릇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사이는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시우가 에반의 집을 들락거리고 그곳에서 지내는 것을 알면서도 파파라치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에반과 같은 그룹이었던 친한 멤버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지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우뿐 아니라 예찬이나 찬, 상준도 영국에 올 때면 에반의 집에서 지내는 일이 빈번했다. 호텔보다 보안이 철저하고 편리한 데다 가끔 그렇게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껏 자신과 에반의 상황이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던 시우에겐 말도 안 되는 열애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장을 차려입은 에반과 역시나 정장을 갖춰 입은 올리비아가 단둘이 식사하는 장면과 회사로 들어가는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을 증거라고 제시하며 그들이 열애 중이라고 떠들어 대는 사회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두 번이 아니라 최근 두 달 동안 둘이 함께한 일이 많다는 것까지 들은 시우는 그제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믿거나 말거나 내뱉고 보는 가십 프로그램인 것을 알았다. 에반과 올리비아가 열애 중이 아닌 건 확실하지만. 둘이 두 달 동안 꾸준히 만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에반이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안 만난 것도 아닌데, 유독 올리비아와의 만남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올리비아의 집안 역시 알아주는 유명한 가문이라는 것과, 에반보다 한 살 어린 올리비아는 오메가라는 것이다.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니, 알파와 오메가이니 하며 떠들어 대는 말을 듣던 시우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렸다. 방금 보고 들은 것들이 누구보다 사실이 아님을 알기에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 순간 시우에게 몰아닥친 건 불안감이었다.
저 잘난 놈이 자신만 보고 사는 것도 알고, 양가 가족들의 허락하에 양가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저 가십에 목매는 파파라치들과 저급한 방송들이 계속해서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을 생각하니 불안감에 이어 찾아온 것은 두통이었다.
그리고 에반이 왜 올리비아와 그렇게 많이 만났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에반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외부 지원팀 멤버 중 한 명이 올리비아였다. 그러니 자주 만날 수밖에.
어쨌거나 가십 프로그램에서 잠시 반짝 올라왔던 에반과 올리비아의 열애설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그걸 계기로 시우는 확고하게 마음먹었다.
확실하게 에반이 제 것이라고 온 세상에서 알리기로.
세상에 알리기 전에 일단 에반에게 먼저 말해야 했다. 현재 에반은 결혼과 관련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안건을 꺼낼 사람은 시우 자신뿐이었다. 그렇다고 대뜸 ‘우리 결혼할래?’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로맨틱이라든가 무드 같은 것에 무디긴 했지만 그래도 프러포즈이니 나름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다. 남들처럼 풍선 달고 초 밝히고 이런 건 죽어도 못 하겠다. 그렇다고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하자니 일단 그런 레스토랑들은 예약하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인 데다 에반과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꽃?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
반지? 이미 커플링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처럼 뭐 좀 야시시하게 옷 좀 헐벗고 우~ 후~ 이런 건…… 이미 할 만큼 했다.
그러다 시우가 생각해 낸 것이 집이었다.
지금 에반과 사는 집도 같이 사는 집이니 우리 집이긴 했다.
하지만 시우에겐 편하면서도 불편한 공간이었다.
일단 커도 너무 컸다. 침실에서 뒹굴거리고 놀다가 물 한 잔 마시려고 해도 부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분명 에반이 집에 있는 건 아는데 어디 있는지를 몰라 전화로 어디 있는지 물어본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관리인들이 있어서 불편했다.
때 되면 알아서 영양가까지 고려한 맛있는 식사를 차려 주고, 청소나 빨래라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것이 편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관리인들 때문이라도 옷을 챙겨 입어야 했고, 한없이 늘어져 있고 싶어도 침실이 아닌 공간에서는 그러는 것도 눈치 보였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언제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시우는 제가 꿈꾸던 작은 집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에반 모르게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집을 보고 고르고 고르다 보니 세 개가 남았고, 그것 역시 고민하다 내일 나가서 한 번 더 둘러보고 셋 중 한 곳으로 계약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에반은 제가 집을 사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에반. 내가 집 사려고 하는 거 안다고 했지? 정확히 어디까지 알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일단 에반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몇 달 전부터 집을 보고 다녔고, 내일 세 곳 둘러보고 결정할 거라는 거.”
에반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하는 말을 들은 시우는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솔직히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동산 중개인부터 이 일을 아는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제발 최종 계약할 때까지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도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나 내일 집 살 거야.”
“그러니까 집을 왜?”
“내 이름으로 된 내 집이니까 네가 와.”
뜬금없는 시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에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뭐 이미 알겠지만, 그 집들 네 기준으론 많이 작을 거야. 대부분 방이 서너 개밖에 안 되거든. 그래도 너 서재 하나 만들어 줄게.”
처음 끌어안았을 때 빠르게 뛰다가 잠시 평온해졌던 시우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이 에반에게 전해졌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말이 귀와 몸을 통해서 전해졌지만, 여전히 에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제 품에 꼭 안겨 있던 시우가 홱 몸을 움직여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야! 이 멍청아. 이제 내 집 생기니까 거기서 같이 살자고. 그러니까 너 나한테 장가오라고. 너한테 꼭 필요한 서재 하나 준다니까!”
한껏 붉어진 얼굴로 무드라고는 먹고 죽으려도 없는 말투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시우의 고백에 잠시 당황하던 에반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러다 결국 에반은 큰 소리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시우는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짧은 시간 함께하고 갑작스러운 회귀 후, 흘러넘치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우에게 밀어붙였을 때도 그랬다. 제 고백에 엉뚱한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 하고 싶단다. 콘서트도 하고, 시상식도 가고 뭐 그런 말들이 줄줄 이어져 완곡한 거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과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이 들어 있었을 줄이야.
처음이야 시우의 화법을 따라가지 못해 헤맸다지만, 지금은 그나마 그 안에 들어 있는 뜻을 정확히 캐치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하긴 했지만.
앙큼하게도 시우는 혼자 신혼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영국에서 지낸 집들은 에반 자신의 집이라기보다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곳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몇 군데의 집을 오가며 지내다 에반이 회사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지금의 집에 정착했다.
그랬기에 시우 역시 이 집 저 집 오가며 생활했는데, 그때마다 똑같이 했던 말이 하나 있었다.
집이 쓸데없이 너무 크다고. 그리고 조금 전 받은 메일에 첨부된 사진으로 본 집들은 모두 작은 이층집들이었다.
계속 크게 웃다가 시우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기에 에반은 웃음을 참으며 시우를 끌어안았다.
시우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미적거릴 순 없지.
계속 반복되는 삶에 지쳤을 시우가 처음으로 편히 쉬는 것 같아 재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지내든 제 옆에서 지내든 남들 눈에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같이 보여도 제겐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시우가 편안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시우가 운을 뗐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그래서 우리 결혼식은 언제야?”
“응. 한 달 뒤.”
생긋 웃으며 가볍게 말하는 시우를 보는 에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