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
시우는 푹신한 침대에 엎드리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조이스틱을 움직여 제가 즐겨 하는 게임을 켜고는 편안한 자세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끔 급박한 상황이 되면 다리를 까딱거리면서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게임해?”
인기척과 함께 들려오는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그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다시 커다란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하면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속 여기서 막혀.”
“도와줘?”
“아니. 내가 할 거야.”
시우는 게임을 멈추지 않고 조이스틱을 조작하며 옆으로 살짝 움직여 에반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엎드린 채 계속해서 게임을 하는 시우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 탭을 보는 에반 사이엔 딱히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각자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둘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뭐 봐? 영화?”
한 챕터가 끝나고 세이브되는 동안 시우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자료 좀 볼 게 있어서. 내일은 뭐 할 거야?”
“바람도 쐴 겸 나갔다 올까 하지.”
“어디 갈 건데?”
“몰라.”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 캐릭터의 장비를 확인하던 시우는 자신의 종아리에 에반의 손길이 닿자 슬쩍 몸을 틀며 작게 웃었다.
“간지러워.”
“뭐가 간지러워.”
처음엔 간지럽히듯 손끝으로 가볍게 종아리를 두드리던 에반이 종아리를 시원하게 주무르자, 시우는 다리를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아…… 나, 오른쪽 말고 왼쪽.”
잠시 에반의 손길을 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우는 그가 주물러 줬으면 하는 곳을 말했다.
에반은 반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는 엎드린 채, 게임에 몰두한 시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끔 시우와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사소한 작은 버릇까지 하나하나 알아 가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
다른 게임은 앉아서 하더니 꼭 이 게임만큼은 이렇게 침대에 엎드려서 하는 시우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해야 직접 제가 총을 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마치 자신이 게임 캐릭터라도 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시우의 목소리에 에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위급한 상황이 될 때마다 시우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밤톨 같은 뒷머리라든가 곧게 쭉 뻗은 등, 동그랗게 솟은 엉덩이와 짧은 바지 아래로 쭉 뻗은 다리로 시선을 옮기던 에반은 작게 한숨을 쉬고 탭으로 시선을 옮겼다.
필요한 정보가 있어 비서에게 부탁했더니 보기 좋게 자료를 정리해 준 터라 필히 봐 둬야 했다. 눈은 탭에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에반의 한 손은 멈추지 않고 시우의 다리를 번갈아 가며 주물렀다.
기괴한 좀비의 괴성과 시끄러운 총성에 더불어 게임 내 상황에 따른 시우의 걸쭉한 비속어까지 들으며 자료를 보던 에반은 늦은 시간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무심한 눈길로 읽어 내리던 에반은 종아리에만 닿아 있던 손을 슬쩍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님하, 거기 아니고. 내려가세요.”
시우는 앞을 가리는 좀비의 머리를 도끼로 시원하게 날려 버리며 말했다.
“코코.”
좀비 머리를 날린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난투극이 벌어진 터라 시우는 에반의 말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아! 그 손 좀. 나 이거 하잖아.”
하나 해치우면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를 다시 채우며 몰려드는 좀비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 나랑 있는데 게임이 더 중요해?”
어이없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으면서 얼른 조이스틱을 한 손으로 쥔 채, 다른 손을 뒤로 뻗어 허벅지 위쪽까지 올라온 에반의 손을 탁, 하고 때렸다.
“웃기셔.”
“웃겨?”
“야아!!”
웃기냐는 반문과 함께 지금껏 사심 없이 근육을 풀어 주던 시원한 에반의 손길이 달라지면서 방 안 가득 그윽하게 채우는 페로몬에 시우는 몸을 파닥거렸다.
그리고 시우의 캐릭터가 쓰러졌다. 이어 화면이 어둑해지고, 부활하겠냐는 메시지가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죽었잖아! 조금만 더 가면 안전 기지였는데!”
조이스틱을 침대 아래로 툭 던진 시우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여전히 침대 헤드에 기대 한 손에 탭을 들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유감이라는 듯한 표정과 어깨를 으쓱하는 얄미운 에반의 모습에 시우는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나라고 너 방해 못 할 거 같아?”
편히 앉아 있는 에반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그와 마주 본 시우의 손이 대번에 그의 탭으로 향했다. 그러자 에반은 시우보다 긴 팔을 들었고, 시우 역시 탭을 잡으려 팔을 쭉 뻗었다.
쪽-.
에반의 손에 들린 탭을 뺏으려고 하던 시우는 탭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며 볼과 턱 사이쯤에 입을 맞추는 그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탭 줄 테니까, 질문 하나만 하자.”
“두 개 하면 죽여 버린다.”
그의 허벅지에 털썩 주저앉은 시우는 언제 봐도 잘생긴 에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은 왜 사려는 거야?”
“…….”
“다 이 근처이긴 하던데.”
전혀 예상치 못한 에반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시우는 그가 이어 하는 말에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그리고 시우 역시 이 비밀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잠시만 에반이 모르길 바랐고, 내일이면 다 정리되는 일이었다.
그다음에 그에게 말할 생각인데, 하루만 더 숨기면 되는 일을 들켜 버렸다.
“코코.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려.”
쐐기를 박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혀끝을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부터 축였다. 여기서 거짓말을 더 했다가는 둘의 사이만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준비해서 좀 멋지게 하고 싶은데, 역시 자신은 그런 것과 어울리지 않나 보다.
“우리 집이야.”
한마디를 툭 던지고도 말을 쉽게 잇지 못하는 시우를 바라보던 에반은 시우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얼굴을 보고 말하기 어려우면 안 보고 말하면 되잖아.
도망갈 틈을 주지 않을 것처럼 꼭 끌어안은 에반은 시우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는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였다.
많이 놀라고 당황했는지, 시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집.”
시우가 같은 단어를 반복해도 에반은 기다렸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도대체 또 무슨 집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시우가 최종적으로 골라 놓은 집들은 하나같이 아담했다.
“있잖아. 너 어디까지 알아?”
시우는 에반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이 일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큼은 에반이 몰랐으면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멈춰 있는 시우와 다르게 오션 멤버들은 다양한 곳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연예계를 떠나 사업가의 길을 걷는 에반을 비롯하여 배우, 디렉터, 예능 등 각자 원하는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반면 시우는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보냈다.
가끔 영국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브이로그처럼 찍긴 했다. 라이브를 했다가 말아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영상을 찍어 편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데 제가 찍고 싶은 것들을 편하게 찍다 보니 에반과의 사소한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노출됐다. 그래서 소속사나 편집자에게 맡기기보다는 직접 편집하기로 마음먹고 영상 편집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어설프지만 직접 편집까지 마친 브이로그를 업데이트했다.
처음엔 짜깁기 수준인, 음악조차 제대로 깔지 못해 엉성하던 영상들은 편집 기술이 늘수록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반과 함께하면서 안정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시우는 주거지 역시 일정치 않았다. 한국에선 부모님 댁에서 지냈고, 영국에선 에반의 집에서 생활했다. 가끔은 호텔에서 지내기도 했으니 제대로 된 정착지가 없는 시우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연예계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발을 빼지 못했고, 그러다 에반과 장시간 떨어져 있으면 그가 보고파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난 1년간 시우에게 남은 건 스무 개가 되지 않는 브이로그와 비행 마일리지뿐인 것 같았다.
‘나 이제 뭐 하지?’
‘코코.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네 마음대로 해?’
‘대신 그게 뭐가 됐든 내 옆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
진지하게 에반에게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온 건 답이 아닌 연장선상의 질문이었다. 누구도 제게 어떤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소속사도 가족도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에반 역시 모두 제자리에 있으면서 시우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시우가 한순간에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 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그런 사건 때문이었다.
엄마의 생일이었기에 한국에서 보름 정도를 지내다가 영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제가 한국과 영국을 오갈 때마다 전용기를 띄워 준다는 에반을 겨우 말린 시우는 일등석으로 다니는 것으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일등석을 이용하고 공항으로 픽업 나온 기사님 덕분에 편하게 이동할 순 있었지만, 장시간의 비행은 늘 피곤했다.
간단하게 샤워만 끝내고 TV를 틀어 놓은 시우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에반의 사진 옆에 웬 아리따운 여성의 사진이 나란히 있었고, 그 아래로 파파라치 컷 같은 짧은 영상 몇 개가 연이어 나왔다. 복잡한 가계도 같은 것들이 뜨고 가문이 어쩌고 형질이 어쩌고 하는 말들이 번잡스럽게 울렸다.
에반 루이스와 올리비아 헤링턴의 열애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