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62화 (162/187)

외전 1. Merry Christmas (2)

“와. 잘생긴 에바니다.”

찬의 것은 그렇다 치고, 예찬의 것까지 떠올린 에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겉옷을 벗으며 빠른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소파에 던지고 시우의 앞으로 다가간 에반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사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시우를 보는 순간 아득해졌다.

다른 말도 아니고 시우의 입에서 ‘잘생긴 에바니’라는 단어가 나온 이후엔 꼭 사건 사고가 터졌다. 멤버들과 술을 마시다 주량을 넘어서는 잘생겼다는 말을 하면서 다짜고짜 제 옷을 벗기려 들거나, 뜬금없이 놀자며 옷을 벗어 던지는 둥 그동안 그가 저지른 만행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었다.

물론 제 앞에서만 그런다면 에반 역시 딱히 말릴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팬들이 실시간으로 라이브 시청 중이었다.

“그래. 나 왔으니까 이제 라이브 끄고. 니모, 오늘 라이브는…….”

“어허! 죄인은 그 입을 다물지 못할까!”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려 시우의 앞에 몸을 낮춘 에반은 팔을 뻗어 라이브를 끄려고 했다. 하지만 시우의 손이 에반의 손목을 매섭게 낚아챘다.

“코코?”

“아……. 맞어. 아까 아까…… 찬이 형이…….”

갑자기 제 손목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우를 흘깃 본 에반은 다른 팔을 뻗어 라이브를 끄려고 했다. 내일이면 제 머리를 쥐어뜯고 혼자 자책할 시우가 더 많은 흑역사를 남기기 전에 라이브를 멈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제 손목에서 느껴지는 낯선 이질감에 에반이 멈칫하는 사이 그의 양 손목에는 장난감 플라스틱 수갑이 채워졌다.

“됐다. 넌 죄인이니까 이게 딱이야. 니모~ 내 말이 맞죠?”

분홍색 플라스틱 장난감 수갑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반나절 혼자 뒀다고 이렇게 투정을 부린다 이거지? 너 내일 정말 어쩌려고 이래? 평소엔 애교 보여 달라고 하면 도끼눈을 뜨더니 술은 시우를 이리도 무르게 만들었다.

자신과 시선을 맞추고 그렇게 곱게 웃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갑자기 죄인이라니. 죄인에게 이런 수갑은 오히려 위험한데…….

찬이 보낸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걸 시우에게 쓸 생각이었지 이렇게 제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에반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이고 여차하면 재워 버리면 되니 어디까지 하나 보고 싶은 마음도 든 것이다.

“맞아. 니모도 나 혼자 둬서 너 나쁜 거 맞대.”

제 앞에 떡하니 서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마디 한 시우가 또 선물 더미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저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엔 토끼 머리띠가 씌워졌다.

“또…… 이거랑 뭐가 같이 있었는데.”

말꼬리가 늘어지고 발음이 더 뭉개지는 것이 그냥 둬도 혼자 잠들 것 같았다. 손목엔 수갑, 머리엔 토끼 머리띠를 한 채 주위를 둘러본 에반은 테이블에 놓인 양주병과 잔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반병이나 마셨다고? 반쯤 비어 버린 양주병과 휘청거리면서도 두 팔을 허공에서 살짝씩 움직이면서 균형을 잡고 돌아다니는 시우를 보자니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이미 시우는 제 주량을 한참 넘어선 것이다. 어쩌면 술을 마신 것치고 멀쩡하다고 해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에반은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창에 혀를 내둘렀다. 하긴 시우가 주사를 부리는 건 저도 잘 보기 힘든 모습이니 니모들은 오죽할까?

하얀 피부는 전체적으로 붉은 기가 돌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눈웃음을 치며 말꼬리가 늘어지거나 발음이 뭉개졌다. 그럴 때면 확실하게 제 의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발음했다 싶은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열쇠.”

몇 번 손목을 움직여 장난감 수갑의 강도를 확인한 에반은 정확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시우를 슬쩍 떠보았다. 이상한 걸 또 찾아 오느니 열쇠를 찾아 오라고 시키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서 발을 뻗어 예찬의 상자를 화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예찬이 코스프레용품을 보냈다면 찬은 종류별로 다양한 콘돔을 보냈다고 의기양양했다.

“열쇠? 열……쇠? 그건 없는데.”

시우는 제가 뒤로 던져 놓은 선물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열쇠를 찾는다는 이유로 또 물건들을 집어 아무렇게나 던지기 시작했다. 책이며 액세서리가 든 작은 상자며 온갖 것들이 휙휙 날아다녔다. 덕분에 에반의 주변으로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럼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에반은 혹시나 취한 시우가 돌아다니다 다칠 것 같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시우에게 어지르지 말라거나 그만하라고 저지하기보다 시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내버려 둔 채,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에 시선을 뒀다.

“……너 왜 그러고 있어?”

시우가 조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일이면 아마 부끄러워서 난리 날 거다. 그러니 이쯤에서 라이브를 끄겠다는 말을 시우에게 들키지 않으려 속삭이듯 말하던 에반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무언가를 찾는 것에 열중하던 시우의 시선이 에반에게 닿은 탓이었다.

“나? 뭐?”

“왜 옷을 벗다가 말았어?”

쪼그려 앉아 있던 시우가 일어나는 것을 본 에반은 얼른 제 모습을 훑어보았다. 검은색 슬랙스에 흰색 셔츠,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넥타이는 불편해서 차 안에서 풀었고, 목이 죄니 단추 두어 개를 풀었고…….

“……코코, 열쇠부터 찾자. 이러고 잘 순 없잖아.”

시우의 시선이 제 셔츠에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한 에반은 관심사를 열쇠로 돌리려 얼른 말했다.

“너 그러고 자.”

에반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시우는 풀다 만 에반의 셔츠에 꽂혀 버렸다.

“벗어! 벗어……. 벗으라고.”

에반에게 다가가던 시우가 휘청였고, 라이브 장비를 올려놓은 테이블을 건드렸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가 넘어지면서 고풍스러운 천장을 비췄다.

“벗긴 뭘 벗어.”

“니모, 있잖아요. 에바니가 자베보다 훨씬 몸 좋거든요. 그런데 자베만 화보 찍고. 복근이랑…… 복근이랑…… 가슴이랑. 아…… 등도 진짜 장난 아닌데…….”

“코코, 너 진짜 취했어. 이제 라이브 끄고 자자.”

“시러…… 니모 보여 줄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시우도 지금 라이브 중인 걸 아는 것 같은데. 에반은 제 다리 위에 앉아 찾아온 안대를 제게 씌우려는 행동에 한숨만 쉬었다.

한쪽 귀에만 끈을 걸어놓고 몇 번 씌우려고 하다 안되니 그냥 두고 단추에 집중한 시우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이미 카메라가 넘어졌으니 둘의 모습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장난감 수갑도 수갑이라고 나름 구속력이 있었기에 에반은 팔을 위로 들어 다가온 시우를 팔 안에 가두었다. 지금 제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나? 졸지에 수갑 찬 에반의 품에 갇힌 것도 모르는 시우는 단추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왜…… 왜!!!!! 단추…….”

“안 풀리는 단추 풀려고 하지 말고, 열쇠 찾자.”

에반은 마주 앉은 채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열심히 노력 중인 시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지 살짝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는 시우의 입술이 앞으로 쏘옥 하니 나와 있었다.

우리 처음에 이랬는데, 그때도 라이브 중이었고.

진짜 그때는 에반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제 목소리에 놀라면서 일어나는 시우가 라이브를 끈 줄 알았다.

솔직히 손가락이 아프다는 건 핑계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는데,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들어주던 시우였는데…….

그때는 단추를 채워 주는 것이었다만 지금은 풀려고 하는 게 달라진 점인가?

“열쇠 없어!”

취기에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 계속 헛손질만 하던 시우는 열쇠 타령만 해 대는 에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우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에반의 목소리와 칭얼거리는 시우의 목소리만 듣게 된 니모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그때 그 중요한 순간에 시우가 테이블을 건드렸을까?

에반은 앙칼지게 소리치는 시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었다. 지금은 입맞춤보다 단추 푸는 것이 더 중요한지 살짝 고개를 돌려 피하는 시우의 입술을 따라가며 에반은 장난을 쳤다.

“으응. 하지 마……. 내가……. ”

계속해서 단추 푸는 것을 방해받은 시우는 에반의 셔츠 깃을 꼭 쥔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장난처럼 폭신하고 달콤하게 내려앉았다 사라지던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입술을 꾹 눌러 왔다.

방금까지 캐럴 사이로 티키타카 같은 둘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갑자기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자 소리에 집중한 니모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차피 라이브 중 시우와 장난을 칠 생각이던 에반은 먼저 입술을 벌리고 앙큼하게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는 대범한 행동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우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페로몬과 꼭 맞닿아 있는 하체는 깊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코코, 단추도 제대로 못 풀면서 뭐 하려고?”

제가 입술을 벌려 주지 않으니 콧소리까지 내면서 입술을 건드리는 시우의 행동에 슬쩍 고개를 튼 에반은 그만 시우를 놓아줘야 할 것 같았다.

“……해 줘.”

“지금?”

팔을 풀고 시우를 내려놓으려던 에반은 키스해 달라는 시우의 말에 멈칫거렸다.

“으응.”

“지금은 안 돼. 정리하고.”

어차피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고 내일은 크리스마스. 연휴는 길었다. 조금도 급할 이유가 없었다.

눈으로 보고 싶다. 수능 볼 때 듣기 평가 때도 이렇게 집중력을 발휘하진 않았는데! 허망하게 천장만 계속 비추는 카메라를 향한 니모의 원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시우와 에반이 둘만의 시그널을 주고받고 은밀한 대화를 속살거리는 상황에 묘하게 배제되어 버린 니모들만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시우가 틀어 놓은 캐럴이 둘의 대화를 잡아먹고 있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둘이 뭘 하냐고!

“흐……응. 간지러…… 하지 마.”

“어딜 도망가?”

잠시 곡과 곡이 이어지느라 캐럴이 멈춘 사이 에반과 시우의 대화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투툭-.

“야, 이 멍청아! 그걸 왜 힘으로 끊어.”

시우의 새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방금까지 보이던 천장 대신 검은 화면이 뜨자, 지금껏 멈춰 있던 채팅창이 뒤늦게 의미 없는 의성어들로 뒤덮였다.

라이브도 꺼진 거실에서 시우의 칭얼거림이 열정에 휩싸인 신음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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