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그들의 비밀 연애 – 스타의 하루 (투찬 편)
‘스타의 하루’ 촬영 팀은 빠른 손놀림으로 카메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찬과 예찬은 에반, 시우와 같은 오피스텔의 다른 층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구조는 이미 다 꿰고 있었다.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시네요.”
편안한 잠옷 차림의 찬이 덥수룩한 머리를 누르면서 인사를 건네자 다들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같은 공간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나? 어제 촬영한 곳이 미니멀리즘의 끝판왕이라면 이곳은 맥시멀리즘의 최고봉을 찍을 것 같았다.
“이제 촬영 시작해요?”
카메라 설치를 기다리는 동안 세수를 하고 살짝 머리를 정리하고 나온 찬은 감독의 사인과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카메라를 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해 달라는 뜻을 전하고는 노크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이 빛을 가린 어두운 공간.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간 찬은 침대 옆에 멈춰 섰다.
“예찬아, 일어나.”
깨우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작게 예찬을 부르는 찬의 행동에 그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가 살짝 흔들렸다.
“……몇 신데…….”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건지 이불에서 손이 쑥 나와 바로 앞에 서 있는 찬의 손목을 잡았다. 감독의 시선에선 눈도 뜨지 않은 예찬이 정확히 찬을 잡는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침대 앞에 서 있던 찬이 예찬의 이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그다음 단계였다. 앞에 있는 이를 휙 잡아끄는 예찬도, 끌려가는 찬도 어떤 소리도 없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8시.”
예찬의 이불과 몸에 결박당한 찬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럼 더 자도 되네…….”
제 품에 찬을 꼭 끌어안은 예찬도 안긴 찬도 그대로 있었다. 이 장면을 얼마나 찍어야 하나. 카메라 감독의 고민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대충 끊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예찬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침대를 천천히 벗어났다.
‘나가죠.’ 입 모양을 벙긋거리며 예찬이 자신을 몰아내자, 덩달아 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온 카메라 감독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찬이 형, 조금 더 자고 일어날 거예요. 오늘 1시쯤 나가면 되는데, 저랑 촬영 때문에 일찍 일어난 거거든요.”
소곤거리며 말한 예찬은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촬영 중엔 찬이 형이 예민해서 제대로 식사를 못 해서 나가기 전에 좀 챙겨 먹여야 해요.”
어제는 양식이더니 오늘은 한식인가?
빠른 손놀림으로 밥을 안친 예찬은 미리 불려 둔 미역을 꺼내 냄비에 넣었다. 미역국이 한소끔 끓어오르자 은근하게 맛이 우러나도록 불을 낮춰 놓았다. 곧이어 계란말이 준비를 하고 햄까지 썰어 둔 예찬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예찬이 나와 햄을 굽고 계란말이를 시작할 때쯤 꼭 닫혀 있던 예찬의 방문이 열렸다.
“아……. 또 잤어.”
“또 자면 어때요. 급하게 준비하고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예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찬은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다 예찬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이거 놓고 자리에 앉으시죠.”
“아침부터 뭘 잔뜩 먹어.”
“형 먹는 거 보고 나갈 거니까 잔말하지 말고 앉으시죠.”
단호한 예찬의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오렌지주스를 놓고 자리에 앉은 예찬은 제 앞에 펼쳐진 음식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미역국이네.”
“아침부터 된장찌개 먹으라고 하면 싫어할 거잖아요. 참, 이거 햄. 어제 시우 형이 준 거예요.”
“오~ 그럼 맛있는 거지.”
젓가락을 든 찬은 잘 구워진 햄을 집으려다 예찬에게 손등을 가볍게 맞았다.
“물부터.”
“내가 널 잘못 키웠다. 내 죄다, 내 죄야.”
젓가락을 내려놓은 찬은 구시렁대며 미지근한 물부터 마셔야 했다. 아침부터 한식 상을 거하게 차려 찬에게 바친 예찬은 정작 자신은 뻑뻑해 보이는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거 먹고 살아지는 게 용하다. 진짜 최악이던데.”
“저도 맛없거든요. 먹어야 되니까 먹는 거지.”
“화보 촬영 오늘이지?”
고개를 끄덕인 예찬은 찬이 밥을 뜨자 얼른 그 위에 계란말이 조금을 올렸다.
“다시는 화보 촬영 안 해. 아……! 에반 형한테 낚여 가지고.”
맛없는 주스를 단번에 비워 낸 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나가?”
“매니저 형 연락 오는 대로 바로.”
간단한 말을 주고받으며 아침 식사를 끝낸 둘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뒷정리를 했고, 찬은 오늘 촬영할 대본을 챙겨 들었다.
“나도 같이 봐요.”
더 치울 것도 없는데, 한 손에 대본을 들고 부엌을 돌아다니는 찬을 본 예찬이 그의 뒤에 선 채로 대본에 시선을 두었다.
잠시 그렇게 멈춰 있던 예찬은 제 앞에 서 있는 찬을 슬쩍 밀어 냉장고 앞에 세우고는 대본에 적혀 있는 대로 냉장고에 살짝 기대섰다.
“또 시작이지?”
대본에 적힌 대로 예찬이 대사를 읊자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찬이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매번 그러잖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 내리고. 이제 그런 건 같이 하기로 한 거 아닌가?”
“그 자리에서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뭘 더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죠?”
대본을 보던 예찬의 눈썹이 슬쩍 움직이더니 손을 들어 찬의 턱을 살짝 잡으며 몸을 움직이자 순식간에 찬은 냉장고와 예찬의 사이에 갇혔다.
178cm에 가까운 키에 어디 가서 기죽을 만한 체격이 아니었지만, 워낙 체격이 좋은 예찬이었기에 그를 올려다본 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지금 이러는 건…….”
대본에 적힌 대로 대사를 이어 가던 찬은 갑자기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러서는 예찬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와, 이건 아니지. 키스 신이었어. 대박. 형, 오늘 키스 신 찍는 거였어요?”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거 딱 키스 각 섰고만.”
“야, 봐 봐. 어디 키스가 있어? 여기서 확 고개 틀어서 못 했잖아. 볼 거면 끝까지 제대로 봐.”
바락거리는 예찬의 앞에서 대본을 팔랑거리며 넘긴 찬이 제가 말한 장면을 찾았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찍는다고요?”
“아하! 우리 예찬이가 형 키스 신 찍는 걸 보고 싶었구나. 어쩜 좋아. 형이 메인 주인공이 아니고 서브라서 그런 건 없네. 다음엔 더 노력해서 주인공이 되어 보도록 하마.”
예찬의 팔뚝을 토닥거리며 생글거리는 찬의 얼굴을 본 예찬이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뭐래.”
“우리 막내. 다 컸네, 다 컸어. 팔뚝이……. 이야, 세 달 동안 진짜 닭가슴살과 건강 주스 이런 것만 먹고 몸 만든 보람이 있네.”
예찬의 팔뚝을 만지던 찬의 손이 그의 팔을 쓸고 내려와 입고 있는 니트 끝을 잡았다. 그러고는 예찬이 말리거나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니트를 위로 끌어 올렸다.
“형?”
“……장난 아니네?”
분명 예찬이 싫다고 하거나 옷을 내릴 줄 알고 확 끌어 올렸건만, 그가 그냥 가만히 서 있는 바람에 갑자기 예찬의 완벽한 복근을 마주한 찬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누구 말대로 세 달 동안 진짜 좋아하는 치킨, 족발, 피자, 햄버거, 불짬뽕에 곱창까지 참고 살았는데, 이 정도는 있어야죠. 아니면 내가 억울해서 못 살지.”
제 손도 아니고 찬의 손을 끌어 제 복근을 만지게 하는 예찬의 행동에 촬영진들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 카메라나 촬영진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촬영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정말 촬영진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영화를 보고 간식을 먹고 낮잠까지 잔 에반과 시우처럼 이들 역시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예찬의 훌륭한 복근은 방송에 참으로 적합하지만, 뭐랄까 이 둘의 분위기는 생각과 너무 달랐다. 한 그룹의 리더와 막내라기보다 더 친밀하고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독한 놈. 그런 의미에서 오늘 화보 촬영 끝나면 밤에 불곱창에 소주?”
“콜!”
방금까지 뭐라고 단정 짓기 이상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평범한 형 동생 같은 모습을 보이며 각자 할 일을 하는 둘을 촬영하는 촬영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언제쯤 끝나는데?”
찬은 매니저와 통화를 하며 현관으로 가는 예찬을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단독 촬영이니까 저녁 전에 끝나겠죠. 형이 오히려 늦게 끝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오늘 몇 컷 없어. 앞에서 늘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예찬을 훑어보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간 찬은 얼른 목도리를 챙겨 나와 예찬의 목에 걸었다.
“목도리? 필요 없는데.”
“너 어리다고 그러고 다니다가 감기 걸린다.”
“누가 누굴 걱정해. 형 머리나 제대로 말려요. 물 떨어지는 거 봐라.”
예찬의 목에 제 목도리를 두르고 깔끔하게 매듭을 만드는 찬은 제가 대충 머리에 올려놓은 수건을 잡아 젖은 머리를 닦아 주는 예찬의 손을 치워 내지 않았다.
“끝나고 전화해.”
빨리 내려오지 않는 예찬을 재촉하는 매니저의 전화가 오고 나서야 그를 놓아준 찬은 거실로 돌아와 대본을 펼쳤다. 방금까지 꽉 찼던 오디오에는 찬이 준비를 마치고 나갈 때까지 어떤 목소리도 들어가지 않았다.
* * *
편집실에 앉은 ‘스타의 하루’ 피디는 턱을 괸 채, 흐린 눈을 하고 녹화된 파일들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살리고 어디를 죽여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시우는 제가 촬영이 있는지 모르고 했던 아침의 모든 행동을 편집해 달라고 했지만, 에반은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 쓰고 싶은 모든 장면을 써 달라고 했다. 말만 그런 것일 뿐 아침의 장면을 굳이 편집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방송을 우선 생각하는 자로서 그 장면들은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에반을 믿고 저질러도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예찬과 찬을 찍어 온 분량에서 발생했다.
에반과 시우는 공식적으로 대놓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연애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에반의 프러포즈와 시우의 ‘각인’ 발언 이후 그들에게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붙었고, 그들 중 한 명이 겁 없이 그들의 열애설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건 고소장과 에반과의 단독 면담이었다.
에반과 기자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그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편안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면 절대 그 기사를 싣지 말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냥 모른 척하라고…….
어쨌거나 그들은 그렇다 치고.
예찬과 찬은 또 뭐지? 알파와 베타의 연애? 베타인지 오메가인지 오해를 받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걸 넘어서 이번엔 알파와 알파라고?
오션 그룹에 그럼 두 커플이 있다고? 편집 방향을, 그리고 장난스럽게 작성해 분위기를 더 살리는 자막은 어떻게 하고, 음악을 어떻게 깔아야 하지?
찬과 예찬은 아침에 잠시 붙어 있었고, 다음 분량부터는 화보 촬영과 드라마 촬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찬의 드라마 촬영이 길어지는 바람에 둘이 야식을 먹는 것은 불발되었다.
대신 예찬보다 늦게 들어온 찬은 이미 먼저 잠든 예찬의 방에서 잠들었다.
“아, 진짜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뜯던 피디는 테이블에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놓이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피디님, 방금 오션의 에반에게 연락이 왔는데, 고민하지 말고 방송을 생각해서 재밌게 편집해서 내보내래요. 무얼 고민하는지 아는데, 생각하는 그거 맞대요.”
중요한 말을 전하는 메인 작가를 보며 피디는 차가운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러나저러나 방송을 위한 편집에 들어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