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그들의 공개 연애 – 스타의 하루 (에코 편)
적당히 달군 냄비에 무염 버터를 녹인 에반은 미리 썰어 놓은 양파를 넣었다. 곧이어 감자와 양송이버섯을 순서대로 냄비에 넣고 타지 않게 중간중간 저으면서 베이컨 두 줄을 꺼냈다.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요리를 하는 에반의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로 앞에 카메라 감독님과 피디가 있었지만,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감자와 양파, 양송이버섯을 볶던 에반은 우유와 육수를 냄비에 추가했다. 끓을 동안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올려놓고 크루통과 파슬리를 준비했다.
“아, 요리요? 시간 날 때 틈틈이 열심히 배웠죠. 딱히 취미가 있던 건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혼자 흥얼거리면서 요리를 하는 에반을 보다 못한 피디가 스케치북을 통해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에반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다른 쪽 냄비에선 뱅쇼가 바글바글 끓으면서 특유의 향을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뱅쇼는 다들 아실 테고 지금 하는 건 크림수프예요.”
수프 냄비에서 잘게 썬 감자의 상태를 확인한 에반은 믹서기를 꺼냈다. 그리고 방금까지 끓이던 수프를 넣어 믹서기를 가동하자 지금과는 다른 큰 소음이 공간을 채웠다.
“무소음 믹서기는 없는 건가요. 이러다 깨겠네. 깨겠다는 게 아니라 확실히 깼을 거예요.”
살짝 표정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에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이내 지금까지와 다른 달콤한 미소가 그의 얼굴 가득 피어났다.
문이 열리고 방에서 나온 사람을 카메라가 담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그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듯 에반에게로 향했다.
믹서기로 곱게 간 것들을 다시 냄비에 붓던 에반은 백 허그를 하는 이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시끄러웠지?”
“……응.”
에반은 자신의 등에 이마를 대고는 끄덕이며 웅얼거리는 대답에 작게 웃었다. 어쩌면 좋을까. 지금 시우는 방송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뒤에서 안더니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반은 옆에 뒀던 생크림을 첨가하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늘 그렇듯 제 앞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시우가 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 일어났어?”
시우의 입술을 타고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시간 전쯤.”
손을 닦은 에반은 시우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번잡한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혔다.
“……깨우지.”
“보자. 열은 내렸나?”
에반은 시우의 이마에 손을 댔다.
“응. 이제 괜찮아.”
에반이 제 볼을 쓰다듬고 드러난 목덜미를 만지는 동안 시우는 얌전히 그 손길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행이네.”
에반이 뒤로 물러서려 하자 시우는 얼른 팔을 뻗어 그의 몸을 안아 제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에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에반의 페로몬을 느끼는 시우의 얼굴엔 편안함이 가득했다.
“코코.”
에반의 부름에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시우는 이 순간을 온전히 즐겼다. 에반의 체온을 느끼고 그의 다정한 페로몬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잊었지?”
평소엔 이렇게 안겨 들면 꽉 안아 주고 키스를 퍼붓던 에반이 그런 행동을 보이기는커녕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말을 꺼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에반의 말을 상기하며 시우는 그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을 풀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반과 시선을 맞췄다.
“…….”
곧이어 번뜩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란 시우는 얼른 에반에게서 멀어졌다.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 시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방금까지 앉아 있던 아일랜드 식탁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카메라 감독님 두 분과 어색한 미소를 띤 피디님, 애써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작가님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오늘은 ‘스타의 하루’라는 프로그램 촬영일이었다.
잠에서 깬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그들의 하루를 편안하게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집으로 촬영진이 찾아온다는 것도 이미 촬영 전 사전 미팅에서 전해 들은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오.”
스멀스멀 내려와 제 잠옷 상의 끝을 만지던 시우가 촬영진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침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에반의 큰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토끼가 당근을 품에 안고 있는 캐릭터가 상하의에 빼곡하게 프린트된 잠옷을 벗어 던지고 에반처럼 무난한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시우의 입에서 거친 웅얼거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도 에반은 촬영 있다는 말을 제게 했다. 열이 아주 심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온 감기 몸살에 종일 쉬었던지라 바빠서 깜박했다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어렴풋이 잠이 깼을 무렵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던 시우는 차갑게 식은 이불을 느끼며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밖에서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곧장 에반에게 향했던 것이다.
그냥 평소대로 했을 뿐인데, 그래도…….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시우는 밖으로 향했다. 부끄럽고 민망해도 어쩌겠는가. 편집해 달라고 부탁하고 계속 촬영해야지.
거실로 나가 마이크를 착용한 시우는 꼭 편집해 달라는 말을 하고는 여전히 부엌에 있는 에반에게로 갔다.
“아, 진짜 나 깨우지. 혼자 다 했네.”
먹음직스러운 수프와 바삭바삭하게 구워 낸 토스트 및 과일 등이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열은 떨어졌어도 이거 먹고 약은 챙겨 먹어.”
에반과 마주 앉은 시우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수프를 조금 먹은 시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금까지 요리하는 동안 에반이 부르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맛있어?”
“응. 본가의 요리사님이 해 주신 것 같아.”
“배워 오길 잘했네.”
“진짜? 본가 요리사님께 배웠다고? 언제? 난 보내 주신 건 줄 알았는데.”
“육수는 보내 주신 거긴 하지. 뱅쇼는?”
에반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수프를 먹던 시우는 뱅쇼라는 말에 옆에 있는 머그잔을 들었다. 몇 번 후후 불고 입 안에 조금 머금은 시우는 한참 있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와. 진짜 그걸 어떻게 다 알지?”
“네가 만든 거야?”
허탈한 것 같은 에반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우는 이내 전기레인지 위에 있는 커다란 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아침부터 바쁘셨네. 오늘 다른 스케줄은 없지?”
“모처럼 집에서 편하게 쉬는 날이지.”
평범한 대화를 나누던 시우는 제 발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에 몸을 숙여 제 발에 장난을 치는 작은 아이를 한 손으로 감싸 들었다.
“옹이. 넌 또 언제 왔어?”
“아침에. 며칠 바쁘시다고 맡아 달라고 해서.”
“누나 왔다 갔어?”
“응. 여행 가신대.”
아직 꼬꼬마 아기인 옹이를 두 손으로 잡고 그 얼굴과 몸에 마구 입을 맞추던 시우는 카메라를 향해 옹이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옹이입니다. 성은 야…… 이름이 옹이. 다 해서 야옹이입니다. 제 주인은 바쁘다고 맨날 저를 여기 맡겨요. 어디가 제집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치 제가 옹이인 것처럼 소개하고 다시 옹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날씨가 추워졌다는 말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아침 식사를 마친 시우는 제 앞에 놓이는 약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나 다 나았다고. 열도 안 나고. 봐, 목소리도 괜찮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침도 안 했어.”
“안 돼. 식사 끝났으니 드세요. 나한테 옮기면 내가 고생이거든.”
“헐, 옮기긴 뭘 옮겨. 너 감기 걸린 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러니까 이번에 옮기면 어떡해. 며칠 후에 녹음해야 하잖아.”
정말 제가 먹지 않을 것 같았는지 변죽 좋게 말하며 손바닥 안에 알약을 내려놓는 에반을 흘겨본 시우는 마지못해 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식기들을 정리하던 시우의 시선이 한쪽에 쌓여 있는 박스로 향했다.
“이건 또 언제 왔어? 그럼 뱅쇼도 있었을 거잖아.”
박스를 열어 본 시우는 그 안에서 제가 좋아하는 마들렌이 가득 든 봉투를 꺼냈다. 냉큼 마들렌 하나를 입에 물고는 이내 상자 안에서 유리병도 꺼냈다.
“…….”
입에 마들렌을 물고 있었기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여기 뱅쇼가 있는데 왜 굳이 또 만들었냐는 말이 에반에게 전해졌다.
“이미 끓이고 있는데 도착한 걸 어떡해.”
“아침부터 진짜 많이 바빴겠네. 누나도 왔다 가고 이것들도 오고.”
마들렌을 다 먹은 시우는 얼른 에반의 입에도 마들렌 하나를 넣고는 접시와 잔을 꺼냈다.
넓은 접시에 마들렌을 비롯해 영국에서 보내온 다양한 빵과 쿠키들을 담고, 뱅쇼 역시 따뜻하게 데워 잔에 담았다.
간식거리를 촬영 팀에게 내준 둘은 딱 붙어서 에반이 요리를 하느라 어질러 놓은 부엌을 치웠다.
“영국에서 이것저것 보내 주시거든요. 음…… 보통 한 달에 한 번 오는 것 같아요. 저희가 일정이 많거나 바쁘면 몇 달에 한 번 오고, 지금처럼 휴식기이면 더 자주 오죠. 상대적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각종 먹거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같이 정리하며 시우는 간단히 설명했다.
아침 겸 점심에 가까운 식사에 이어 뒷정리를 끝낸 둘은 간식거리를 잔뜩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뭐 보려고?”
“이번에 새로 나온 영화.”
“오! 벌써 떴대?”
거실 암막 커튼을 치고 신작 영화를 구매한 둘은 딱 붙어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그들의 쉬는 법이었다. 둘은 간식을 먹고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한자리에서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옹이를 데리고 놀기도 하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늘어져 있다가 시우가 잠들자 에반은 잠든 시우를 침실에 눕히고 서재에서 일을 했다. 해 질 무렵, 서재를 나온 에반은 시우를 깨웠고, 둘은 투덕거리며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굉장히 지루하고 평범한 하루였지만 시우와 에반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촬영하는 제작진 역시 그들에게 어떤 것도 권하지 않았다.
촬영진이 모두 돌아간 늦은 시간.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방송 나갈 수 있을까 몰라. 뭐라도 할 걸 그랬나?”
“아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최고 시청률을 찍을지도 몰라.”
“와. 네 그 자만심은 한계가 없어?”
“넌 오늘 우리가 뭘 했는지 기억해?”
“일어나서 밥 먹고 물건 정리하고 영화 두 편 보고 낮잠 자고 저녁 먹었지.”
“맞아. 그거면 된 거야.”
에반의 말에 시우는 그냥 눈을 감았다. 방송이 성공하고 망하고는 이미 제 손을 떠났다.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출연료는 정상적으로 정산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