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그들의 공개 연애 – 라이브 편
“아…… 어떡해.”
에반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온몸을 배배 꼬고 있는 시우를 지켜보며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자신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마지막이라 생각한지라 시우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 주고 싶었다.
늘 반복되는 패턴이었고, 단 한 번 지난 시간대에서 일이 꼬이긴 했지만, 결국 회귀하지 않았던가.
돌아간다면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 같은 것 없이 마음껏 나다니고 싶었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이런 생활은 지긋지긋했다.
손 꼭 잡고 영화관이나 백화점을 편하게 다니고 여행도 하고 싶다. 길거리에서 마음껏 끌어안고 입도 맞추고 싶다. 그런 생활을 꿈꿨는데, 역시나 그들은 이번 시간대에 멈춰 있었다.
지금 시우는 제가 청혼한 것에 초점을 맞춰 제 청혼에 ‘Not yet’이라고 앙큼하게 거절 아닌 거절을 한 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며 모든 비난의 화살을 제게 돌렸지만, 에반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운명의 시간이 지나고 두어 시간 동안 시우의 잔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처음 들어 보는 현란한 육두문자에 어떤 말대답도 할 수 없었다.
‘폰 내놔.’
한참을 퍼붓고 나서야 이성을 찾은 것인지 휴대전화를 보던 시우는 둘의 이야기로 도배된 인터넷 뉴스를 보고 2차전에 돌입했었다.
“꼭 오늘 해야 한대?”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온 집 안을 돌아다니던 시우가 발걸음을 멈추자, 좋다고 그를 따라다니던 록쉬도 덩달아 멈추고는 시우의 옆에 몸을 낮춰 앉았다.
“더는 미룰 수 없긴 해.”
콘서트 공개 청혼 이후 3일이 지났고, 에반과 시우는 영국에 있었다. 소속사의 연락에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인터넷 뉴스도 무시한 채 잠수를 선택한 것이다.
평소였다면 에반이 먼저 손을 써서 인터넷 뉴스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겠지만, 이번에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이참에 공개 연애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인정하자고?”
창가에 삐딱하게 서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시우를 보며 에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환한 햇살이 시우의 주위로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빛에 반짝이고, 하얀 피부는 더 투명해 보였다.
느슨한 하얀색 티셔츠 위로 드러난 빗장뼈와 목선, 어깨를 보는 에반의 눈빛에 이채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민해진 시우 때문에 며칠째 본의 아니게 내외 중이었다.
“그래, 수습해 보자. CF 떨어져 나가고, 팬들 돌아서고. 그런 거밖에 더 있겠어? 위약금은 소속사가 내지 내가 내냐? 아니면 돈 많은 에바니가 해결하겠지.”
드디어 결심을 했는지 두 손을 꼭 쥐는 모습에 에반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참았다. 어떻게든 시우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됐다.
인기가 떨어지고 위약금을 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소속사 쪽으로 러브콜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돌 그룹 내 공식 연애 1호 커플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 만한 소재였다. 시우의 걱정대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엔 지난 3년간 쌓아 온 커리어가 만만치 않았다.
첫해는 신인상이었지만, 이듬해부터 대상을 휩쓸었다. 거기다 해외 투어 콘서트까지 전석 매진으로 성공적으로 치러 낸 오션이다.
“준비는 됐지?”
라이브 준비는 예전에 끝났다. 클릭 한 번이면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연애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기자회견을 하는 것도 웃기고 그냥 소박하게 같이 라이브를 하는 것으로 소속사와 조율한 상태였다.
라이브라고 하면 치를 떠는 시우였기에, 단 한 번도 둘만의 라이브를 한 적이 없었다. 에반의 돌발 행동을 감당할 수 없다는 시우의 단호한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해명을 하든지 인정을 하든지 오늘만큼은 같이 라이브를 해야 했다.
“너 말조심해. 분위기 보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끝낼 거야. 절대 인정하는 말도 하지 말고, 부정하는 말도 하지 마.”
신신당부하는 시우의 말을 들으며 에반은 제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쳤다.
“나 괜찮아?”
의자에 앉아 심호흡까지 하는 시우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끝으로 정리해 준 에반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리고는 시우를 한번 확인한 후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세기의 라이브의 막이 올랐다.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있는 에반과 연신 제 품에 안긴 록시를 쓰다듬는 시우가 한 프레임에 담긴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었다.
“와우.”
라이브를 제법 많이 했지만, 지금껏 이렇게 빠르게 참여자 수가 올라가는 건 처음 보았다. 참여자 수가 올라가는 것도 그렇지만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창에 느긋하던 에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차마 카메라를 보지 못하고 록시만 괴롭히던 시우는 에반의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에반을 쳐다보았다.
“그만큼 많이 기다리셨다는 거지. 니모. 안녕~”
에반은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 모습에 얼른 시우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허공에 어색하게 떠 있던 시우의 손은 버릇대로 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콘서트 잘 끝냈고, 잠시 휴가라서 영국이에요.”
커다란 눈만 깜빡이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시우 대신 에반이 편안하게 소통했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기보다 그냥 간단하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화면을 통해 여전히 입술을 만지는 시우를 보다 못한 에반이 슬쩍 손을 뻗어 시우의 손목을 잡았다.
“록시랑 러쉬가 시우를 워낙 좋아해서. 아! 러쉬도 보고 싶으세요?”
접속자 수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던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의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러쉬가 뛰어 들어왔다. 대번에 시우 옆으로 온 러쉬는 앞발을 테이블에 올리고 서서 카메라로 제 얼굴을 디밀었다.
화면을 가리는 러쉬의 행동에 지금껏 시우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록시가 신경질을 내며 러쉬에게 솜 주먹을 날렸다.
“러쉬, 바로 앉아.”
개와 고양이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록시의 일방적인 솜방망이를 가볍게 무시한 러쉬는 테이블 위에 딱히 제 관심을 끄는 것이 없자 뒤로 물러났다.
“저희 잘 지내고 있어요.”
시우는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읽는 건 포기하고 한참을 고르고 고른 말을 꺼냈다. 영국은 지금 낮인데 한국은 밤 아니냐, 주무시는 거 방해한 것 같다. 일상의 평범한 말을 주고받는 시우와 에반을 보던 니모들의 채팅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정말 청혼한 것 맞냐는 말들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Coco, Would you marry me if I asked?”
콘서트장에서 했던 말을 에반이 다시 입에 올리자 시우는 뜨악, 하는 표정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이 말을 또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정확히 이렇게 말하긴 했죠. 그런데 코코가 ‘Not yet’이래요.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니고.”
태연하게 니모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는 에반의 팔뚝을 시우가 제법 세게 때렸다.
이런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평범한 이야기만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건 네가 장난친 거잖아. 에바니가 엉뚱한 말을 자주 하니 그러려니 해요. 저희 스케줄은 일단 휴식기 좀 가지고, 다음 앨범 준비 들어가야죠. 영국에 오래 있진 않을 거고요.”
“시우 어디가 좋냐고요? 다 좋은데. 코코, 넌 내 어디가 좋아? 모두 궁금하시대.”
애써 이야기를 끌어 가는 시우와 다르게 에반은 채팅창에 시선을 두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저희 듀엣곡이요? 생각 안 해 봤어요. 이미 한번 해 봐서.”
같은 공간 다른 이야기인 대환장 라이브가 억지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잔뜩 긴장했던 시우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자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여전히 제 품에 안겨 있는 록시로 장난을 쳤다. 앞발을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든다거나 젤리를 보여 주던 시우의 시선이 채팅창을 향했다.
처음엔 폭주하듯 올라갔지만 이젠 어느 정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채팅창에 좋은 말만 있을 순 없다. 간간이 섞여 올라오는 비난을 보면서도 시큰둥하던 시우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것만 볼 순 없고 쓴소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속상한 건 속상한 거였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르잖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아는데도 에반이 아까우니 헤어지라는 내용의 채팅이 계속 올라오자 울컥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당장 헤어지라는 건 뭐래? 각인까지 한 마당에 헤어지긴 뭘 헤어져.”
시우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불퉁한 말이 나감과 동시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번 콘서트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하던 에반이 말을 멈췄고, 서성거리는 러쉬에게 개껌을 뜯어 주던 시우의 행동도 멈췄다. 채팅창엔 ‘각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이 폭주했다.
에반이 시우를 바라보았고, 굳어 있던 시우의 손에서 개껌을 받아 간 러쉬만 신이 나 펄쩍펄쩍 뛰었다.
당황한 시우가 천천히 에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에반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사고 치지 말라더니 더 큰 사고를 치는 건 항상 시우였다.
수습할 방법을 찾는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던 에반은 쉽사리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연애 이야기를 하지 말라더니 각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떤 경우야? 알파와 베타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 각인이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베타로 알려진 시우가 제일 중요한 사실을 만방에 공개해 버린 것이다.
이건 어떻게 또 덮을 건데? 아예 멘탈이 나가 버린 것 같은 시우의 모습에 에반은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일어났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끝나 버린 라이브의 마지막 화면은 한 손으로 라이브를 끄는 에반의 다른 손이 넋을 놓고 있는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