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욕실에서 나온 시우는 침대에 앉아 있는 에반을 보고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샤워하는 동안 생각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올게.”
화장대 앞에 서서 스킨을 바르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내 일인데 내가 수습해야지. 그리고 우리도 정리하자.”
에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시우는 표정 변화 없이 드라이어에 손을 댔다. 뜨거운 바람과 함께 쏟아져 나온 소음이 모든 것을 가렸다.
“김시우.”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소음을 뚫고 들어온 에반의 단호한 목소리와 페로몬에 그의 감정이 모두 들어 있었지만, 시우는 모르는 척 계속 머리를 말렸다.
단걸음에 다가온 에반이 드라이어를 끄고 시우를 돌려세웠다. 시우는 에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보자 오히려 더 요동치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았다.
“……놔. 어서 가서 정리해야지. 이런 거 시간 끌수록 말 불어나는 거 순식간이야.”
“내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내 일을 왜 네가 해결해. 말했지. 적당히 관여하라고. 네가 이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에바나, 그거 알아? 상처받는 일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도 안다는 거야. 어떤 식으로 하면 상대가 아파하는지 힘들어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내가 아팠던 일을 떠올리고 똑같이 하면 되거든.
“이래서 잠시라도 혼자 두면 안 된다니까, 조금이라도 여유를 주면 어떻게든 도망갈 생각부터 하거든. 김시우, 넌 나 없으면 못 살아.”
에반의 확신에 시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왜 내가 너 없이 못 살 거라고 생각해? 자만심도 적당히 가져.”
“감기 걸리기 전에 머리 마저 말리자.”
어느새 에반의 손에 들어간 드라이어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날리자 시우는 표정을 굳혔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제 머리를 말리는 에반의 턱선이 도드라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반의 손을 의도적으로 쳐 낸 시우는 그의 앞에서 벗어났다.
“우리 헤어지자고, 다 정리하자고.”
“시우, 너 지금 너무 감정적이야. 소속사 가고 싶으면 같이 가.”
담담한 에반의 말과 행동에 시우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화가 나 있는 것은 느껴지지만 그 뒤로 숨겨진 감정들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 거래, 지금 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하는 부탁이야. 다 정리하자.”
같이 시궁창을 구를 순 없잖아. 내가 널 여기까지 끌어내릴 순 없잖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깊어지기 전에, 더 힘들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그게 지금이야.
묘하게 구겨지는 에반의 표정에 시우의 삐뚜름한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상처 입었구나. 결국 내가 널 아프게 했네. 너를 더 아프게 할 말, 네게 상처를 내는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코코,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해? 네 말대로 시간 끌어서 좋은 일 아니니까, 우리 이야기는 그만하자.”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에반의 손목을 저도 모르게 잡았던 시우는 마치 더러운 것을 잡았다 놓는 것처럼 재빨리 손을 뗐다.
손을 잡는 순간 전해지는 온기와 페로몬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 정말 난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며 지낼 수 있을까? 같은 그룹에서 에반과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를 공유하고 그에게 말 못 할 추억을 혼자 쌓으면서 태연하게 지낼 수 있을까?
“조금 더 자는 게 좋겠다.”
눈을 감기 전.
에반의 마지막 표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웃는 건 아니었다.
에반은 쓰러지듯 무너지는 시우의 몸이 바닥에 닿기 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시우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끝까지 말할 수 없는 것은 더 많을 것 같다.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시우가 제 감정을 느끼듯 에반 역시 자신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차가운 표정으로 덤덤한 척 못된 말을 내뱉는 시우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듣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제게 상처를 주려고 모질게 말을 내뱉으면서 우는 건 시우의 가슴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리하고 싶은 이유도 알 것 같기에 헤어지자는 말에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시우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해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이 작은 머리로 왜 그리 많은 생각을 담는 것인지.
샤워하는 그 짧은 시간 시우가 했을 생각은 뻔했다.
타인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시우는 이 스캔들로 인해 오션과 제게 오점을 남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제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과의 이별이 꼭 필요할 테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도 나는 판국에 저와의 스캔들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결정을 내렸겠지.
MBX와의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니 당당하게 아니라고 큰소리칠 수 있겠지만, 자신과의 스캔들은 그러지 못하겠지. 같은 그룹 멤버와 그렇게 다니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면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우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이별을 말하는 건 전혀 아프지 않아. 이 말을 하기까지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마음과 상반되는 말을 하는 네가 아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시우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준 에반은 시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시우가 소속사 앞에 모습 드러내 봤자 난리만 나지. 그만 가죠.”
대환은 홀로 나오는 에반의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문을 닫는 것으로 뒤의 질문을 차단해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덜 끌기 위해 밴이 아닌 스포츠카의 운전대를 잡은 에반은 옆에 앉은 대환을 흘깃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또 뭐래요?”
“뭐가.”
“나랑 시우가 이야기하는 동안 연락 왔을 거 아니에요. 패를 보여 달라고요. 그래야 나도 확실하게 결정하죠.”
잠시 망설이던 대환이 늘어놓은 뻔한 말에 에반은 웃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시우는 원치 않는 이별을 말하며 가슴으로 그리 울었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먹먹함과 그와 비례하듯 제가 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사랑에 짓눌렸다.
그런데 이익만 좇는 놈들은 거래에 응할 생각이란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MBX와의 거래는 처음엔 독처럼 보여도 득이 될 확률이 높다. 잘만 이용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하지만 그게 자신과 시우의 이야기가 된다면 달라진다.
MBX의 생각이 뻔히 읽혔다. 이미 그들은 환희의 지저분한 관계를 알아챘을 것이고, 그나마 이쪽과 거래해서 시우와의 아름다운 연애를 그려 냄으로써 그것들을 다 덮을 생각일 것이다.
“다른 멤버들은요?”
“찬이랑 예찬은 숙소에 있고, 상준은 계속 작업실에. 일단 다 나오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으라고 했지.”
“아……. 피바람 불 때 라인 잘 잡아요. 내게 정보를 준 값.”
에반은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대환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역시나 소속사 근처에 포진해 있는 기자들을 보는 에반의 눈에선 웃음기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시우가 씻는 동안 변호사와 연락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소속사에 앉혀 놓은 대가리들이 썩었으니 그들과 거래를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단지 제가 직접 소속사로 가는 건 그들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필요에 의해 앉혀 놓은 자들이니 갈아 치우는 수고 정도는 직접 해야 했다.
[인정한 MBX, 부정한 Ocean. 진실은?]
[Ocean의 시우, MBX 환희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 없다?]
[MBX와 동행한 이는 누구? 일반인?]
[Ocean 측. 허위 기사 작성한 기자 및 언론 매체 법정 소송 준비 중]
불과 몇 시간 뒤. 상반된 내용의 뉴스들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Ocean이 인정하고 MBX가 부정했다면 쉽게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인기를 역행하는 상반된 입장에 작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뉴스는 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뉴스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던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못마땅하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 드렸잖아요. 왜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을까? 제 의견에 불만이시면 나가시면 됩니다. 퇴직금 두둑하게 드린다니까.”
어쩔 땐 돈의 힘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 회의랍시고 모여 있는 늙은이들은 시우가 아닌 에반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두 시우부터 찾아 댔다.
이미 둘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시선에 담겨 있는 더러운 추측이 너무 투명하게 보였다.
‘지금 당장 반박 기사 내고 소송을 준비할 겁니다. 지금껏 시우에 관한 악플러 역시 처벌한다고 말만 하고 미적거리던 것까지 한 번에 할 거고요.’
‘이미 MBX 측과 이야기 끝냈어. 석 달 뒤쯤 미니 앨범 나올 때 헤어지는 것으로 말 다 맞춰서 나가기로 했다. 시우는 한동안 나오지 말고 몸 사리라고 해.’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구나. 이 회사의 자본금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잊었어요? 그럼 이참에 투자금 싹 회수하고, 오션 해체하죠. 상준 형이야 디렉터 쪽으로 밀어주면 될 거고, 찬이 형은 연기 쪽에서 지금도 러브콜 오니까 그리 방향 잡으면 되겠네. 예찬이야 워낙 끼가 많아서 솔로로 나가도 잘할 거거든요. 오션 이대로 유지하면서 크는 거 보고 싶으면 닥치고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계시고, 불만이면 문 열고 나가시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기사 올라올 때까지 시간 드릴게요.’
조금 전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에반이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보는 에반의 눈빛엔 자비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