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49화 (149/187)

149화

“네. 둘 다 여기 있습니다.”

굳은 표정과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대환을 보며 에반은 침실 문 앞쪽으로 향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대환은 통화를 끝내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시우. MBX 환희랑 스캔들 났다.”

둘 사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대환이 침실로 가는 걸 막겠다는 듯 침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에반의 입에서 나온 헛웃음이 아슬아슬하던 분위기를 깼다.

“……그때 죽여 버릴걸. 정신이 없어서 잠시 미뤘더니.”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문지르며 무덤덤하게 내뱉는 에반의 말에 대환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반박 기사 내고, 소송 시작하죠.”

충전기를 연결한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는 에반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소리 소문 없이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부숴 버려도 되지만, 아무도 모르게 잊히게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추악한 그의 스캔들은 2년쯤 지나야 터질 것이었다. 스캔들이 터졌어도 그동안 쌓은 이미지와 위치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시작은 작은 스캔들이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그를 끌어내렸다.

그 시간을 기다리기보다 에반은 MBX의 활동을 막을 생각이었다.

다음 앨범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방송 출연도 점차 끊어 낼 계획이었다. 눈에서 멀어진다면 잊히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게 조용히 없애 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는다면 몸을 사릴 이유가 없었다.

“일단 시우와…….”

“시우에게 사실 확인이라도 하게요?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형, 일 크게 만들지 말죠.”

검색창을 연 에반은 애써 검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메인 화면에 올라와 있는 더러운 스캔들을 보자 입 안이 썼다. 사람들에게 거짓과 진실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저 가십이 필요할 뿐이다.

[MBX 환희 열애설 상대는? 신인 그룹 Ocean의 시우?]

[MBX 환희 열애설. 사실 확인 중]

[MBX 환희의 원픽. 신인 그룹 멤버?]

[MBX와 Ocean 양쪽 모두 묵묵부답]

인터넷 뉴스를 클릭한 에반은 소파에 걸터앉은 채, 추측을 잔뜩 넣어 한 편의 소설을 써 내려간 기사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연말 시상식장에서의 첫 만남 이후 여러 곳에서 보였다, 라……. 증거라고 올려놓은 흐릿한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헛웃음뿐이다.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 등으로 외모를 가린 사진들이었기에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MBX 환희와의 체격 차나 금발의 머리카락 등 끼워 맞추려고 하면 시우라고 우기는 것이 한편으로 이해가 되긴 했다.

친절하게도 기사에서는 MBX의 환희가 알파이기는 하지만 지금껏 대부분의 연애 상대는 베타라는 것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Ocean의 멤버도 베타라고…….

“이것 때문에 우리 핸드폰이 방전된 거네.”

뻐근한 목을 돌린 에반은 삐딱한 시선으로 옆에 앉아 있는 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대환은 에반의 거친 기분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었다.

“이 호텔이면 나랑 시우도 자주 갔고. 알죠? 여기 라운지 우리 자주 거는 거. 이 식당은 맛있기로 유명해서 두어 번 갔고. 클럽도 갔었고. 어떡하나, 동선이 다 겹쳐 버렸네.”

찬찬히 사진을 보면서 내뱉는 말에 대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냥 밝힐까요? 아이돌 그룹 내 연애 1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런 곳을 같이 다닌 사람이 그 개새끼가 아니고 나라고. 그게 좋겠네. 이 기사 쓴 기자 펜대 놓게 만들고. 대신 더 큰 사실을 밝히는 거지.”

마지막 말을 하면서 환하게 웃는 에반을 보자 정말 그럴 것 같아, 대환은 얼른 그의 팔을 잡았다. 명훈 형이 이미 시우에게 경고했다고 했다. 그리고 에반에게도 지나가듯 조심하라는 말을 흘렸다고 했는데…….

“그건 아니지. 명훈 형이랑 이야기 안 했어? 너희 이제 시작인데, 너랑 시우 사이는 다들 묵인하고 있지만…….”

“형, 명훈 형에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못 들었구나. 쓸데없는 말 시우한테 하면 그날로 오션 해체한다고 했는데. 명훈 형이 아무한테도 안 전했나 보네. 기자들 깔렸어요?”

“숙소랑 소속사 앞은 그렇지.”

잠시 화를 내는 것 같더니,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에반을 보며 대환은 제 머리를 마구 긁어 댔다. 진짜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반이 어려웠다.

“이렇게 허겁지겁 찾아온 이유나 말해 봐요.”

지금까지 한 대화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였다. 한데 무슨 이유가 더 있을까.

“시우에게 사실 확인하고, 우리 쪽도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저쪽에서 거래 들어왔대.”

“거래 내용이 뭔데요?”

“인정하고 몇 달 지내다가 헤어지는 루트. 일단 MBX 인지도 무시할 수 없고. 우리 봄에 미니 앨범도 있는데…….”

“진짜 재밌는 새끼들이네. 내가 왜 진작에 대가리들을 바꿀 생각을 안 했을까? 또 똑같이 하겠다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게 취미일 줄은 몰랐는데.”

에반은 계속해서 비슷한 내용을 복사하듯 내놓고 있는 가짜 뉴스들을 확인하다 휴대전화를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생수병 두 개를 꺼내 하나는 대환에게 던지고 차가운 물을 속으로 들이부었다.

“……형, 왔어요?”

지금껏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지 못한 시우가 눈을 비비고 나오다 멈춰 서서는 대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과 동시에 에반이 들고 있던 빈 생수통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형, 서재 방 좀 가 있어요. 시우랑 내가 먼저 이야기할게.”

이야기가 또 어디로 튈지, 시우가 어떻게 반응할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대환이 듣기를 원치 않은 에반은 침실에서 가장 먼 서재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곤 새 생수병을 들고는 막 침실에서 나온 시우의 손을 잡고 다시금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얌전히 저를 따라 들어온 시우를 침대에 앉힌 에반은 들고 온 생수병을 열어 시우에게 건넸다.

“왜? 스케줄 잡힌 거 있대?”

에반은 물을 조금 마시고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손을 뻗어 보드라운 볼을 감싸자 작게 미소 지은 시우가 제 손에 볼을 비비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제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우리는 왜…… 모든 것이 이렇게나 힘들까. 겨우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사이 조금의 행복이나마 누릴라치면 더 큰 일이 터진다. 급급하게 길을 찾아내면 또……. 언제까지 외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할까?

“코코.”

“빨리 준비하래?”

“놀라지 말고 들어. 해결할 수 있고, 내가 해결할 거야. 아무 일 없을 거고. 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거야.”

시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에반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미소를 지은 채, 제 손에 입 맞추고 장난을 치던 시우의 행동이 멎었다.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시렸다. 그를 진정시키려 페로몬을 풀었는데도, 시우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아니지?”

에반은 그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지금 시우는 둘의 스캔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가 아니야. MBX 환…….”

“나. 아니야. 에바나. 나 진짜 아니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작은 머리가 도리질을 쳤다. 여전히 시우의 볼을 쓸던 에반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은 시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알아. 네가 그 개새끼 만난 일 없다는 거 알아.”

“…….”

붉디붉은 입술이 떨리고 감정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까지 본 에반은 거칠게 솟구치는 제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해명하면 되는 거지? 아……. 대환 형이 그래서 왔구나. 지금 소속사 가면 돼? 가서 이사님이랑 모든 분들 앞에서 아니라고 말할게. 어……. 일단 아니라고, 그거 나 아니라고 반박 보도 내고.”

시우는 제가 얼마나 세게 제 손을 잡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입술을 벌벌 떨면서 느릿하게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꺼내고 있는 시우는 두려움에 먹혀들고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호소했다.

“네가 아닌 거 밝히고 허위 기사 쓴 기자에게 책임도 물을 거야. 이런 스캔들 잠시 반짝이다 금세 사그라드니 문제 될 거 없어.”

“씻고 대환 형이랑 소속사 갔다 올게.”

생명 줄인 것처럼 세게 잡고 있던 에반의 손을 놓은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반을 피해 욕실로 가려고 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제가 걱정했던 것은 에반과 자신의 스캔들이었는데, 제삼자와의 이슈라니.

“굳이 갈 필요 없어.”

“확실하게 해야지. 너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에게도 소속사에도 이미 문제는 생겼어.”

시우는 에반을 보는 제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마.”

“그런 거 안 해. 나 좀 씻자.”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시우는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저를 잡지 않는 에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욕실로 들어가 샤워 부스 안에서 물을 튼 시우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제 위로 쏟아지는 물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시우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운명은 조금의 행복도 허락할 수 없나 보다. 왜 제게만 이렇게 가혹한 것인지. 아프고 아프다 보면 무뎌질 줄 알았다. 담금질이 많을수록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감정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된 줄 알았는데, 상처는 여전히 아프고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거만하게 저를 내려다보던 그 얼굴이 떠오르고, 그가 내뱉은 더러운 말이 귀에서 울렸다. 왜 나일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머금어 질척하게 달라붙은 옷을 벗어 냈다.

고개를 젖히자 물줄기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그 물줄기를 맞는 시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나만 이러면 되니까. 에반에겐 어떤 흠도 가지 않는다.

오션의 이름에 먹칠을 했지만, 에반의 개인 커리어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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