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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48화 (148/187)

148화

제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지 못한 시우는 에반에게서 전해지는 뜨끈한 열기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짙은 술 냄새에 제가 취하는 기분이었다.

술 마셨으면 곱게 숙소로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숙소 가는 길에 상준 형이랑 코코가 라이브 하고 있길래 저도 같이 하고 싶어서 왔어요.”

평소보다 느릿하게 말하면서 시우의 등 뒤에 딱 붙은 에반은 딱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야…… 너 무거워. 저리 가.”

스탠딩 테이블과 에반의 사이에 끼어 버린 시우는 여전히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다른 손을 들어 제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는 에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 무거워?”

“당연히 무겁지. 네가 가벼울 것 같아?”

에반이 무겁다는 말을 듣자마자 조금 뒤로 물러서길래 시우는 냉큼 그의 품에서 벗어나 옆으로 몸을 옮겼다.

“진짜? 진짜 많이 무거워?”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에반은 카메라 쪽이 아닌 시우를 바라보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니모~ 지금 잘 봐 둬요. 에바니 술 취한 모습 보는 거 흔치 않아요. 멤버 중에 술이 가장 세거든요.”

에반의 시선을 무시한 시우는 술 냄새가 나는 걸 표현하려 제 코를 살짝 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이브는 또 망친 것 같고, 적당히 뭉뚱그려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 회식 자리나 ‘Ocean Story’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는 장면들이 방송으로 나간 적 있으니 에반이 취한 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멤버들 술버릇요? 딱히 뭐 없는데.”

에반이 술 취했다는 말에 아무래도 그와 관련된 질문이 많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에반이 얌전히 시우에게서 떨어져 옆에 서는 것을 확인한 상준은 사운드가 비지 않게 얼른 말을 꺼냈다.

“흥이 넘쳐 나는 예찬이는 노래를 많이 부르는 편이고, 찬이 형은 빨리 지치는 편이라 뒤에서 지켜보고. 또 뭐 있지?”

“코코는 애교도 많아지고, 엄청 적극적이어서 먼저…….”

슬쩍 몸을 움직여 시우와 에반이 붙어 있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제 머리로 가리던 상준은 에반이 냉큼 시우의 술버릇을 꺼내자 홱 돌아보았다.

“상준 형은 했던 말 또 하는 거. 어쨌거나 그렇게 튀거나 재밌는 술버릇은 없어요. 에반이는 보시는 것처럼 말이 좀 느려지고요.”

에반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그의 말을 가로챈 시우는 상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제발 알아채 주세요. 우리 지금 라이브 끝내지 않으면 에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라요.

“아…… 좋아하는 술이요? 뭐 술이야. 취향이니까. 요즘 제가 자기 전에 듣는 곡이 있는데요.”

눈치 빠른 상준이 팝송을 틀자, 시우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테이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쉿. 이제 라이브 끌 거야. 그냥 가만히 있어.”

제가 경고를 하든지 말든지 에반이 제 허리에 팔을 감고 배 위에 커다란 손바닥을 대자 얼른 그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처음부터 상준과 거리를 두고 라이브를 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지 몰랐다.

상준이 볼륨을 조절하는 것처럼 하면서 소리를 키우자 시우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만큼이나 당황하고 놀랐으면서도 어떻게든 방송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상준의 의지가 느껴진 것이다.

“나랑은 라이브 하는 거 싫다면서 상준 형이랑은 하고.”

진짜 술 취한 것인지. 술 취한 척하는 것인지.

작게 웅얼거리는 에반을 본 시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식 웃고 말았다. 눈이 풀린 거 보니 취하긴 했나 보네.

“네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그러지. 지금도 너 나만 보고 있잖아. 빨리 모니터 보고 소통하라고.”

계속 제 얼굴만 보고 있는 에반에게 시우는 또 작고 빠르게 속닥거렸다.

“야야! 둘 다 나가. 이거 내 라이브야. 어디서 내 라이브를 망치려 들어.”

실수인 척 음악 소리를 키웠다가 줄이고, 기계를 만지는 것처럼 바퀴 달린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떻게든 둘을 가리려던 상준은 뒤를 돌아보면서 진심을 담은 말을 뱉었다.

“설마요. 제가 형 라이브를 망치겠어요? 자자, 가자. 형 라이브 하게. 니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상준과 같은 마음인 시우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에반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제 물건들을 얼른 가방에 쑤셔 넣고 카메라를 향해 손 키스를 날리고 돌아섰다.

“니모, 다음에 코코랑 같이 올게요.”

다행히 에반 역시 무난히 끝인사를 하고 따라오기에 시우는 작업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으이구, 술 먹었으면 진짜 숙소나 가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밖으로 나온 시우는 애써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라이브 보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같이 회의 들어갔다가 점심 같이 먹은 거 기억 못 해?”

“그러니까 여덟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어.”

제 등에 딱 붙어 목선에 얼굴을 묻고 투정을 부리는 에반의 행동에 화를 내던 시우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이 악물고 참았다. 매번 어영부영 넘어갔더니 그의 행동은 갈수록 대범해졌고, 저 역시 해이해졌다.

“술 취한 사람과 내가 무슨 말을 해. 오늘 일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고. 대환 형은? 너 대환 형이 데려다준 거 아니야?”

“코코.”

“왜.”

“너 운전하고 싶지?”

에반이 먼저 운전이라는 단어를 꺼내더니 제 앞으로 불쑥 차 키를 내밀었다. 시우는 그의 손안에 있는 차 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그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오피스텔 가자.”

“뭐 이쁘다고 오피스텔을 같이 가.”

방금까지 뒤에 매달려 있더니 어느새 앞으로 온 에반은 차 키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넌 나 안 예뻐해 줘도 돼. 내가 너 예뻐할 수 있게 해 줘.”

꼭 이럴 때만…….

차마 그 웃는 얼굴을 외면할 수 없던 시우는 손을 뻗어 에반이 들고 있는 차 키를 낚아챘다.

“됐거든.”

에반보다 앞서 걷는 시우의 두 볼이 붉었다. 어느 순간부터 에반의 오피스텔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가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오피스텔에 가자는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술을 마시니 운전대를 넘겨주기는 하는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시우는 앞서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에반이 차 키를 건네주었으니 그의 차를 찾던 시우의 고개가 절로 옆으로 기울었다. 두리번거리는 시우의 시선에 제가 아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밴도 에반의 차도 제 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손에 든 차 키를 확인한 시우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차 키에 새겨져 있는 엠블럼과 바로 앞에 서 있는 붉은색 스포츠카의 마크가 같았다.

손끝에 힘을 주고 버튼을 누르자, 곤히 잠든 것 같던 스포츠카만이 이곳에 있는 차들 중 유일하게 반응했다.

“마음에 들어?”

“이거 뭐야?”

“너 빨간색 스포츠카 타고 싶다며. 빨리 갑시다, 김 기사. 나 피곤해.”

에반의 손에 떠밀린 시우는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에반은 의자 등받이를 조절하며 태연하게 자신을 김 기사라 불렀다.

“너 이 차…….”

“운전 조심해 주세요, 김 기사님.”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다는 듯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뇌물이야?”

“응.”

부드럽게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시우의 입에서 흥얼거리는 허밍이 흘러나왔다. 언제 또 이런 차를 몰아 보겠어. 예전의 자신이라면 칼같이 거절하고 정색을 했을 것이다.

신호에 맞춰 차를 멈춘 시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거절당하는 기분이 어떨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에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행동 모든 것이 운전 초보인 저를 위한 배려였다. 한껏 멋 부린 스포츠카보다 차체가 높고 튼튼한 SUV가 안전했기에 제게 SUV를 권하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한동안 SUV를 몰다가 언제든 차는 바꿀 수도 있었기에 그와 그리 길게 실랑이하지 않았다. 튼튼한 사륜 SUV에 만족하던 참이어서 스포츠카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그런 자신과 다르게 에반의 마음에 스포츠카가 남아 있었나 보다.

주위를 슬쩍 둘러본 시우는 안전벨트를 잡아 길게 늘이고는 에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고마워.”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에반에게 잡히기 전에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온 시우는 때마침 바뀐 신호에 맞춰 차를 출발시켰다.

“아…… 김시우. 진짜. 이런 건 SUV 탔을 때 하라고. 이래서 스포츠카가 싫다니까.”

에반의 투덜거림을 듣는 시우의 허밍이 점차 커졌다. ‘솔직히 나도 좀 아쉽긴 해.’라는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 *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방을 나선 에반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선 채로 작은 생수병 하나를 그 자리에서 비워 냈다. 목도 돌리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굳은 몸을 푸는 그의 입에선 지난밤 시우가 차 안에서 부르던 허밍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식빵을 집으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토스트에 주스로 이미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영화를 보면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던 시우는 또 잠들었다. 편안하게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낮잠이 길어지면 밤잠도 늦어지기에 슬슬 깨울 참이었다.

하지만 그리 자주 들르지 않는 오피스텔의 냉장고 안엔 마땅한 것이 없었다.

별수 없이 사과와 오렌지, 포도를 꺼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에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시우가 해장으로 즐기는 콩나물해장국이 떠오른 것이다. 간단하게 과일로 입가심으로 하고 저녁으로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 꺼졌대.”

충전기를 꽂아 놓지 않았더니 그새 방전이 됐는지 켜지지 않는 휴대전화에 충전기를 꽂던 에반은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지

“너…… 시우도 여깄지?”

이곳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시우와 자신, 대환이 전부였다. 스케줄도 없는 오늘 대환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급해 보이는 모습으로 허둥지둥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시우를 찾는 행동에 에반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시우는 왜요.”

거실과 부엌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거침없이 침실로 향하는 그 행동에 에반은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지금 그게 문제야? 둘 다 폰도 꺼져 있고. 진짜 환장하겠네.”

때마침 대환이 들고 있는 그의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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