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활짝 열린 옷장은 텅텅 비어 있고 나란히 꽂혀 있어야 할 책들도 한껏 흐트러져 있다.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제 옷이며 물건, 모든 것이 난잡하게 널려 있는 방 안. 그리고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침대 가운데에 시우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 맞지도 않는 제 옷을 입은 시우가 끌어안고 있는 당근 인형도 제 옷을 입고 있다.
옷장에서 꺼낸 것이 분명한 제 옷들은 시우의 주위에 잔뜩 쌓여 있었다.
“우리…… 어떡하냐.”
옅게 떨리던 에반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반이 눈을 감자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내 다시 눈을 뜬 에반은 침대로 다가가 시우가 제 주위를 감싸듯 둥글게 쌓아 놓은 제 옷들을 밀어냈다.
제가 누울 자리를 만든 에반은 깊게 잠든 시우를 끌어안았다. 그가 꼭 끌어안고 있던 당근 인형을 조심스럽게 빼내자 이내 따스한 작은 몸이 제게 붙어 왔다.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시우야.”
잠든 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드러나는 이마에 입을 맞추는 에반의 목소리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제 손길에도 깨지 않는 시우를 보는 에반의 눈빛에 짙은 어둠이 서렸다.
제 방을 이렇게 만드는 동안 시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제가 왜 이러는지 이유조차 모를 것이다. 내일 아침 눈을 뜬 시우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이것을 설명할 단어를 고르고 골라야 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에반은 점차 망설이는 일이 많아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시우의 옆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표현하지 않지 않는 시우 대신 그의 페로몬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흔들리면서도 시우는 저를 보고 예쁘게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같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에 너무 빨리 마음을 놓아 버렸다.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3박 4일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시우에겐 그 어떤 시간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 내기 위해 시우는 본능적으로 둥지를 만들고 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많이 기다렸지?”
시우가 만들어 놓은 어지러운 둥지를 응시하던 에반은 눈을 감고 시우의 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깨어나지 않는 시우를 끌어안는 에반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낮은 빈도수이긴 하지만 알파와 떨어져 있는 것을 힘겨워하는 오메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오메가들은 대부분 임신 중이었다. 알파가 없는 자리를 그들의 페로몬이 가득 묻은 물건들로 채우려 들었다.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에서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 페로몬이 사라지면 극도의 불안함에 시달렸다.
그걸 이겨 내기 위해 알파의 물건을 찾고 그 옷에 배어 있는 페로몬이라도 찾으려 드는 것이다.
이럴까 봐.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상황에서 무엇을 예측할 수 있을까.
가능성 없는 일이었기에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일까지 일어나 버렸다.
제 욕심을 누르고 눌러 각인을 하지 않았다. 시우와 수없이 관계를 맺으면서도 노팅 역시 하지 않았다. 각인을 맺지도 않고 아이를 가지지도 않은 시우가 만들어 놓은 이 둥지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대로 영원하다면 좋겠지만 제가 사라지면 시우는 혼자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버틸까.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이렇게 또 둥지를 만들겠지. 그러다 이 모든 물건에서 페로몬이 옅어지면 그러면…….
한참을 그렇게 시우를 끌어안고 있던 에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우가 어질러 놓은 모든 것들을 치웠다. 어떤 결심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언제 왔어?”
“너 잘 때.”
방 정리를 마치고 다시 시우를 끌어안고 누웠던 에반은 눈도 뜨지 못한 시우가 품 안으로 파고들면서 웅얼거리는 말에 나지막이 대답했다.
“왔으면 깨우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나 안 보고 싶었어?”
조용한 공간에 둘의 편안한 목소리가 오갔다. 아직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시우는 그의 가슴에 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고, 에반 역시 억지로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애야? 네가 왜 보고 싶어. 그렇게 전화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보고 싶었어. 너랑 동행하는 거 아니면 해외에서 하는 스케줄은 아무것도 안 잡을 거야.”
“또 시작이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는 거랬잖아.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그러다 나중에 후회해. 남들은 뜨고 싶어서 난리인데, 넌 왜 오는 기회를 죄다 날리려고 하는 거야.”
“난 네가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자고 울었단 말이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지.”
어린아이 같은 에반의 투정을 듣던 시우는 번뜩 스치는 기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으로 에반의 방을 훑어보던 시우는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워 허리를 감싸 안는 에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 떠오른 기억은 꿈일까? 미친 듯이 이 방 안을 돌아다녔다. 옷장을 열어 에반의 옷을 다 끄집어내고 그의 옷을 허겁지겁 끌어안고서 얼굴을 묻었었다.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마구잡이로 침대 위에 쌓았었는데…….
흐트러짐 없이 평소와 같은 에반의 방을 본 시우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마나 잔 거지? 드라이브에서 돌아와서 곧장 에반의 방으로 들어왔었다.
“밥 먹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로 배고프다면서 밥을 먹자며 일어나는 에반을 따라 시우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코코. 너도 같이 먹을 거지?”
무언가 놓친 것 같지만, 계속해서 에반이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 *
“진짜 지금 할 거예요?”
시우는 스탠딩 테이블에 선 채, 종이에 끄적거리고 있던 펜을 놓았다.
“작업실 옮기고 난 뒤에 딱히 소통한 적도 없고. 계속 라이브 하라는데 귀찮아서 빨리 해치우려고.”
“그럼 저 가고 난 뒤에 해요.”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될 것 같아 모처럼 상준의 작업실을 찾은 시우는 뜬금없이 라이브를 하겠다는 상준의 말에 꺼내 놓고 있던 제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잠깐만 하면 되니까 같이 해. 그냥 거기 서서 손이나 흔들어.”
“싫어요. 형 라이브잖아요.”
라이브 할 때마다 묘하게 망친 적이 많은 시우는 이제 단체로 하는 라이브가 아닌 다음에야 기를 쓰고 피하는 중이었다.
“얀마, 라이브에 니 거 내 거가 어딨어. 너도 요즘 안 했다며. 같이 하고 치워. 명훈 형 잔소리도 지겹다, 지겨워.”
말을 마치기 무섭게 라이브를 켜 버린 상준의 행동에 시우는 움직이고 있던 손을 멈췄다. 상준의 앞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상준과 제 모습이 보였다.
상준 형 카메라에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떨어진 곳. 거기다 스탠딩 테이블 너머에 서 있던 시우는 제 모습이 상대적으로 작게 나오자 어색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긁었다.
“네네. 오늘은 시우랑 같이 있습니다.”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을 확인한 상준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자 시우는 작게 웃고 말았다. 이미 시작한 마당에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그냥 참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계속 제게도 라이브를 하라고 했으니.
더군다나 오늘은 에반도 없었다. 저녁에 누구 만난다고 하던데, 가기 싫다고 징징거려서 등을 때려 가며 쫓아내 버렸다. 요즘 들어 왜 그렇게 제 옆에 못 붙어 있어서 안달인 것인지. 잠시라도 제가 보이지 않으면 전화에 문자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오늘 오전엔 굳이 제가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까지 따라 들어가야 했다.
“12월 초에 작업실 옮겼는데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정리하고 뭐 이것저것 하느라 바빴습니다.”
거리가 있어 채팅창이 잘 안 보이는지라 시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라이브에 접속했다.
“저는 화면이랑 멀어서 채팅창이 안 보였어요. 오늘은 상준 형 작업실에 잠시 놀러 온 건데, 가려다가 지금 잡힌 거예요.”
빠르게 올라가는 내용을 보다가 라이브 시작 이후 처음으로 말을 꺼낸 시우는 왜 그리 멀리 있냐고 앞으로 오라는 내용을 보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쟤 못 와요. 오면 안 돼.”
“맞아요. 상준 형이 내외해서 이 테이블 너머 앞으로 가면 우리 사이 어색해져서 큰일 나요.”
“같은 집에 몇 년째 살고 있지만, 착실하게 내외하고 있죠.”
티키타카 같은 대화를 나누며 오랜만에 팬들과 소통하는 재미에 한껏 올라간 시우의 입꼬리가 쉽사리 내려오지 않았다.
“역시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니까 더 좋죠? 아, 그리고 이번 미니 앨범 기대하세요. 시우가 왜 여기 있는지 아실 겁니다.”
뜬금없는 상준의 말에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른 손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었다.
“이 형님이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여러분, 그런 거 아니에요. 저 놀러 온 거 맞아요.”
“김시우, 쉿. 쟤가 우는소리 하는 거 흘리세요. 잘하고 있어요.”
“진짜 아닌데.”
스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조금 끄적거리긴 했지만 한참이나 부족했다. 과연 이렇게 써도 될지 확신조차 없었다.
30분 정도 무난하게 라이브를 하던 시우는 이만 끝내자는 듯한 상준의 작은 제스처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라이브를 끝내려 상준과 눈짓을 주고받던 시우는 모니터를 통해 꼭 닫혀 있던 작업실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윽…….”
문이 열리고 검은 인영이 드리우는 것까지 모니터를 통해 보고 누군지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덮치는 힘에 시우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라이브 중이야.”
놀란 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우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페로몬과 함께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뒤에서 저를 와락 끌어안고 버릇대로 제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에반의 입에서 느린 말이 흘러나왔다.
“……니모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