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가. 술이 달다.
유리잔을 흔들 때면 녹은 얼음이 잔에 부딪치며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우는 귓가에 유리잔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몇 번이나 흔들었다.
“참, 너 그거 어찌 됐냐?”
잔에서 들리는 맑은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시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상준을 바라보았다.
“뭐요?”
말은 먼저 꺼내 놓고 스트레이트 잔에 든 술을 마시는 상준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던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지금 작사에 관한 걸 묻고 있었다. 들으면서 생각해 보라며 상준은 음악 파일을 제게 보내 주기도 했다.
차마 시우는 그 곡조차 다시 듣지 못했다.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선율에 저주이니 운명이니 원망스러운 제 마음이 녹아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포기하겠다는 말도 그에게 전하지 못했다. 기다려 주겠더니 보름도 안 돼서 재촉하는 게 어디 있어.
“기다려 준다면서요.”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꾹꾹 눌러 없던 것처럼 숨겨 버린 감정도 끌어 올렸고, 과감하게 입 밖으로 내뱉게 만들었다.
“그러긴 했지. 그냥 생각나더라고.”
불퉁한 시우의 대답에 역시나 그만큼이나 무성의한 답을 뱉은 상준이 시우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는 듯 시우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에반이 넌 바쁘더라.”
상준의 관심사는 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에반에게로 향했다.
“그러게요. 내키지 않는 게 문제죠.”
대답하는 에반의 시선은 제 옆에 있는 시우에게 닿아 있었다. 마치 어디 하나라도 닿는 부분이 없으면 불안한 것처럼 시우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목뒤를 주무르기도 하고, 어깨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착석한 그 순간부터 에반의 손은 계속해 시우를 만지작거렸고, 시우는 이미 그의 손길이 익숙한 것인지 고스란히 그 손길을 받아 냈다.
“CF 찍으러 간다며.”
그래, 한창 좋을 때지. 카메라 앞에서나마 내외해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입 안에 든 술을 혀로 굴리며 상준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두루두루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시우는 지금도 예찬이 술잔을 비우자마자 앞에 있던 과일을 건네고 있었다. 반면 에반은 언제나 올곧게 시우만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에겐 제대로 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우가 예찬에게 과일을 건네자마자, 표정을 찌푸린 에반이 시우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시우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에반에게 뭐라고 속닥거리면서도 시우의 손은 과일로 향했고, 포도 한 알을 집어 에반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제야 에반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보니 당기는 건 술이었다.
“영화 찍는 것보다 CF가 간단하니까요. 이번 곡 좀 나왔어요?”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 같더니 용케도 제 말은 듣고 있었는지 조금 늦게 돌아온 대답에 상준은 에반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네가 원하는 곡이 그렇게 막 나오는 줄 아냐? 네가 창작자의 고통을 알아?”
“시우한테는 금방 곡 줬다면서요.”
“그건 써 놓은 거고.”
상준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에반의 시선은 시우에게 머물러 있었다. 에반은 시우의 손에서 술잔을 빼내려 했고, 시우는 더 마실 거라며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다섯 명이 있는 공간이었지만 대화는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적당히 취한 예찬과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난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일찍 지친 찬은 소파에 거의 드러누워 휴대전화로 춤을 추는 이들을 찍었다.
이렇게나 다른 이들이 모였지만 나름 잘 굴러가는 게 용하다는 생각을 하며 상준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앞에 있는 두 놈을 보고 있으면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선율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반의 시선은 역시나 살랑살랑 몸을 흔들면서 웃고 있는 시우에게 닿아 있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시우가 오메가 같긴 한데. 생각이 문득 거기까지 다다른 상준은 테이블 아래에서 발을 움직여 에반의 발을 툭 쳤다. 한쪽 눈썹을 실룩이며 자신을 보는 에반의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시우. 내가 생각하는 거 맞냐?”
딱히 이런 이야기를 할 경황이 없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나눴던 이야기나 시상식의 밤이나 대충 뒤이어진 상황을 생각하면 결론은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예찬이와 찬과 저렇게 지내는 걸 보노라면 모든 것이 모호했다.
대답은 하지 않고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 푼 에반의 시선이 또 시우를 찾았다.
“네.”
“후발현?”
에반과 상준의 대화는 시끄러운 음악과 한껏 흥이 난 예찬과 시우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아뇨. 처음부터 나만 아는 거.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 되려나? 그건 또 아니네. 코코는 내가 없어도 되지만, 난 절대 그럴 수 없는 게 문제라고나 할까? 형, 그거 알아요? 난 지금도 무섭거든요. 무서워 죽을 것 같아.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에반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저렇게 둘이 재밌게 노는데. 우리는 같은 그룹의 멤버이고 둘은 아주 친한 형, 동생 또는 멤버인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냐면 예찬이를 치워 내야 할까? 아니면 시우를 잡아야 할까 이런 거? 시우는 아이돌이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데. 시우를 보는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피식 웃으며 술을 마시는 에반의 모습에 상준은 입을 다물었다.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어쩌면 약간 미소도 지은 채 시우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는 에반의 말은 섬뜩했다. 시우가 오메가임을 인정하고 난 이후에 하는 말이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뭐 그리 심각해. 설마 내가 진짜 그러겠어요? 그랬다가 시우가 나 미워하면 어떡해. 코코, 이리 와.”
빈 술잔을 제법 큰 소리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에반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시우를 불렀다. 방금까지 예찬과 장난을 치고 놀던 시우는 에반의 부름에 금세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물 좀 마셔. 너 취한 것 같아.”
에반은 얼음물을 건넸지만, 시우가 선택한 것은 술이었다.
“이보세요, 제가 이래 봬도 좀 마시거든요. 님 걱정이나 하세요.”
시우는 식도를 타고 화끈하게 내려가는 술을 즐기며 에반의 가슴을 가볍게 툭툭 쳤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적당히 어질어질하고 붕 뜬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힘들 때 잊으려고 또는 취해서 잠들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흥겨운 음악 속에서 즐겁게 마시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제대로 된 안무가 아니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음악에 따라 몸을 흔드는 것도 좋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음악에 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춤을 추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려도 흥겨웠다. 한창 흥이 올라 있는데, 기껏 저를 불러 놓고는 술 취하지 말라고 얼음물을 건네는 에반이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너 술버릇 안 좋아.”
“네가 어떻게 알아? 넌 절대 몰라.”
단호한 시우의 대답에 에반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그래도 괜찮아. 몰라도 돼.”
생긋 웃으며 모호한 말을 늘어놓는 시우의 손끝이 에반의 미간에 닿았다. 그러고는 살살 문지르며 구겨진 그의 표정을 펴려고 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건 알잖아. 그거면 돼.”
서로의 숨결이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우는 에반을 달래듯 속삭였다. 하지만 에반의 굳은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하고 흐릿하게 보여 시우는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에반의 질문에 시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잘생긴 에반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페로몬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에반이 같은 질문을 하자 시우는 그의 미간을 만지던 손을 옮겨 에반의 볼을 감쌌다.
“아니. 없어.”
한숨이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시우의 두 눈이 감겼다.
“…….”
방금까지 소파에 누워 있던 찬은 어느새 일어나 예찬과 장난을 치고 있었기에 홀로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던 상준의 손에서 육포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거 팝콘 각이네. 이쯤에서 키스 가나요? 이런 생각에 다다를 때쯤 시우는 에반의 품에 풀썩 안겨 버렸고 에반은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자냐?”
“네.”
뭐 이런 허무하고 어이없는 상황이 다 있나? 오히려 집중하고 있던 상준이 진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제 품에서 그렇게 잠든 시우를 추슬러 편하게 안은 에반은 상준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뭘 그렇게 아쉬워해요? 환장하겠는 건 난데. 공짜로 좋은 구경 했으면 괜찮은 곡이나 내놔요.”
“원래 그래?”
시우가 애교가 없고 무뚝뚝하고 시크한 상남자라고 누가 그랬지? 숨길 생각이 없는 에반은 잠든 시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저거 여우였네.”
“여우이기만 할까. 됐고. 미니 앨범에 그 곡 실을 거예요?”
오늘 제 주량의 끝을 보겠다는 듯 부어라 마셔라 춤춰라를 시전하던 예찬이 소파 한쪽에서 잠들고, 남은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미니 앨범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에반과 상준이었고, 찬은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깨지 않는 시우를 챙긴 에반은 숙소로 돌아가는 것 대신 근처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에반은 깨어날 생각이 없는 시우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돌아서려다 긴 한숨과 함께 그 옆에 누웠다. 씻고 시우의 옷도 갈아입히고, 얼굴과 손발이라도 닦아 줘야 하는데, 뒤늦게 올라오는 술기운에 온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같은 공간을 쓰고 숨결을 나누고 수많은 것을 같이 하는데도, 수없이 고백하고 달콤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커져 가는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린 에반은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술 냄새와 조절할 생각조차 없어 흘러나오는 대로 내버려 둔 제 페로몬 속에서 시우의 향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에반은 제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눈가를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새 잠이 들었던 것일까? 그런 것을 깨닫기도 전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 위에 앉아 있는 시우였다.
“코코.”
꽉 잠긴 목 상태에 에반의 입에서 나온 짧은 단어는 제대로 된 소리로 바뀌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들이치는 시우였다.
“……하…… 일어났으면…….”
시우의 신음 섞인 목소리에 에반의 손이 훤히 드러나 있는 시우의 허리에 닿았다. 제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이 꿈처럼 느껴졌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불규칙한 숨결. 짙게 퍼진 음란한 시우의 페로몬이 에반의 폐를 가득 채웠다.
“어서…… 움직여.”
시우의 뜨거운 두 손이 제 가슴에 닿아 있었고, 가는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 에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지금은 일의 순서를 따질 때가 아니라, 저를 탐하는 제 연인을 만족시켜 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