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모든 촬영이 끝나고 놀이공원을 나가며 아름답고 화려한 불빛에 휩싸인 채 멈춰 있는 회전목마의 옆을 지나치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탈래? 지금 말하면 탈 수 있을 텐데.”
촬영 중간 쉬는 시간에도 에반은 제게 회전목마를 타지 않겠냐고 권했다.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우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루 종일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회전목마였다.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회전목마의 휴식 시간은 지금부터였다.
겨우 멈춘 회전목마를 왜? 에반과 함께 이 시간대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시우는 굳이 멈춰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우가 입고 있는 후드 티셔츠 주머니 안에는 노란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어수선한 틈을 타 시우는 계속해서 자신의 눈길을 끌던 미니 게임장으로 향했다. 벽에 붙어 있는 알록달록한 수많은 풍선을 보자 실소가 흘러나왔다.
끝내 전하지 못했던 노란 새가 떠오른 것이다. 전해 줬다면 또 달라졌을까?
짧게 한숨을 끊어 쉬고 돌아서려던 시우의 눈에 비슷하게 생긴 노란 새가 들어왔다.
“하고 싶어요?”
촬영장엔 스태프와 멤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말을 건 사람의 옷을 보니 놀이공원 관계자인 것 같았다.
“아…… 그게.”
“뭐 기계를 켜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요. 총으로 드려요? 다트?”
자신보다 적극적인 관계자의 권유에 어느새 시우는 다트를 들고 있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열 개 다 맞힐 수 있었는데, 아홉 개의 풍선만 터트린 시우는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은 노란 새를 가리켰다. 고리가 달려 있는 작은 새는 그렇게 시우의 손에 들어왔다.
“화났어?”
“아니.”
밴에 오른 시우는 자신을 향해 몸을 틀어 앉은 에반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는 늘 그가 들고 다니는 검은색 메신저 백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진짜 짠 게 아니라 예찬이가 그때…….”
아직도 에반은 귀신의 집 팀 사건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건 잊은 지가 언젠데.
또 들고 있다가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작아서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주머니에서 작은 새를 꺼낸 시우는 에반의 가방에 새를 달았다.
심플한 디자인의 일반 명품도 아니고 개인 오더로 주문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비싼 가방에 달린 조잡한 싸구려 노란 새가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아까 팀 사건은 이해해 줄게. 대신 이거 잃어버리면 진짜 화낼 거야.”
그 새가 나거든. 이번에도 못 주면 진짜 후회할 것 같아서, 그 고급 가방이 너라면 경품 중에서도 제일 낮은 단계의 그 새가 나거든. 이렇게나 어울리지 않는데, 그걸 아는데.
그래도…….
시우는 가방과 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새는 어디서 났어?”
시우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에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밀.”
비밀이야. 차마 가져오지 못한 그 시간대의 새를 이 새로 대신하는 거야. 정말 주고 싶은 건 그 새이긴 한데, 내가 처음으로 네게 주고 싶었던 거.
“너 닮았다.”
“뭐라고?”
“조그맣고 노란 게. 거기다 봐, 여기 주둥이도 톡 튀어나…….”
그 새가 자신인 건 맞지만, 대번에 그걸 알아채는 에반이 얄미워 시우는 가방을 그에게 던져 버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시우의 귀가 한껏 붉어져 있었다.
* * *
“추워?”
에반의 말에 시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번엔 참으로 많은 일을 해 보는구나.
12월 31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
제법 많은 연예인들과 사회자 그리고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우는 야외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시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 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은 스케줄로 이어졌다. 몇 시간째 야외에서 이어지는 행사에 시우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두툼한 패딩에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추위를 이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직업은 그런 것이었다.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더운 일은 흔했다.
고급스러운 정장 안 여기저기에 핫팩을 붙여 놓고, 신발 안에도 바지 주머니 안에도 핫팩을 넣고 있지만, 추위의 절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카운트다운 곧 들어갈 거야.”
바로 뒤에 에반이 딱 붙어서 하는 말에 시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춥긴 춥다. 무대 위엔 오늘 행사에 참여한 모든 연예인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삼삼오오 인사를 하고 가까운 연예인들과 잡담을 나눴다.
성격 좋은 예찬은 다른 그룹 멤버와 방방 뛰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상준 역시 음악 작업을 같이 진행 중인 솔로 가수와 대화를 나눴다.
딱히 친한 연예인도 없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가볍게 몸을 움직이던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방금까지 뒤에서 칼바람이 불었는데, 갑자기 옅은 온기가 느껴져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바로 하고는 몸을 살짝 틀어 뒤를 돌아봤다.
에반은 옆에 있는 다른 그룹의 멤버와 시선을 맞춘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었다. 코트 단추를 다 푼 에반이 뒤에서 자신을 살짝 감싼 것이었다.
졸지에 에반의 따스한 품에 안긴 시우는 손으로 에반의 배를 짚으며 슬쩍 그를 밀어냈다.
신인에 가까웠기에 그들은 무대의 뒤쪽에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였다.
“춥잖아.”
가만히 있으라는 듯 한 팔로 제 허리를 감는 그 대범함에 시우의 눈이 커졌다.
“감기 걸리면 너만 손해야.”
놓아주지 않는 에반과 그 품을 벗어나려는 시우의 작은 실랑이 중 요란스럽게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시우가 파드득 뛰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수선한 상황이라 에반 역시 카운트다운을 세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차피 뒤쪽이고 뭐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또 어떤가? 추위에 노출된 모든 이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이래서 시우에게도 코트를 입혀 달라고 했지만, 오늘 의상을 코트로 가릴 수 없다며 코디 팀은 완강했다.
밖에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대 뒤 대기실에 있다가 공연할 때와 카운트다운을 할 때만 잠시 있으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제 주머니에 있는 핫팩까지 시우에게 다 줬지만, 자정에 가까워지면서 칼바람까지 불었기에 에반은 바람이라도 막아 주려 했다. 그래서 코트 단추를 풀고 시우의 뒤쪽에 가까이 붙어서 감싸자 또 예민하게 구는 시우가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실랑이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에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번 시작됐으면 연이어 폭죽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계속해서 움찔거리며 놀라는 시우의 두 귀를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있던 시우의 귀와 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너무 놀라기에 소리를 가려 주려 귀를 손으로 감싼 것이지만 싸늘한 피부를 느끼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내 작은 손이 올라와 자신의 손등을 두드렸다. 얼른 손을 떼라는 것이겠지.
에반은 손을 떼는 대신 상체를 살짝 숙였다. 늘 느끼고 싶은 자두 향 대신 시우가 뿌리는 향수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이것저것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등을 두드려도 손을 치워 주지 않자, 시우는 제 손등을 잡았다. 급기야 이제는 힘으로 떼어 내려고 했다. 에반은 손의 힘을 풀며 시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작년보다 올해 더.”
작은 몸이 홱 돌더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소음에 그 소리가 묻혔기에 에반은 조금 더 상체를 숙여 시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당장 내 몸에서 손 떼면 나도 더 사랑해 줄게.”
제 연인은 사랑 고백을 협박조로 하는 취미가 있었다.
“진짜 가야겠어?”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텐션으로 날아다니는 예찬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멤버 중 유일한 미성년자였던 예찬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모든 곳을 다닐 수 있는 날이 된 것이다.
“네.”
무대 의상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멤버들의 시선이 한껏 신나 있는 예찬에게 닿았다. 한창 노는 것을 좋아하는 혈기왕성한 어린 강아지가 주인의 손에 들린 공을 보는 눈빛 같았다.
“가자, 가. 뭐 어렵다고. 내일 스케줄도 없잖아.”
머뭇거리는 멤버 대신 예찬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명훈이었다.
“너희들도 다 가는 거지?”
마지막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시우는 또 어디론가 가는 분위기에 얼른 찬을 바라보았다. 오늘 스케줄은 이게 끝 아니었나? 12시 30분이 넘어가는 시각에 할 만한 스케줄은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은 새해 첫날이지 않은가.
“안 갔다가는 쟤 울 것 같은데요. 울 막내 소원인데 들어줘야지. 어떡해요.”
의자에 앉아 있던 상준이 일어나면서 하는 말에 예찬은 상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비켜, 인마. 징그러워. 상준이 제게 달라붙은 예찬을 떼어 내려 했지만, 힘으로 그를 이기지 못한 상준이 예찬을 등에 단 채로 대기실을 나갔다.
* * *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을 들어서는 시우의 입가엔 예찬보다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있지만, 생각해 보니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클럽이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1시가 넘은 시각의 클럽은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고, 클럽의 VVIP 룸엔 이미 거하게 안주와 술이 세팅되어 있었다.
“강예찬. 너 이제 또 클럽, 클럽 노래 부르면 형한테 죽는다.”
“넵!”
“노는 건 좋은데 스테이지 안 되는 건 당연히 알 테고. 강예찬, 넌 주량 모르니 적당히 해라. 찬이가 잘 챙기고. 우린 옆방에 있을 테니까 뭔 일 있으면 옆방으로 와.”
오늘은 스태프들도 놀 생각인지 몇 가지 경고 사항을 전한 명훈이 룸을 나가자 시우는 얼른 걸치고 있던 패딩부터 벗었다.
꽤 자주 들락거리던 클럽이지만, 이렇게 룸까지 잡고 놀아 본 적은 없었기에 괜스레 들떴다. 내일 스케줄도 없겠다, 알아서 고급 양주도 세팅해 주셨겠다. 오늘은 뒷일 생각 없이 즐기고 놀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클럽의 꽃은 스테이지에서 춤추고 노는 것인데. 시우는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네도 첨인가?”
“아마도요.”
상석에 앉아 여기저기 놓여 있는 양주를 확인하던 상준의 말에 무덤덤한 에반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제야 시우는 흥분으로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여기도 처음이구나. 뭐든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거였네.
“코코, 소맥?”
테이블 위를 훑어본 에반의 말에 시우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같은 날은 나도 양주지. 이런 비싼 양주 공짜로 먹을 수 있는 날이 흔한 줄 알아? 최애가 소맥이라고 해서 항상 소맥을 마시는 건 아니었다.
“이걸 마시겠다고?”
“왜?”
양주병을 들고 벌써 상준과 찬에게 술을 따라 주던 에반의 반문을 들으면서도 시우는 냉큼 양주잔을 에반에게 내밀었다.
“네 술주정을 알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내가 뭐?”
내 술주정이 뭐 어때서? 이번 시간대에선 곯아떨어질 만큼 과하게 먹어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긴 했지만, 자신의 술주정은 한결같았다.
반지하에서 눈뜨는 기분을 알아? 너넨 내 맘 몰라. 또는 정신 놓고 잠드는 것이 전부였다.
반지하 타령이나 내 맘 몰라 같은 건 수없이 해 봤기에 그걸 듣는 이들의 반응도 충분히 예상했다. 그냥 술 취한 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치부할 것이 뻔했다. 항상 반지하 셋방에 살긴 했으니 그냥 불쌍한 놈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번엔 반지하 셋방에서 시작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술 취한 이의 헛소리엔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마셔.”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던 에반은 시우의 손에서 작은 스트레이트 잔을 빼냈다.
“대신 넌 언더록스.”
얼음이 든 잔에 술이 조금 깔렸다. 더 부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시우는 용케 그 말을 삼켰다. 술자리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