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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41화 (141/187)

141화

“괜찮아. 나 왔잖아.”

자신의 목에 팔을 감고 어깨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서 엉엉 우는 시우를 다독이는 에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무겁게 짓누르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에반의 품에서 한바탕 울고 난 시우는 밀려드는 머쓱함에 다시금 카메라 감독님들께 사과의 말을 전했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촬영 중이라는 것도 완전히 잊었다.

“제가 진짜…… 이런 거 별로 안 무서워했는데.”

손으로 젖은 볼을 닦은 시우의 입에서 웅얼웅얼 변명의 말이 흘러나왔다.

“중간 문으로 나가자.”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이 나갈 수 있는 문이 군데군데 있었기에 에반은 시우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 주면서 말했다.

“이름표.”

“미션 실패할 수도 있지. 누구도 억지로 네가 이걸 하길 원하지 않아.”

“그래도 그거 자유 이용권이 걸려 있잖아.”

“그래서 이름표 찾고 끝까지 가겠다고?”

방금까지 잔뜩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던 시우였다. 거기다 지금도 겁에 질린 건 여전했다. 귀신의 집에서는 심박 수를 측정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심박 수 측정기를 뺐지만, 만약 계속 착용하고 있었다면 최고 기록을 찍었을 만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 제 심장이 터질 듯이 뛰던 것을 에반은 정확히 기억했다.

망설이는 것 같던 시우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이자, 뒤에서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에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끝까지 가야지, 뭐. 어쨌거나 나도 여기 들어 왔고. 우리 같이 가도 되죠?”

카메라 감독님들께 그래도 되냐는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이미 그건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같이 가겠다는 통보였다.

“내가 먼저 가?”

이름표를 꼭 찾아야 한다고 하더니 제 상의 옷깃을 잡은 채, 젖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우를 본 에반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말을 꺼냈다. 한동안 휘몰아치던 감정 동화는 어느새 뚝 끊어졌다.

하지만 시우가 무겁던 감정을 이겨 낸 것을 알기에 이리 웃을 수 있으리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겠지만 분명 눈가도 코도 입술도 한껏 붉어져 있을 것이다. 길고 촘촘한 눈썹은 잔뜩 젖어 있을 것이고.

에반의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때쯤 작은 손이 그의 몸을 밀었다. 차마 먼저 가라는 말은 못 하겠는지 손으로 저를 꾹꾹 미는 행동에 에반은 마지못해 걷는 것처럼 발을 뗐다. 시우보다 한 걸음 정도 앞서서 걷기 시작한 에반의 입꼬리는 이제 숨김없이 한껏 올라갔다.

처음엔 옷깃을 잡고 있었지만, 시우는 어느새 에반의 오른팔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으헉…….”

“박쥐 인형이잖아.”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검은 물체에 시우의 입에서 또 본능적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에반은 제 팔을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서는 시우 때문에 뒤돌아봐야 했다.

“나도…… 나도 알거든.”

소스라치게 놀라 놓고는 무안했는지 시우는 다른 곳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에반이 슬쩍 오른쪽 팔을 당기자 쫄래쫄래 시우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시우의 몸이 뒤로 빠졌다.

시우의 이름표를 조금 전 튀어나온 처녀 귀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다음에 나오는 좀비가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쯤에서 좀비가 나왔던 것 같은데, 주위를 살핀 에반은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이제…….”

이제 좀비가 나올 거라는 말을 에반이 꺼내는 것보다 캐비닛에서 좀비가 튀어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끔찍한 좀비 분장을 하고 끄어억거리는 소리와 함께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직원이 다가오는 순간 에반은 분명 시우를 제 뒤쪽으로 보내려고 했다.

“안 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분명 저보다 뒤쪽에 있던 시우가 어느새 앞으로 나와 에반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는지 앞으로 가려는 자신을 꼭 안은 채 뒤로 밀었다. 졸지에 시우의 보호를 받게 된 에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좀비에게 등을 보여 주며 자신을 보호하려고? 가상의 상황이긴 하지만 방금까지 시우의 반응을 보며 귀여워 어쩔 줄 몰라 소리 죽여 웃던 에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으아아…… 제발 오지 마!!!!!!!!”

에반을 한쪽 벽까지 밀어붙인 시우는 더 가까워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가 또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좀비는 제가 들고 있는 이름표를 주기 위해 더 다가오는 것이었지만, 시우의 입장에선 기겁할 일이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차라리 자신을 좀비 쪽으로 보내고 뒤로 숨으면 된다. 시우의 작은 몸 정도는 쉽게 가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우는 비명을 지르고 난리 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좀비가 무서워 그를 물리치거나 공격할 용기는 없어도…….

김시우, 내가 널 어떡하면 좋겠니?

품에 안겨 든 시우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에반은 좀비의 손에 들린 이름표를 낚아챘다. 그러자 제 할 일을 다 한 직원분은 계속해서 불쾌한 소리를 내며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갔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수천 번 말하는 것보다 단 한 번의 행동이 더 깊은 진심을 전했다.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찍고 있는 두 대의 카메라를 본 에반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속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솔직히 그리 큰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이것저것 원하는 것도 다 해 봤다. 추후엔 모든 것이 제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냥 지루했고 무료했으며 외로웠다.

넘쳐 나는 집안의 권력으로 장난도 쳤고, 관심 있는 분야는 다 건드려 봤다. 딱 한 번 이 미친 운명에 분노한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시우가 사라졌던 그날.

하지만 이내 시우를 다시 만났을 땐 그 분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만났으니까. 전 시간대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고 추억이 수없이 쌓였다. 지금도 쌓이고 있다. 감춰져 있던 비밀도 풀어냈다.

저를 밀어내고 피하기만 하던 시우가 제게 마음을 연 날. 세상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었으며,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또 돌아가면 찾으면 되고, 다시 만나면 되고, 뭐든 다시 하면 된다고 자신만만했다.

제겐 그런 능력이 있었으니까.

에반은 처음으로 제 운명을 저주했다. 악마가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 소중한 이를 위해, 이 사람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서. 짧은 몇 년의 시간이 아니라 수십 년을 같이 있고 싶다.

“갔어?”

제 상의 옷깃을 꼭 잡고 어깨 근처에 얼굴을 묻고 있던 시우의 몸에서 힘이 조금 빠지면서 작게 한숨 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 시간대 이야기를 꺼내도 위화감 없이 이어진 대화를 떠올리자 먹먹함이 밀려왔다.

“……응. 여기 이름표.”

이 또한 쌓이리라, 제 기억 속에.

“대박! 대박. 이름표. 그 좀비였어?”

방금까지 굳어 있던 시우는 에반의 손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언제 그렇게 달라붙어 있었냐는 양 얼른 에반의 품에서 벗어났다.

“가자.”

에반이 건네는 이름표를 받아 제가 입고 있는 후드 티셔츠 앞주머니에 잘 챙겨 넣은 시우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여전히 벽에 기대서 있는 에반의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으악!! 으아악!!!”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에반을 찾고 그의 팔에 매달려 걷기 시작했지만 어둠 속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시우를 보는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시우가 놀라서 제 품을 찾아 파고들면 안아 주고, 뒤로 빠질 때면 그 걸음에 맞춰 걸었다.

어둠이 많은 것을 가려 주는 공간에서 에반은 오직 시우에게만 집중했다. 싸울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힘겨워할 시간도 부족하다.

“다 왔다.”

방금까지 제 등 뒤에 딱 붙어서 옷을 잡아당기고 얼굴을 묻고 있던 시우가 폴짝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 손으로 밀며 시우가 뒤돌아보았다.

어두운 터널의 끝에 빛이 찾아들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시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앞서 나간 시우가 후드 티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이름표를 꺼내고는 팔랑팔랑 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에반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에반은 손을 들어 입술을 뭉개듯 문질렀다. 딱딱하게 굳어 어둠이 짙게 내렸던 그의 표정이 가면을 씌운 듯 확 변했다.

여유작작하고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만들어 낸 에반은 닫혀 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우 씨, 오늘 ‘귀신의 집’ 어땠어요?”

미션 점수 환산 및 추첨을 해서 팬분들께 돌아갈 자유 이용권 개수 등을 설명한 후 이어진 찬의 질문에 시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괜히 제 볼을 쓸었다.

“아니. 그게…… 생각보다 무섭더라고요. 저만 혼자 들어갔잖아요. 중간에 에반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 냈습니다.”

귀신의 집에서 나온 후 메이크업 수정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달아오른 볼이나 붉어진 눈가 같은 건 완전히 커버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방송에 울고불고한 것도 다 나갈 것을 알기에 변명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았다.

“이로써 우리는 시우 씨도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못하는 것이 없는 우리 시우도 귀신과 좀비는 싫답니다.”

찬의 말에 상준이 맞장구를 쳤다.

“시우 씨. 그런데 멤버들이 속인 걸 알면 어떨 것 같아요?”

가끔 피디의 목소리가 방송에 나갈 때가 있었다. 대부분 손짓이나 스케치북에 내용을 적어 의사 전달을 하는데, 불쑥 끼어든 피디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피디에게 향했다. 무엇보다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귀신의 집에 들어갈 팀 정할 때, 뒷거래가 있었다면요?”

피디가 씩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가자, 커다란 눈을 깜박이고 있던 시우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뭐 그리 중요한 말이 적혀 있다고 큐시트를 뚫어져라 보는 찬과 갑자기 심장이 아프다며 주저앉는 상준. 달이 예쁘다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예찬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있는 에반에게 시선이 닿았다.

“잠깐만요. 나 모르게 짰다고요? 그럴 시간 없었는데? 찬이 형이 바로바로 진행했잖아요.”

아직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시우의 입에서 빠르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그럴 때 나오는 시우의 버릇이었다.

“멤버들께 물어보세요.”

“아닌데……. 진짜 그럴 시간 없었는데. 에반이도요?”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을 깜박이며 제 아랫입술을 만지던 시우는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에반의 행동에 허- 하는 탄식을 뱉었다.

“아니. 난 짠 게 아니고. 그거 예찬이가…… 예찬이가 네 옆에도 있었으니까 당연히.”

“와…… 진짜요? 다 짰어? 나 혼자 보내려고? 와…… 에반, 에반 루이스. 너…….”

그때까지도 설마설마하던 시우는 절대 말을 더듬는 일이 없는 에반이 횡설수설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한 손으로 머리를 확 쓸어 넘겼다. 그 거친 행동에 잘 쓰고 있던 공룡 머리띠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와……!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에바니까지……. 와…… 진짜 우리 헤어져. 나 너랑 안 놀아. 말도 붙이지 마. 내 방에도 오지 마. 너랑 친구 안 해.”

기가 찬 듯 방송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삐딱한 포즈와 말투로 에반을 보는 시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야! 그건 아니지.”

“뭐가 아니야!”

둘이 싸우든 어쩌든 피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컷을 외쳤다. 이 장면을 본편에 실을지 비하인드로 묶을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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