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결국 밤을 지새웠다.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따라다니던 불면증을 잊고 지냈다.
침대 옆 서랍장 한쪽에 늘 있던 수면 유도제도 수면제도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에반이 자두를 가지고 왔던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에반과 침대를 같이 썼다.
멤버들도 매니저도 알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한 날 으르렁거리며 싸워 댔다던 에반과 매일 밤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둘의 사이를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니.
그동안 얼마나 제가 정신을 놓고 살았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불면증이 사라진 것 같다. 에반의 옆에만 있으면 편안해졌고, 잠이 든다는 생각조차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했다. 잃을 것을 알기에, 정해진 끝을 알고 있기에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우는 침대에 앉아 당근 쿠션을 안은 채, 먼동이 터 오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늘 열기가 가득하던 침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진득하든지 달콤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항상 섞여 있던 페로몬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 먼저 사과를 하면 조금 비틀어진 관계는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
겨우 몇 시간,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공간에 그와 같이 있는데도 시우는 자신을 감싸는 한기에 여린 입 안 살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이 한기의 근원은 단 하나였다. 상실감.
에반에게 제 삶의 한 부분을 내준다고 생각했다. 일도 사랑도 다 할 수 있다는 과한 욕심을 품었다.
‘거래 조건이 뭐야?’
‘응?’
‘예뻐해 줄 테니까 네 말을 잘 들으라며.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게 생기면 말할게. 그게 뭐가 됐든 나중에 내가 원하는 거 한 개만 꼭 해 줘. 대신 지금은 더 안아 줘.’
‘코코, 왜 그래?’
욕실에서 제가 먼저 시작한 둘만의 밤은 침대에서도 이어졌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처럼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시우도 에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을 갈구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시우는 안고 있던 당근 쿠션을 내려놓았다.
불면증은 제게 익숙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건 아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바닥에 앉아서 느릿하게 스트레칭도 했다.
밤새 설친 잠 때문에 무거운 몸을 풀기 위해 습관적으로 해 온 아침 스트레칭.
몇 달이나 하지 못한 제 루틴이었다.
이게 자신의 삶인데.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엎드린 시우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의 근육들이 늘어나면서 찾아오는 그 뻐근함에 집중했다.
쭉 뻗고 있던 팔을 접고는 손목 안쪽을 코에 가져갔다.
숨기지 못하는 향이 짙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처럼 숨기고 싶다. 제멋대로 흘러 나가는 제 감정을 감추고 싶었다. 지금 제 페로몬에는 어떤 감정이 묻어날까?
항상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페로몬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가끔 이루어지던 감정 동화는 사라진 것 같았다. 어젯밤 격한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제가 에반에게서 느낀 건 표면적인 감정이었다.
짜증? 분노? 이런 것들.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그러니까 정말 한 사람이 그 상황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던 것과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다행인가.”
어두운 제 내면을 그가 알게 될까 봐 두렵다. 온통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자괴감에 절어 있는 추악한 면만큼은 감추고 싶었다. 모든 이에게 들키더라도 에반에게만큼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
사랑받고 싶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 갈구하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오직 그에게 받는 사랑으로 뒤덮어 버리려던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모습만, 행복하고 밝고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다. 다시 회귀하게 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즐기기로 했는데, 겨우 몇 시간 만에 깨달아 버린 상실감이 또 시우의 감정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제 삶의 한 켠을 내어 준 것이 아니다. 이미 시우는 제 모든 것을 그에게 줘 버린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제 삶에 스며든 그가 제 전부가 되어 버렸다. 이대로 젖은 채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그가 없을 시간을 버텨 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해야 할까.
손목에 코를 댄 채로 시우는 눈을 감았다.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그대로 있던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온 시우는 화장대 앞에 서서 페로몬 탈취제를 꼼꼼히 뿌렸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간 시우는 커피 머신의 추출 버튼을 누르고 냉장고를 열어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마멀레이드잼과 딸기잼, 밀크잼 등을 꺼내 아일랜드 식탁에 늘어놓고 사과도 꺼내 깎았다.
“……뭐냐? 에반은?”
막 나온 따뜻하고 진한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한 모금 마시려던 시우는 상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커피 드려요?”
“아……? 어. 적당히 마셔야지. 술이 안 깨네.”
“어제 술 마시러 간 거예요?”
“한 잔만 마시자더니 한 잔이 두 잔 되는 건 일도 아니더라고. 생각 정리는 했어?”
때마침 토스터에서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이 튀어 오르자, 시우는 커피와 토스트를 상준의 앞에 같이 내놓았다.
“그게요…….”
“야, 시간 많거든? 그 곡 딴 사람 줄 생각도 없고, 네가 안 하면 그냥 짱 박아 놓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창작이 쉬운 줄 아냐? 그게 하룻밤에 나오면 누가 고민을 하고 힘들어하냐고.”
제 생각을 꺼내기도 전에 차단당해 버린 시우는 커피를 조금 마셨다.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은 짙은 커피의 맛이 쓰게 느껴졌다. 이 쓴맛이 제게 어울렸다. 그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달콤함에, 처음 맛보는 그 황홀함에 미쳤었나 보다.
“……커피.”
인기척과 함께 들린 말에 고개를 든 시우는 저도 모르게 머그잔 입구를 한 손으로 덮었다. 에반이 아침에 커피를 못 먹게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속이 쓰릴 거라고. 밤에 못 먹게 하는 이유도 그와 같았다. 쉽게 잠들지 못한다며 말리는 것이었다. 그가 제멋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제 습관을 고쳐 주려던 것뿐이다.
이제 와서 제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이런 행동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에반의 시선이 자신과 머그잔에 닿았지만,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우가 내려놓은 진한 커피를 그도 마실 뿐이었다.
“오늘 촬영 뭐랬지?”
“놀이공원요.”
“추운데 무슨 놀이공원이야? 폐장 시간 끝나고?”
“네.”
“엄청 춥겠네. ‘Ocean Story?’”
“실내 놀이공원이니까 좀 덜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오프닝은 밖에서 하겠지. 크리스마스 장식 엄청 해 놨을 건데. 무조건 거기 앞에서 오프닝이다.”
에반과 상준이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자 시우는 머그잔을 든 채 슬그머니 제 방으로 향했다.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에반은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방금 확인하듯 자신을 힐긋 보고 태연하게 상준과 대화를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친놈, 병 또 도졌네. 하긴 쟤 앞에서 이상한 모습 보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뭐.”
사실 에반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로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사랑한다고 속닥거려 놓고, 밤에 그 난리 치고, 오늘 아침엔 반항이라도 하듯이 보란 듯이 커피를 마셨다. 다 마셔 버릴 것이라고, 머그잔 가득 담아 놓은 커피는 겨우 두세 모금 마신 것이 전부였다.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은 시우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솔직히 지금 제 생각과 마음을 모르겠다. 이래서 진즉에 정신과를 다녔어야 했다. 잠이 드는 것이 쉽지 않다며 수면 유도제나 수면제를 먹을 것이 아닌 미쳐 가는 정신 상태를 치료했어야 했다.
결국 또 자신은 뒷걸음질 치고 도망갈 구석을 찾고 있었다.
* * *
“당장이라도 산타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오늘 저희가 미션을 모두 수행하면 그 수만큼 자유 이용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상준과 찬이 가운데 서서 멘트를 주고받았다. 늘 그렇듯 에반과 거리를 두고 선 시우는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다. 자유도가 높은 ‘Ocean Story’에서 이런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우 형, 많이 추워요?”
“칼바람 너무 심해.”
휑한 바람만 부는 뒤를 슬쩍 본 시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예찬의 질문에 작게 대답했다.
“이러면 덜 춥지.”
시우는 제 옆에 서 있던 예찬이 뒤쪽으로 가 뒤에서 부는 바람을 막아 주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잘했냐며 한 손을 들어 보이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우리 막내 다 컸네.”
“예찬 씨, 나도 추운데 저는 바람막이 안 해 줍니까?”
상준과 찬이 같이 진행하는 동안 예찬과 장난을 치던 시우는 찬의 말에 억울하면 예찬을 데려가라고 했다.
“그냥 시우 씨 가지세요. 첫 번째 게임은 바이킹 타면서 심박 수 100 이하로 유지하면서 노래하기입니다. 100 이상 올라가면 탈락, 노래가 끊겨도 탈락이에요. 음악 잘 들으시고 자기 파트 확실하게 불러 주세요.”
“와! 이거 너무 쉬운데요. 빨리, 빨리. 빨리 출발해요!”
상준의 설명에 예찬은 두 손을 위로 들고는 가볍게 콩콩 뛰었다.
“본인 파트 확실하게 노래 다 하시고 심박 수 100 넘지 않으시면 세 장. 둘 중 하나만 성공하면 한 장. 둘 다 실패하면 당연히 없겠죠? 아, 그런데 이건 또 뭔가요?”
찬은 게임 룰을 다 설명하고는 앞에서 피디가 내미는 동물 머리띠 다섯 개를 받아 들었다. 놀이공원답게 꼭 이런 걸 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다 착용하라고요? 보자, 뭐가 좋을까. 혹시 착용하고 싶으신 머리띠 있으세요?”
누가 어떤 것을 쓰라고 정해 주지 않았기에 찬은 다섯 개의 머리띠를 양손에 나눠 들고는 흔들면서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금 뒤쪽에서 진행을 지켜보고 있던 에반이 앞으로 나서서 찬의 손에 들려 있던 머리띠를 낚아챘다.
“뭘 이런 걸로 고민해요. 육식동물 좋아하는 시우는 여기 호랑이. 키 큰 예찬이는 기린. 우리 리더 형은 든든하게 아기 상어. 뭐든 스웨그 좋아하는 상준 형은 이거 귀엽고 좋네요, 판다 머리띠. 그리고 전 남은 이걸로. 됐죠?”
에반은 마지막으로 남은 초록색 공룡 머리띠를 제 머리에 썼다.
“아기 상어가 더 귀여운 것 같은데요.”
기린 머리띠를 받아 든 예찬이 에반에게 받자마자 아기 상어 머리띠를 착용한 찬의 머리띠를 만지며 바꾸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아냐, 넌 기린이야. 무조건 기린 해. 그게 딱이야.”
얼떨결에 호랑이 머리띠를 받아 든 시우는 실랑이를 벌이는 예찬과 에반을 바라보았다. 우연이다. 정말 우연이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계속 입을 삐죽거리며 아기 상어를 웅얼거리는 예찬의 머리에 에반이 반강제적으로 기린 머리띠를 씌워 버렸다.
“컷-.”
오프닝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상준은 별말 없이 머리띠를 머리가 아닌 목에 두르고 있었다. 바이킹 앞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바삐 스태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호랑이보다 공룡이 육식동물 중 최고인가? 바꿔 줘?”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머리띠를 만지작거리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커다란 눈만 깜박거렸다. 혼자 화내고 혼자 삐졌던 것인가? 에반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침에 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던 시우는 그대로 깜박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오후 촬영을 위해 멤버들을 챙기러 온 대환 형이 자신을 깨웠을 땐 이미 에반은 다른 일로 외출하고 없었다.
결국 혼자 밴을 타고 움직였고, 놀이공원에 도착해서야 먼저 와 있는 에반을 만났다. 역시나 촬영 준비로 분주한 상태인지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진짜 나 왜 이러냐. 이 감정싸움은 에반과 자신 둘의 문제이고 이런 것으로 촬영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됐다.
시우가 어떤 대답도 못 하는 사이 시우가 들고 있던 머리띠가 사라지고 시우의 머리엔 초록 공룡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