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같은 곡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 한참을 멍하니 눈물만 흘리던 시우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여전히 같은 음이 제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펑펑 울어 버린 상황이 민망해 손으로 닦아 낸 얼굴을 다시 소매 끝으로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시우는 이곳에 저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왜 이러냐, 진짜.”
[일 있어서 잠시 나갔다가 새벽이라도 다시 올 테니까. 혼자 생각할 거 충분히 생각하고 알아서 문 닫고 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상준이 보내 놓은 메시지를 확인한 시우는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떤 곡에 이렇게 취해 본 적은 없었는데, 첫 음을 듣는 순간부터 밀어닥치는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소파 옆 테이블에 있는 종이와 펜을 집어 들고는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이내 적어 놓은 글자 위를 펜으로 죽죽 그었다.
다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몇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던 시우는 소파에 풀썩 누워 버렸다.
그냥 적어 내려가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단 한 글자에도 제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낙서처럼 변해 버린 종이를 찢은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고마워요. 저 먼저 숙소 들어갈게요.]
상준에게 메시지를 보낸 시우는 테이블에 있던, 다 식은 레몬티를 들고 상준의 작업실을 벗어났다. 매니저를 불러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스크를 착용한 후 후드 티를 올려 쓰고, 패딩의 지퍼를 올렸다. 12월 겨울밤의 공기는 매서웠다.
자정이 넘은 시각.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지키고 있었다.
머릿속에 계속 같은 선율이 떠돌았다. 지독하게도 달콤했다.
상준이 만든 이 아름다운 선율을 제가 망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묻지 않고, 이 추운 날 자신을 배려하여 굳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밖으로 나간 그를 생각하니 선뜻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가로등 아래 발걸음을 멈추고 섰던 시우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꿈과 현실. 미래와 과거. 희망과 절망.
극단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것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긍정을 꿈꾸지만, 그 아래 짙게 깔린 어둠은 계속해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지금 제가 누리는 모든 행복이 사상누각처럼 느껴졌다.
“하…….”
길게 한숨을 쉬자, 몽글거리며 나온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흩어졌다.
제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의 벨 소리가 적막한 밤거리를 요란스럽게 깨웠다.
“응!”
“형, 어디예요? 상준 형 작업실? 방금 에반 형이 오면서 군고구마랑 붕어빵 사 왔는데.”
“나 집 앞.”
“빌라 앞? 어디요?”
“우리 집 보이는 곳.”
예찬의 목소리 뒤로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소란스러워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우 형 지금 빌라 보인다는데요?”
“코코, 어디야? 상준 형 지금 밖에 친구들이랑 같이 있다는데.”
예찬의 목소리에 이어 에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들어가. 나 슈크림.”
휴대전화를 든 손끝이 시려 시우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혼자와 여럿이 함께하는 건 이렇게 달랐다. 며칠씩 말 한마디 안 하고 혼자 지내던 때도 있었다. 모두 그저 제가 잘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연락을 해 오지도 않았거니와 저 또한 애써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시절엔 그랬다.
그리고 그때 시우를 지배한 건 암흑이었다.
시우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상준의 작업실에서부터 들러붙은 이 무한한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가 살던 그 어느 집보다 좋은 숙소에서 항상 활기 넘치는 멤버들과 어울리다 보면 쉽게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급 빌라 입구. 두툼한 패딩을 껴입은, 체격 좋은 사람을 발견한 시우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집 앞에 항상 한두 명이라도 죽치고 있던 사생팬들이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걷고 있던 시우는 뛰기 시작했다.
“너…….”
“춥다, 추워. 빨리 들어가자.”
저를 찾으러 나온 에반이 잔소리를 꺼내기 전 시우는 그의 손을 잡고는 앞장서서 이끌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시우는 뒤돌아섰다.
빌라 정문을 지나쳐 숙소로 향하는 길 한쪽에 있는 으슥한 곳에서 에반이 멈춰 서자,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시우 역시 강제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손이 너무 차갑잖아. 설마 상준 형 작업실에서부터 걸어온 거야?”
“들어가서 이야기해. 너 군고구마도 사고 붕어빵도 사 왔다며?”
빌라 안쪽이라 외부 사람이 들어오기도 힘들고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몸을 숨기기 좋은 공간이기도 했다. 굳이 에반과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시우는 굳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씨도 춥고 밤길도 위험한데. 매니저도 없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혼자 다니는 거야? 내가 다른 부분은 뭐라고 한 적 없잖아. 그저 나 없을 땐 매니저랑 같이 다니라고 한 것도 못 지키면 어쩌자고.”
“네 말대로 날도 춥고 매니저 형도 쉬어야지.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더라.”
제 밝은 목소리에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토해 내는 에반을 올려다본 시우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자, 에반. 지금은 아니야.
“김시우, 너…….”
“너 나랑 동갑이야. 우리 친구라고. 나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는 건 좋은데 너무 과보호하는 건 아니지.”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제 주위를 감싼, 잔뜩 화가 난 에반의 페로몬을 느끼는 순간 시우의 입에서도 결국 퉁명스러운 말이 흘러나갔다.
좋을 땐 뭐든 좋아 보이는 법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면 보이는 게 없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건 예전부터 느껴 온 것이었다. 에반은 본인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끔은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조차 다 해 주려고 했다. 제가 먹는 것까지 간섭하려 들 때도 있었다.
지금껏 그에게 맞췄다. 눈을 뜨자마자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에반이 따뜻한 유자차를 건넬 때도. 막 튀긴, 기름 잔뜩 머금은 돈가스를 먹으려다가도 담백한 돌솥비빔밥을 권하면 군소리 없이 따랐다.
얇은 면 티셔츠에 두툼한 패딩 하나만 입고 나가려다가 에반이 면 티셔츠 위에 니트 조끼라도 더 입으라고 하면 또 그렇게 껴입었다.
에반이 원하니까 굳이 그런 것으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밤늦게 혼자 오는 자신을 걱정해 그가 빌라 앞으로 나오는 모습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사람 많은 숙소에서는 말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밤늦은 시각에 저를 밖에 세워 놓고 잔소리를 퍼붓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걱정했다는 말 한마디면 이해했겠지만, 한 번은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부분을 에반이 정확히 건드려 버렸다.
방금 에반의 말을 자른 건 자신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다.
오메가니 알파니 하니 그런 말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베타였다면 이렇게까지 안 했을지도 모르지.
지금 에반이 하려던 말은 분명 형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이런 말.
“우리가 단순한 친구만은 아니잖아.”
“연인이라고 해도 내 모든 것에 간섭할 권리를 준 건 아니야.”
“하……. 날 추운데 밤늦게 혼자 걸어 다니지 말라고 한 것이 그렇게 문제야?”
시우는 에반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받아치는 말에 혀를 찼다. 이놈은 지금 이 문제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그것만 말하는 거야? 밤늦게 혼자 다녀서 진짜 미안하네요. 미안해 죽겠네. 또 그랬다간 내 다리라도 부러뜨리겠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해서 네 맘대로 하려고 하지 마. 그거 짜증 나. 네가 뭘 아는데? 내가 어떤지 네가 알아? 무슨 생각 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다 알아? 네가 못 알아들으니까 확실하게 말해 줄게. 간섭하지 마.”
시우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뱉어 냈다. 평소였다면 그냥 또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작은 불만들이 쌓여 가고, 그리고 그것이 과거와 뒤엉키는 순간 감당을 하지 못하고 터져 버린 것이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가는 더한 말도, 다시는 주워 담지 못할 말실수까지 할 것 같아 시우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시우는 제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반의 가슴을 두 팔로 세게 밀어 버렸다.
“잘 생각해. 네가 뭘 잘못했는지.”
에반이 다시 저를 잡을까 시우는 그대로 빌라를 향해 뛰었다. 에반이 오지 않았지만,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러 버렸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우 왔어? 붕어빵 뭐 먹을…….”
“아뇨, 안 먹어요. 형, 저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잘게요.”
찬바람을 잔뜩 몰고 들어온 시우가 제 말을 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소리까지 들은 찬은 이번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에반이 시우를 찾으러 간다고 나갔다. 그런데 지금 제 앞을 지나친 건 시우 혼자였다. 절대 상대의 말을 함부로 끊는 일이 없는 시우가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형, 우리 2층 가서 먹을래요?”
군고구마를 입에 문 채로 이 모든 것을 같이 지켜본 예찬은 앞에 있는 야식을 보며 웅얼거렸다.
지난여름부터 몇 달 동안 숙소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사랑과 행복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는 바람에 하루가 멀다 하고 숙소에서 냉기가 돌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난 이거면 되는데, 넌 더 먹을 거야?”
“슈크림붕어빵 한 개 더 먹으려고 했는데…….”
“그냥 먹지 마. 내일 우리 촬영도 있는데.”
슈크림붕어빵을 집으려던 예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뭘 망설여? 에반이 오기 전에 자리 뜨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 우리가 잠시 평화협정에 눈이 멀었지. 다시 전쟁 시작이고만.”
앞에 놓인 우유를 홀랑 마신 찬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으아아……. 형, 형. 나 버리지 마요. 안 먹으면 되잖아.”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찬을 본 예찬은 허둥거리며 펼쳐 놓은 것을 수습했다. 그러고는 얼른 찬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패딩과 후드 집업을 벗어 옆으로 던진 시우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털었다.
모르겠다, 진짜.
방금 제가 에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시우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혼란스러운 이 세상의 구원자.
구원의 손길, 파멸의 미래.]
펜으로 마구 그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썼던 글 중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귀여운 발라드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문구였다.
종이를 찢으며 욕실로 들어간 시우는 종잇조각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아무래도 작사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행복, 연애, 사랑.
역시 그런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속이 썩었는데, 어찌 그런 순수하고 순결하며 고결한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뜨거운 물에 샤워를 끝내고 나온 시우의 시선이 잠시 잠겨 있는 자신의 방문에 닿았지만, 미련 없이 차가운 침대로 파고들었다. 한동안 자신이 끌어안고 자던 인간 난로 에반 대신 폭신하고 말랑한 커다란 당근 인형이 시우의 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