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35화 (135/187)

135화

[3부]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은 시우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아무렇게나 들러붙어 있는 머리카락과 헐렁한 면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열기에 달아오른 두 볼은 붉었고, 반복된 연습에 숨은 거칠었다.

제게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다. 수백 수천 시간을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온몸의 진이 빠져 서 있을 힘이 없을 때면 이렇게 주저앉아 거울 속의 제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곤 했다.

누군가가 제 노력을 알아주기를,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연습실이 아닌 무대 위를 마음껏 뛰어다니기를 꿈꾸면서 긴 시간을 버텼다.

“하아…….”

시우는 두 손으로 젖은 얼굴을 훔치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바로 지난밤에도 시우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화려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국내에서 열린 뮤직 어워드에선 신인상에 이어 보이 그룹 퍼포먼스상까지 받았다. 홍콩에서만큼 많이 울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소감으로 제가 한 말은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가 전부였다.

조금 더 기억을 거슬러 가자면 입국장에 발을 딛는 순간, 시우는 제 앞에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영국에서의 일이, 약 열흘간 제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꿈처럼 여겨졌다.

여유롭고 한적한 시간. 러쉬, 록시와 거실에서 뒹굴뒹굴하고, 에반과 나눈 숱한 키스와 관계는 모두 환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복잡한 백화점을 돌아다닌 것도,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세단을 타고 이동한 것도. 그의 가족을 만난 것도.

방금까지 타고 있던 전용기까지 꿈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데리러 온 매니저와 경호원들.

입국장 문이 열리고 한 걸음 떼는 순간 오션, 에반, 시우. 자신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 주는 많은 사람들. 눈을 뜨기 불편할 만큼 번쩍거리는 플래시 세례는 지금 제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토록 동경하고 꿈꾸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었다.

시우는 손을 들어 제 목선과 어깨를 쓸었다. 에반이 무수하게 남겨 놓은 흔적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깨를 주무르는 시우의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들렀던 병원에서 들은 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내놓은 건 후발현이라는 말이었다.

시우의 페로몬은 에반만이 알며, 시우가 자신과 에반의 페로몬 외엔 그 어떤 오메가와 알파의 페로몬도 맡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검사가 필요하며 이상 현상이라는 주석이 달렸다.

페이든 역시 히든 오메가 쪽이 더 맞을 것 같다고 했지만, 추후 일어날 어떤 일을 대비해서라도 공식적인 서류에는 후발현으로 남겨 두는 것으로 정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

에반을 만나지 않았다면 시우는 평생을 베타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깨를 만지던 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떠올리기만 해도 아찔했던 수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에반은 제게 각인을 하지 않았다.

페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고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각인만은 하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하지만 시우 역시 그의 어깨를 물 수가 없었다. 각인이 가지는 그 무거움을 알아 버렸으니까,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종속되어 버리는 무서운 형벌 같은 족쇄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좋다고 덜컥 각인해 버리면? 에반은 평생 다른 이를 만나지 못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시간이 꼬여 버린다면 남겨진 자는 정말 어떻게 될까.

평생을, 아니 지난 수십 년, 앞으로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제게 각인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죽을 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그와 각인을 맺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흐릿해지는 기억에서 에반만은 확실하게 기억할 테니까. 그와 함께한 이 시간대만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면 정말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은 이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테지만, 에반은? 이 시간대의 에반은?

차라리 그와 같이 회귀를 했으면 좋겠다. 같은 시간을 무수히 반복하더라도 함께라면 행복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우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혼자만 해도 버거운 이 시간을 어떻게 그에게도 씌울 생각을 한단 말인가.

최악이다, 김시우.

한번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생각은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커져 나갔다. 그래서 왜 우리는 각인을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감히 제가 먼저 하지도 못했다.

“에반이 없으니까 허전해?”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시우는 옆에서 들리는 말에 저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수병 하나를 제게 건넨 상준 형이 옆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거울 속엔 자신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선 예찬이 찬이 형의 안무를 봐 주고 있었고, 방금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상준 형은 지금 제 옆에 있었다.

“허전하긴 뭐가 허전해요?”

“너 아까부터 계속 문만 보고 있잖아. 분명 거울 보는 거 같은데, 눈은 거울에 비친 문을 보고 있다고.”

피식 웃는 그의 말에 시우는 머쓱해 제 손에 있는 생수병을 만지작거렸다.

무거운 생각에서 확 깨어난 시우는 복잡한 감정과 마음을 정리하기에 급급했다.

멤버들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자신과 에반의 관계를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자 쉽사리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반과 자신의 관계는 팀에게도 결코 이득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굳이 들추지 않았다.

“아닌데…….”

정말 제가 문을 보고 있었을까? 에반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역시나 다른 멤버들보다 바빴다. 아침에 얼핏 듣기로는 드라마 쪽에서도 러브콜이 왔단다.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급으로 꽤 비중이 높았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이고…….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아, 진짜 놀 때가 좋았다. 근데 너 작사 어떡할 거야?”

계속 가라앉던 시우는 상준 형의 질문에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 곡 아직 있어요?”

작사라. 지난번 충동적으로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고. 딴 거 있어. 딱 너 같은 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던 시우는 뚜껑을 열고는 목을 열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상준 형에게 작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 놓고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스케줄이 바빴고,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상준 역시 바빴기에 흐지부지 그렇게 넘어가 버린 일이었다.

“잘하고 말고가 어딨어. 해 보는 거지. 봄에서 여름 넘어갈 무렵, 미니 앨범 나갈 때 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 저 실력 없고 진짜 아닌 거 같으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 줘야 해요.”

예전의 자신이라면 도망쳤을 것이다.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냐고 손을 저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망설인 시우는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부딪쳐야 했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욕심을 냈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억이 제게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을 알기에 무엇이든 더 하고 싶었다. 그 어떤 추억이라도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좋았다.

아픈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꺼낼 수 있는 기억이 많아야 했다.

어느 기억이든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잡고 있으면, 그 모든 일이 에반, 오션과도 관련되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많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어나. 이제 힘들어서 연습은 더 못 하겠고, 생각난 김에 해야지. 어떤 곡인지 들어야 너도 작사할 거 아니냐.”

둘이 같이 움직였기에, 숙소에서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근처에 있는 작업실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 있으면 없던 곡도 막 만들어질 것 같은데요?”

“야, 야……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이번 휴가 동안 작업실 옮기고 기계 다시 세팅하고. 얼마나 바빴는지 아냐? 거기 박스 아래로 내려놓고 알아서 앉아.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상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시우는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박스들을 한쪽 구석으로 옮겨서 쌓았다. 무심하면서도 세심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었다.

“녹음실까지 있어요?”

“정산금 다 쏟아부었잖아. 진짜 빡시게 곡 써야 한다고.”

이미 음원 수익 어마어마하면서.

시우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작업실 가운데 있는 높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일반 테이블보다 훨씬 높은 스탠딩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레몬티를 내려놓았다.

“스탠딩 테이블을 왜 이렇게 가운데 뒀어요?”

“보통 앉아서 작업하는데, 잘 안 되면 서서도 하고. 뭐, 또 한편으로 거기 넘어오지 말라는 뜻도 되고?”

상준의 말대로 그는 테이블 건너편에서 기계들을 만지고 있었고, 시우는 조금 떨어진 이 테이블 밖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퍼스널 페이스가 넓은 상준다운 발상이었다.

“서 있지 말고 옆에 앉아. 소파 있잖아.”

“그냥 서 있는 게 편해요.”

“뭐, 알아서 해. 일단 곡이 두 개가 있긴 한데, 들어 보고 네가 결정해.”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몬티를 조금 마셨다.

늦은 밤. 방음이 잘되는 작업실엔 상준이 기계를 만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이윽고 처음 듣는 멜로디에 시우는 귀를 기울였다.

상준은 곡을 틀어 놓고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은 채, 시우를 응시했다.

사람이 언어로 표현하는 건 아주 극소수였다. 무의식에 나오는 행동이 그 사람의 진실된 마음이었다.

말로는 어느 것이 좋다, 싫다, 둘 다 좋다. 이런 말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본심을 언어 속에 숨기는 건 너무 쉽다.

그랬기에 상준은 항상 곡을 공개할 때는 그 곡을 듣는 이의 작은 행동 하나 놓치지 않으려 그 사람에게 집중했다. 말에는 수많은 거짓이 섞일 수 있지만, 행동엔 거짓이 숨어들 틈이 없었다.

그것도 제 행동을 의식하는 상황이 아닌 이런 편안한 자리에서는 모든 의미와 감정은 행동에 담겨 있었다.

“…….”

하지만 시우의 행동은 그 의미를 해석할 이유조차 없었다.

처음 들려준 잔잔한 곡이 끝나 갈 무렵, 시우의 어깨가 떨렸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숨소리가 떨렸으며, 스탠딩 테이블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준은 두 번째 곡은 틀지 않았다. 그저 손끝을 움직여 같은 곡을 다시 틀었다.

제가 고심해서 만든 곡은 이미 주인을 찾았다.

상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Ocean Story’ 촬영 중 텐트 안에서 잠든 시우와 그를 지켜보던 에반을 보고 써 내려간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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