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에반 가족과의 식사는 귀여운 케이티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식사 시간에 맞춰 잠이 든 케이트는 식사가 끝날 무렵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동행한 유모도, 엄마도 싫다고 뿌리친 케이티는 원래 제자리였던 것처럼 시우의 무릎 위를 차지하고 앉았다.
처음 아기를 안는 것이라 시우의 품이 불편할뿐더러 그의 행동이 꽤 어설플 텐데도 케이티는 시우의 품 안에서 이유식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케이티, 이리 와.”
할머니와 엄마가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자, 케이티는 작은 고개를 짤짤 흔들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색한 손놀림과 케이티의 장난으로 이유식을 반쯤은 턱받이와 케이티의 옷에 흘려 버린 시우의 난감한 사정은 아랑곳없이 케이티는 손을 올려 시우의 볼을 만졌다. 그러고는 커다란 눈망울로 시우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처럼.
시우에게 꼭 자신을 데리고 있으라는 듯 눈을 깜박이고 배시시 웃는 모습에 시우는 덩달아 같이 웃고 말았다.
아기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였다니…….
“안 돼. 너 그렇게 쳐다봐도 안 돼. 시우 내 거야.”
아기와 눈 맞춤을 하고 있던 시우의 고개가 옆에 앉은 에반에게로 향했다.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선언한 에반은 한 팔을 뻗어 시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탁-.
분명 자신을 안고 웃어 주는 시우인데, 에반의 커다란 손이 시우의 어깨에 떡하니 올라오자 입술을 앙다문 케이티의 작은 손이 에반의 손을 탁탁 때렸다. 그리고 불만 어린 표정과 목소리로 에반을 향해 떽떽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시우는 나랑 같이 집에 가서 나랑 잘 거야. 넌 엄마, 아빠랑 가야지.”
사실이긴 하지만 모두가 오해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고작 10개월 된 아기와 싸우는 에반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시우는 손을 뻗어 그 입을 막아 버렸다.
“케이티, 우리 이거 먹을까?”
화기애애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자, 시우는 얼른 케이티의 핑크색 물병을 들었다. 아직 어린 아이인 만큼 시우의 유인책이 통했는지, 케이티는 시우가 건네는 물병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하지 마.’
에반을 향해 눈을 치켜뜨고 입 모양으로 경고를 건넨 시우는 케이티의 목에 둘린 턱받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케이티가 시우만을 따르다 보니 가족들은 이미 시우에게 양해를 구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인형같이 귀여운 데다 자신을 잘 따르는 아기가 싫지 않은 시우는 오히려 케이티와 노는 것이 더 좋았다.
처음엔 다들 한국말로 인사말을 나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 보니 대부분 집안과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아기를 잘 보네요.”
어느새 옆에 있던 유모가 건네는 물수건을 받아 든 시우는 케이티의 입가부터 닦아 주다 작게 웃었다.
“저 잘하고 있어요? 아기랑 이렇게 있는 게 처음이라서, 솔직히 케이티가 편한지 어쩐지도 모르겠어요.”
“손도.”
입가만 닦고 물수건을 내려놓은 시우는 유모가 새 물수건을 주면서 말을 하자, 이번에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응? 어떻게 해 줘?”
이유식도 다 먹고 뒷정리까지 끝나자 시우의 품에서 일어난 케이티가 다시금 시우의 목에 두 팔을 두르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다 먹었으니 일어나서 또 놀아 달라 뜻이었지만, 그걸 바로 알아듣지 못한 시우는 케이티의 등만 토닥였다.
“꼬맹이, 너 이러면 다음에 선물 없어.”
에반에게 세 살 미만의 어린 아기를 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회귀하는 동안 계속해서 어린 조카가 생겼으니까. 세 살 이후 더 큰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케이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은 케이티가 싫다는 표현을 하기도 전에 시우의 품에서 케이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목말을 태우자, 대번에 케이티가 에반의 머리를 잡았다.
방금까지 시우 아니면 안 된다던 케이티 어디 갔나요?
또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깔끔하던 에반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기고 엉망으로 만드는 케이티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가족 식사인지 육아 체험인지 모를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시우는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소파에 엎드렸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인사를 하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또 볼에 입을 맞추시면서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내년에도 연말에 같이 식사하면 좋겠네. 활동하면 체력적으로 힘들고 지치는 일도 많을 텐데, 저 녀석까지 감당하려면……. 한국 가면 한의원 가서 더 좋은 약 지어 먹어. 내가 이야기해 놓을게. 다 받아 주면 밑도 끝도 없으니까, 시우가 적당히 혼내고. 알겠지?’
‘네?’
‘우리 가족이 된 거 환영해. 아! 내가 너무 빨리 김칫국 마신 거야?’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으로 제 어깨까지 토닥여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계속 눈앞을 떠돌았다.
식사 시간 전 인사를 나눌 때 하신 말씀과 마지막에 하신 말씀까지 이어 본다면 이미 그의 가족은 에반과 자신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 봐도 교제를 허락하는 말이었다.
솔직히 에반만 해도 벅차서 그의 가족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 먼 미래까지 내다볼 수가 없었다. 케이티에게 머리를 뜯겨 가면서도 놀아 주던 에반을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며 말 그대로 진짜 이상했다.
연애, 결혼, 아기, 가족.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물론 연애까지는 생각해 봤지만, 그 이상은 자신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으아앗!”
소파에 엎드린 채, 눈만 끔벅거리던 시우는 자신을 일으키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그냥 일으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공주님처럼 안아 드는 그 행동에 더 놀란 것이다.
“야! 뭐야? 내려놔.”
“싫어.”
“뭐가 싫어? 내려 줘. 이제 씻고 잘 거야.”
“알아.”
“알면 내려 줘.”
에반의 품에 안겨서 강제로 옮겨진 시우는 그가 자신을 내려놓은 곳이 욕실인 것을 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냥 가서 씻으라고 말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씻기 위해 옷을 벗으려던 시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턱짓으로 나가라는 뜻을 표했다.
그와 동시에 뚱하게 있던 에반의 눈썹이 실룩거리며 움직였고, 순식간에 그가 입고 있던 상의가 사라져 버렸다.
“뭐 하냐?”
“옷 입고 씻을 순 없잖아.”
그래, 옷을 입고 씻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왜 여기서 옷을 벗냐고.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에반의 상체를 갑자기 마주한 시우는 주춤거리며 물러서서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그래.”
네가 여기서 씻고 싶으면 그리 말하지. 그럼 난 다른 욕실로…….
에반을 보지 않고 게걸음으로 욕실을 벗어나려던 시우의 허리가 그에게 잡혔다. 그리고 달랑 들려 넓은 대리석 세면대에 앉혀졌다.
아예 도망갈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에반이 제 다리 사이로 들어와 시선을 맞춰 오자, 이번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어디 가려고? 마음에 안 들어, 코코.”
마음에 안 드는데 왜 다가오는데. 그 잘생긴 얼굴을 제게 들이밀자, 시우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뭐가?”
“너 오늘 나 안 봐 줬잖아.”
“…….”
내가 널 왜 안 봐 줘? 우리가 오늘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게 네 얼굴인데, 마주 앉아서 얼굴 보고 밥도 먹었고, 같이 쇼핑도 했고. 방금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손장난을 치면서 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밥 먹는 동안 케이티만 안아 주고. 케이티만 먹여 주고. 케이티한테만 웃어 주고. 어?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나는 말도 못 하게 하고.”
누가 래퍼 아니랄까 봐. 시우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투정을 늘어놓는 에반의 손은 익숙하게 시우의 니트 안으로 파고들었다.
“케이티는…… 아기잖아.”
불만 가득한 표정과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에반의 손길은 집요했다. 예민한 시우의 귀 뒤쪽에 입술을 맞춰 오며 숨김없이 페로몬을 풀어 버리자 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케이티보다 더 오래 안아 줘. 그러기로 했잖아.”
예전처럼 집요하게 입술로 물거나 빨지는 않았지만, 촉촉한 입술이 제 피부 위에서 뭉개지는 느낌에 시우는 에반의 볼을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케이티보다 오래 안아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런 건 포함 안 됐거든. 거래는 확실하게 해야지.”
분명 거절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미소를 지은 시우의 입술이 에반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지금 에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장난으로 그러는 것인 줄 알았는데, 에반은 정말 케이티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다.
저를 욕실로 데리고 온 이유가 순수하게 씻으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벗은 어깨를 잡고 있던 시우의 손이 에반의 몸을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뜨겁고 단단한 피부를 만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제 손길에 이렇게 뜨거워지는 것도, 에반의 숨결이 흐트러지는 것도, 그 심장박동 수가 빨라지는 것도 이제는 즐거웠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것을 표현하고 즐겼다.
“거래? 그 거래 조건이 어떻게 되는데?”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 틈에 시우의 니트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널 케이티보다 더 예뻐해 주면 좋겠어?”
에반을 보는 시우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시우의 눈빛에 에반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예뻐하는데.
대답 대신 에반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에반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우의 두 손이 에반의 버클에 닿았고,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버클이 풀어졌다.
다음으로 단추가 풀렸고,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퍼도 내려갔다.
에반의 속옷 안으로 시우의 하얗고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예뻐해 줄 테니까 이제 말 잘 들어야 해.”
영국에서 둘이서 공유할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늘 받기만 했으니까 이번엔 제가 과감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열기를 가득 품은 뜨겁고 단단한 것을 손으로 감싸 쥔 시우는 매번 느끼지만 감당하기 벅찬 부피감에 작게 한숨을 쉬며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아……. 김시우, 진짜.”
방금까지 여유작작하던 에반의 표정이 굳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그의 입에서 잔뜩 가라앉은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