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우아한 레스토랑의 2층에 있는 고급스러운 문 앞에 선 시우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케이티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을 끝으로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에서 바로 출발했지만, 저녁 시간 영국의 교통체증은 서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은 상태였다.
“걱정할 거 없어.”
넌 네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니 아무렇지 않겠지만, 난 아니라고.
수십 년 살면 뭣 하나. 이런 경험은 전혀 없는걸.
하긴 제대로 된 연애부터가 처음이었다.
시우는 제가 안고 있는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고 고르다 지친 시우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하는 제 옆에서 에반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두 분이 좋아하실 만한 것을 권해 주지는 못할망정 다 필요 없다, 그냥 가도 된다, 이런 말만 계속한 것이다.
고민하던 시우는 문득 예찬에게 꽃다발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일 무난하고 호불호가 없을 것 같은 선물이었다.
색색의 아름다운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은 향긋한 향을 가득 품고 있었다. 꽃다발을 본 시우의 시선이 이번엔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의 조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가득 들어 있는 종이 백 여러 개를 든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언제까지 문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말없이 기다리던 직원분의 손이 문에 닿았고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서 와. 오는 데 길 안 막혔어?”
문이 열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에반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시우는 다정한 어머님의 말에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했다.
“조금요. 서둘러 나온다고 했는데, 12월은 어쩔 수 없잖아요.”
“안녕하세요.”
일단 에반의 부모님께는 인사를 드렸고, 그럼 그 옆에 계시는 분이 형님과 형수님. 얼른 상황 파악을 한 시우는 그쪽을 향해서도 꾸벅 인사를 했다.
“이건 어머니. 그리고 이건 우리 케이티 거.”
시우의 품에 있던 꽃다발이 어머님께 가고, 에반의 손에 있던 종이 백은 금세 형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늘 처음 뵙는 에반의 형님과 형수님과도 순식간에 인사를 주고받았다.
“신인상 받은 거 축하해. 참, 시우 몸은 괜찮아?”
시우는 축하와 함께 제 건강을 챙겨 주시는 어머님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오신 어머님이 안아 주시기까지 하자 어색하게 같이 마주 안았다.
지난번에도 자연스럽게 안고 볼 인사를 해 주시더니, 이런 서양식 인사가 시우에겐 참으로 어색했다.
“아……. 네. 괜찮아요.”
“에반, 넌 나중에 따로 이야기 좀 하자. 시우 군은 이쪽으로.”
자신의 어깨까지 토닥여 주시던 어머님이 에반을 향해 차갑게 일갈하셨다. 그러고는 이내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끄는 손길에 시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머님을 따라 움직였다.
“집에서 할까 했더니 다들 밖에서 편하게 먹자고 해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몸이 허할 땐 뭐든 먹고 싶은 거나 맛있는 거 잘 먹는 게 좋은데.”
얼떨결에 어머님의 옆자리에 앉은 시우는 제 손을 잡은 채 말을 잇는 그녀의 손길이 부담스러워 계속 방송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뭘 알겠어요. 이런 레스토랑도 처음인데. 제게 먹고 싶은 것을 묻는 어머님의 말에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제가 잘 챙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회사도 그렇고 형도 좋은 소식 있던데요?”
어느새 제 옆으로 다가온 에반의 손이 자연스럽게 어머님께 잡혀 있는 시우의 손을 빼냈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가족의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기도 어려운 시우는 옆에서 들리는 귀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반의 휴대전화 화면에서 본 천사가 바로 옆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꼭 걸어야겠는지 쉴 새 없이 옹알거리는 귀여운 소리와 함께 제 아빠의 손을 잡고 흔들거리면서 발을 떼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리걸음일 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에반만큼이나 체격이 좋은 그의 형은 몸을 굽힌 채, 인형 같은 딸의 요구를 들어주는 중이었다.
“케이티, 삼촌 보고 싶었어?”
조카에게로 다가간 에반이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자, 꺄르르 맑은 소리가 작은 공간을 채웠다. 단풍잎같이 귀여운 손이 에반의 볼을 한번 만지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또 꺄르르 웃었다.
한 팔로 케이티를 안정적으로 안은 에반은 다른 손으로 케이티의 볼을 콕 건드리며 창가로 향했다. 창가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소품을 향해 케이티가 작은 손을 뻗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에 거리낌 없는 에반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는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가 이내 쏙 집어넣었다.
“에반이 너무 제멋대로지 않아?”
에반과 케이티가 노는 것을 멍하니 보던 시우는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얼른 몸을 바로 했다.
“네?”
“루이스가 알파들이 좀 그래. 질투도 많고 숨기는 것도 못하고. 그래도 예쁘다 예쁘다 해 주면 곧잘 따라오니까 잘 부려 먹어.”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인 어머님이 살짝 윙크까지 하시자 시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루이스가 알파들이…… 어떤데요?
거기다 어머님껜 아주 귀한 아드님이실 텐데,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부려 먹으라고요?
제가 아무리 눈치 없지만 지금 이 상황이 뭔지는 확실하게 감이 온 것이다.
“코코, 이리 와 봐.”
어떻게 아신 거지? 에반이 말했나? 분명 어머님은 자신과 에반의 관계를 확실히 아시는 것 같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짓던 시우를 구해 준 건 에반이었다.
“어머님이 아시는 거야?”
어머님께 양해를 구하고 얼른 창가에서 케이티와 놀고 있는 에반에게 다가간 시우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복화술을 하듯 작게 웅얼거렸다.
“뭘?”
방금까지 창가에 있는 별 장식을 향해 손을 뻗던 케이티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우는 케이티에게 살짝 손을 내밀었다. 보들보들하고 통통한 작은 손을 만져 보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시우는 어머님이 우리 사이를 아시냐는 걸 물으려다 얼른 머리를 작게 저었다. 어머님께서 제게만 작게 말씀하신 것에 이어 윙크까지 하신 걸 보면, 에반은 모르는 둘만의 비밀 이야기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지?
이 공간에 있는 사람 중 시우만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시우만 모른다기보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 페로몬으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
유일하게 에반의 페로몬과 자신의 페로몬만 맡을 수 있는 시우에겐 익숙해지기 어려운 세계이기도 했다.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시우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에반은 방금 룸으로 들어오기 전 시우에게 마킹을 해 놓은 것이다.
며칠째 에반의 페로몬을 잔뜩 뒤집어쓰고 지낸 시우는 제 주위를 맴도는 그의 페로몬이 짙어졌지만 에반의 부모님을 뵙는 자리라는 것에 잔뜩 긴장해 그런 것은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인 가족들은 에반과 시우가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말보다 더 확실한 경고성 멘트를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시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들 아세요. 알아도 모른 척.’
케이티의 작은 손을 만져 보고 싶어 손을 뻗었던 시우는 제게 두 팔을 뻗은 귀여운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달콤하고 부드러운 아기 특유의 향을 폴폴 풍기는 인형이 제 품에 안겨 있었다.
작고 따스하며 말랑거렸다. 낯도 가리지 않고 제 품에 안겨서 작게 하품하는 케이티를 보는 시우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케이티, 이제 엄마한테 와. 시우 씨 힘들어.”
그제야 에반의 형수님과 제대로 눈인사를 나눈 시우는 장난스럽게 케이티를 꼭 끌어안았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이제 형수님께 케이티를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케이티가 짧은 팔을 뻗어 시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시우의 볼에 뽀뽀를 했다.
“케이티, 늦었어. 시우는 내 거야.”
얘가 미쳤나. 지금 뭐라는 거야.
시우는 얼른 에반을 흘겨보며 눈에 힘을 줬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분명히 여기 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에반에게 강조했다. 티 내지 말라고.
언젠가 가족들에게 둘 사이를 알리고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날이 오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어쩌면 회귀의 틈에 갇혀 그럴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히든과 골든이라는 특이한 형질이 가미된 둘의 사이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였다.
서로에게 절대적인 것 같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또 다른 히든 오메가가 나타나면? 그때도 자신은 에반에게 절대적인 사람일까?
긍정적이고 싶다. 단순하고 밝게 살아가고 싶다.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최악의 수를 내다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환경이 그래 왔으니까.
둘은 시우가 오메가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아는 비밀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많아야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파와 베타가 사귄다고? 에반의 배경까지 더해지는 순간 신데렐라보다도 더한 신분 격차가 생겨 버렸다.
에반은 시우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전용기를 띄워 영국으로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도착하자마자 VIP 병동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통제까지 했는데, 어떻게 모르신단 말인가.
히든 오메가가 아닌 후발현 오메가로 아시긴 했지만, 에반이 미리 언질을 해 둔 덕에 두 분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실 일은 없었다.
형수님에 이어 에반까지 케이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 다 케이티에게 제게 오라는 뜻을 표했지만, 오히려 케이티는 시우의 품에 더 안겨 들었다.
뭐가 불만인지 방금까지 웃기만 하던 케이티의 입에서 옹알이가 터져 나왔다.
에반의 손이 제게 더 가까워지자 케이티는 아예 작은 얼굴을 시우의 어깨에 묻어 버렸다. 그러더니 다가온 에반의 손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쳤다.
“케이티도 시우가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어떡하니? 우리 에반이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어머님이 짓궂게 말씀하시자, 에반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작게 웃었다.
“저 괜찮아요. 제가 안고 있을게요.”
제게 꼭 안겨 드는 케이티의 등을 쓸어 주며 시우는 살짝 몸을 흔들어 아이를 달랬다. 계속해서 시우가 안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케이티가 꼭꼭 숨겼던 얼굴을 다시 빼꼼 내밀었다. 귀여운 케이티 덕분에 에반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시우는 창가에서 케이티와 함께 별 장식을 만지기도 하고 길거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처음엔 조그맣고 가볍다고 생각한 아이도 제법 긴 시간 안고 있으려니 팔이 뻐근했다. 하지만 시우는 케이티를 안고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제 품에서 바스락거리던 케이티의 움직임이 느려졌지만, 시우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리 줘. 잠들었어.”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겨 오고 직원분들이 음식을 세팅하느라 부산스러운 상황에 시우는 제게 다가온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장난치고 놀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잠이 들었다고?
고개를 숙여 케이티를 살피는 시우의 입술이 아기의 이마에 살포시 닿았다. 댕글댕글 커다란 눈이 곱게 감겨 있고,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잠든 케이티를 받아 가는 에반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네가 문제야, 김시우.”
아이를 받아 가면서 불퉁하게 내뱉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덧붙이는 그의 말에 작게 웃어 버렸다.
“케이티도 알파란 말이야. 나중에 나 안아 줘. 케이티보다 오래.”
어머님 말씀이 맞았다. 진짜 엉뚱한 곳에서 에반은 질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