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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30화 (130/187)

130화

영국에서의 시간은 말 그대로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하는 것이 전부였다.

눈을 뜨면 일어나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잤다.

굳이 밖을 나가고 싶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시간대로 오고 난 이후 이렇게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엔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지만, 최근엔 거의 분 단위의 삶을 살았다.

놀아 달라는 러쉬를 불러 벽난로 앞에 엎드리게 하고는 러쉬를 베고 누운 시우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던 록시도 살그머니 다가와 시우의 옆구리에 몸을 착 붙이고 앉았다.

서재에서 가져온 『셜록 홈스』를 펼치는 시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 꿈꾸던 삶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품 하나하나가 다 작품인 것 같은 멋진 이층집. 눈이 내리는 겨울, 실제 장작이 타는 벽난로. 커다란 강아지와 귀여운 고양이. 좋아하는 『셜록 홈스』.

그리고…….

찰칵하는 소리에 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또 잠들려고?”

편안한 홈웨어를 입고 손에 카메라를 든, 세상 참 잘생기고 다정하고 완벽한 애인이 있었다.

“응. 잘 거야. 누구 때문에 어제도 제대로 못 자서.”

“그래서 싫었어?”

나른하게 누워서 저를 올려다보는 시우의 옆에 몸을 낮춰 앉자, 러쉬가 대번에 고개를 바짝 들고는 꼬리를 격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일단 시우가 원하니까 그의 베개가 되어 얌전히 엎드려 있지만, 활동성이 많은 이놈은 뛰어놀고 싶은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에반이 다가왔으니, 당장이라도 나가서 놀자는 뜻을 전하는 러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리한 놈답게 시우가 허락하지 않는 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챈 러쉬의 꼬리가 슬그머니 다시 내려앉았다.

“…….”

나중에 소시지 줄게. 눈치껏 행동하는 러쉬에게 입 모양으로 말하던 에반은 제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가슴께쯤에 책을 올려 두고 분명 시선은 책을 향해 있지만, 그 손은 움직임을 멈춰 버린 제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고 있었다.

아, 정말 미치겠다.

지금 러쉬에게 질투한 거야? 러쉬 말고 네 머리를 만져 달라고?

에반이 손을 움직이자 만족스러운 듯 제 손을 놓고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는 시우를 보며 에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현에 서툰 시우였다. 아마도 시우가 조절하지 못하는 페로몬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우는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저를 건드는 손길은 얌전히 받아들였다.

시우가 먼저 멤버들에게 신체 접촉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대신 예찬이 강아지처럼 매달리든, 상준이 머리를 쓰다듬든, 찬이 어깨동무를 하든 그 어떤 행동도 싫다고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참으로 못마땅한 적도 많았는데.

“재밌어?”

“응. 너도 볼래?”

에반은 저를 바라봐 주지 않고 옆에 잔뜩 쌓여 있는 『셜록 홈스』 시리즈를 손끝으로 가리키는 시우의 눈을 가렸다.

“야!”

제 손이 큰 건지, 시우의 얼굴이 작은 건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려 버리자, 대번에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붉고 도톰하고 촉촉이 젖은 입술만 보였다.

“손 치워. 중요한 장면이란 말이야.”

제 손을 치워 내면 될 텐데, 직접 치워 내지는 않고 종알종알 바삐 움직이던 입술이 멈췄다.

“……아니야, 에바나. 그거 좋은 생각 아닌 거 같아.”

아, 들켜 버렸네.

씩 웃은 에반의 입술이 순식간에 시우의 입술을 먹어 치웠다.

“우리 한국 가야 해. 또 흔적 남기면 뽀뽀 안 해줄 거야!”

“안 해줘도 괜찮아. 내가 하면 되잖아.”

귀여운 시우의 앙탈은 에반의 손길 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렸다.

“내일 저녁에 가족 식사가 있거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에반의 품에 안긴 채, 제 등을 천천히 쓸어 주는 그 감각을 즐기던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같이 가면 좋겠는데, 네가 싫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가족 식사?”

“연말이잖아. 아이돌 한다고 한국으로 간 이후, 연말을 같이 보낸 적은 없어서.”

에반이 제 이마에 입술을 대고는 담담하게 말하자, 시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전에 같이 다과도 먹었고, 얼굴도 다 알고, 같은 멤버이자 친구 부모님과 식사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상황이 바뀐 것이 문제였다.

그땐 친구였지만, 지금은 친구가 아니니까.

“…….”

“응?”

꿍얼꿍얼 대답한 것이 에반에겐 닿지 않았나 보다.

“그럼 그 전에 나랑 갈 곳이 있어.”

에반의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식사를 떠올리던 시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옷이었다. 찢어진 스키니 청바지라든가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 흔적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계속해서 덧씌워지는 상황에 보트넥 상의를 입을 순 없었다. 멀끔하고 깔끔하게 갖춰 입는 것이 좋을 듯했다.

거기다 지금까지 영국에서 보내 주셔서 받아먹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번이야 얼떨결에 뵌 것이지만, 지금은 약속까지 잡고 가는 마당에 빈손으로 갈 수도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

“백화점.”

* * *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백화점은 화려한 조명과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데코로 한껏 들뜬 분위기를 자아냈다.

에반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시우까지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한국의 크리스마스와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딱히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도 없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다닌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가끔 다시 돌아보거나 주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런 건 그냥 무시했다. 아이돌이든 아니든 이미 에반이라는 사람 자체가 눈에 띄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적어도 제 이름이나 오션을 부르는 사람은 없잖아.

“이건 너무 그렇지?”

에반의 손에 이끌려 명품 매장을 돌던 시우는 세미 정장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 같았다.

시우는 제 옆에 서 있는 에반을 훑어보았다. 검은 구두와 검은 슬랙스, 흰색 라운드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군청색의 롱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아주 편하게 입었는데 마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편하게 입어. 그렇게 격식 차리는 자리 아니야. 부담 갖지 말고. 이건 어때?”

시우는 에반이 들고 있는 연분홍색 후드 티셔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어려 보이지 않을까? 목선이 다 가려지려나? 분홍색을 좋아하긴 하지만, 인사를 갈 때 입기엔 너무 캐주얼할 것 같았다.

에반의 손에 이끌려 피팅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시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확인했다. 동시에 다시금 안겨 주는 옷을 들고 피팅 룸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몇 번이고 들락거리는 동안 옆에는 시우가 입었던 옷들이 착착 쌓여 갔다.

“그게 좋겠다.”

하도 옷을 갈아입었더니 무엇을 입었는지까지 헷갈렸다. 마침내 에반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청바지에 크림색 오버핏 터틀넥 니트, 그 위에 짙은 회색 코트를 걸친 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처음 고른 것과 이것의 차이가 뭘까 싶지만, 가장 베이식한 디자인으로 무난한 것 같아 시우는 그대로 카운터로 향했다. 옷은 됐으니까, 이제 부모님 선물로 무엇을 사면 될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던 시우의 손이 에반의 손길에 막혔다.

“생일 선물.”

제게 윙크를 하고 결제를 먼저 하는 에반을 막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내 시우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방금까지 제가 입었던 모든 옷이 종이 백에 차곡차곡 담기고 있었다.

이 옷 한 벌이면 된다고 했지만,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에반과의 실랑이에 지친 시우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일단 급한 옷은 해결했고, 간단히 뭐라도 마시자는 말에 에반은 아이스아메리카노, 시우는 아메리카노가 든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필요한 것이 있는지 앞서 걷는 에반을 따라가던 시우는 매장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과연 제가 들어가도 될 만한 곳인가? 서슴없이 들어가는 에반의 등을 보며 시우는 적당히 식은 아메리카노를 조금 마셨다.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분위기. 에반과 제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옆으로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여성이 지나가자 시우는 얼른 몸을 피했다.

팔짱을 끼고 서서 매장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에반을 한참 보던 시우는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손바닥보다 작은 옷과 신발을 보는 순간 가슴이 간질거렸다. 어딜 둘러봐도 그들이 쓸 만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쪽에 있는 젖병이라든가, 작은 장난감이 즐비한 곳에서 시우는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여긴 왜 왔는데?”

에반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간 시우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에반이 몸을 숙여 제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여긴 왜 왔냐고?”

조명을 받아 더 반짝이는 것 같은 에반의 눈동자를 마주한 시우는 니트 끝을 끌어 입술까지 올리고는 다시 말했다.

“아, 케이티 선물 사려고. 명색이 삼촌인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준비해야 하잖아.”

케이티와 삼촌이라는 단어를 들은 시우의 얼굴에서 안도의 빛을 확인한 에반은 손을 들어 그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족 식사이니 형도 올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형수와 조카도 올 테고.

“조카 이름이 케이티야? 여자아이겠네. 몇 살인데?”

조카 선물이라는 말에 미적거리고 당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주위를 둘러보는 그 행동에 에반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10개월.”

“응?”

“태어난 지 이제 열 달 됐어.”

에반은 휴대전화 메신저를 열었다. 형이 일방적으로 보낸, 조카 사진이 가득한 화면을 띄워 시우에게 내밀었다.

“대박, 완전 이뻐. 인형 같아. 천사다.”

에반과 같은 금발이지만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아이의 사진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두 발을 굴렀다. 진짜 인형 같다. 손끝을 움직여 사진을 넘길 때마다 귀여운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얘 선물이라고?”

자연스럽게 피어오른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사진을 구경하던 시우가 시선을 들어 다시금 에반을 바라보았다.

“응.”

“내가 살래. 내가 사 줄게. 이런 아이들은 뭐가 필요하지? 뭘 좋아해?”

“방금 매니저분은 옷을 권해 주시던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앞에 있던 시우가 사라져 버렸다. 넓은 매장을 돌아다니던 시우가 자신을 찾는지 손을 들었다.

조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데 기분이 왜 이럴까.

너무 앞서 나가는 제 생각에 에반은 손을 들어 입술을 슬쩍 문지르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진짜 작다.”

이것저것 다 사려는 시우를 말린 건 에반이었다. 잔뜩 산 옷과 장난감을 포장하는 걸 기다리던 시우의 손바닥 위엔 그보다 더 작은 신발이 올려져 있었다.

“그래, 작네.”

“봐 봐, 이건 배냇저고리래. 막 태어난 아기들 입는 거.”

신발을 내려놓은 시우가 에반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펴게 하더니, 이번엔 아주 보드라운 옷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와……! 어쩜, 이래. 네 손바닥만 하다. 내 주위엔 어린 아기가 없어서. 조카 많이 예쁘지? 나도 조카 갖고 싶다. 누나보고 빨리 시집가라고 할까?”

방금 명품 매장을 돌면서 쇼핑을 할 때보다 더 신난 시우가 눈에 빛을 내며 속닥거리는 모든 모습이 에반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네 누나가 결혼해서 조카가 생기는 것보다 원한다면 우리가 더 빠를 수도 있는데…….

“살까?”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문장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뭘?”

“이거.”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저를 보던 시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환하게 웃던 순수한 얼굴에 잠시 의문이 서렸다. 그러더니 뽀얗던 볼이 붉어졌다. 곧이어 에반의 손 위에 놓여 있던 배냇저고리가 사라졌고, 결국엔 총총거리며 제게서 멀어지는 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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